“버마족이자 불교도로서 로힝야족에게 사죄합니다. 제가 로힝야를 지지하는 이유는 세 가집니다. 첫째, 그들이 로힝야여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은 미얀마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미얀마 정부는 이들이 자국 국민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버마족인 마웅 자니 FORSEA(Forces of Renewal Southeast Asia·새 동남아시아의 힘) 사무총장(56)은 이런 이유로 미얀마 정부의 소수민족 로힝야 탄압을 반대한다. 교육학자였던 자니는 1990년대부터 미국에서 인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미얀마 민주화를 일궈온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고문의 오랜 지지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수지 고문의 로힝야 정책을 보며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수지 고문은 더는 진보주의자가 아니었어요. 집단 학살의 지지자였죠. 이후 수지 고문을 비판하는 글을 쓰며 로힝야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최근 탄압의 정점은 미얀마 정부가 2017년 8월25일 반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로힝야 민간인을 공격한 사건이다. 비영리단체 Xchange에 따르면 2만명 이상을 죽였고 수천명을 강간했으며 400여개 마을을 불태웠다. 사실상 ‘인종 청소’였다. 로힝야 80만명은 학살을 피해 이웃 나라인 방글라데시로 도망쳤다. 현재 로힝야 난민 100만명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캠프에서 머물며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중 절반은 여성과 아동이다.
로힝야 학살 사태가 일어난 지 2년이 흘렀지만 피해 생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제 사회는 내정 간섭과 자국 이해를 이유로 모른 체 한다. 그러는 동안 로힝야는 ‘세상에서 가장 박해 받는 소수민족’이 됐다. 연대를 요청하고자 방한한 로힝야 인권 활동가들을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이들은 활동가이기 전에 평범한 로힝야 사람들이었다. 네이 산 르윈 로힝야자유연합 코디네이터(41)는 미얀마 수도 양곤에 살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가 로힝야로서 차별을 경험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학교 첫날 친구들은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깔라’라고 불렀어요. 흑인을 ‘니거’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외모가 이국적이고 종교가 무슬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미얀마를 떠나기 직전까지도 항상 차별이 있었어요. 친한 친구조차도 앞에서는 이름을 부르지만 뒤에서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았죠.”
르윈 가족은 로힝야로서 미얀마에서 살아가는 건 ‘열린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미얀마에는 로힝야가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시민법 개정에 따라 시민권은 극히 일부 로힝야에게만 주어진다. 대다수가 ‘미등록 체류자’로 분류돼 기본권이 제한돼 있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고 교육도 제한된다. 미얀마는 아시아에서 문해력이 높은 국가지만, 로힝야의 약 80%는 문맹이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 여성이 2명 이상 출산할 수 없게 규제한다. 의사 한 명이 로힝야 16만명을 맡는다. 그 결과 로힝야 영아 사망률은 미얀마 평균 두배이다.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었던 르윈 가족은 1990년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르윈은 양곤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2011년 독일로 건너가 로힝야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미얀마 정부는 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그는 독일에서 난민 신분을 인정받아 8년째 살고 있다. “대학 때까지 살았던 미얀마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차별과 대규모 학살을 생각하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르윈이 말했다.
청록색 히잡을 쓴 야스민 울라 로힝야인권네트워크 대표(27)도 같은 이유로 미얀마를 떠났다. 울라 가족은 울라가 3세 때 태국으로 이주했다. 태국에서 난민으로 16년간 살다가 운 좋게 캐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이주했다. 6년째 캐나다에 살며 캐나다 시민권을 얻었다. 어머니로부터 로힝야의 어려움을 듣고 자라면서 로힝야 인권 운동에 앞장 섰다.
로힝야 인권 운동에는 어려움이 많다. 시민권 박탈은 물론이고 살해 협박도 잦다. 르윈도 운동을 시작한 이후 숱한 살해 위협을 당해왔다. 미얀마 정부는 르윈의 사진을 언론에서 공개하고 그가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죄 없는 가족의 사진도 함께 퍼뜨렸다. 1000여명의 미얀마 불교도들이 조직적으로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르윈을 죽이겠다고 했다. 이들은 2017년 양곤 공항 앞에서 총격으로 암살 당한 무슬림 변호사 우 코니의 사례를 들먹였다. “네가 두번째 우 코니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건 로힝야의 처지를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17년 8월 대규모 학살 사태가 그렇다. “로힝야 반군인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이 경찰 초소 30개를 공격했다고 하지만 증거는 없어요. 미얀마 정부는 이를 구실로 학살을 시작했죠. 공격 대상은 무장단체가 아닌 로힝야 민간인들이었어요. 여성,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산 채로 불에 타서 죽었죠. 마을들은 완전히 방화돼 없어졌어요.” 르윈이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로힝야 여성의 성폭력 피해가 컸다. 울라가 말했다. “2017년 8월 미얀마 군인들은 마을을 포위했어요. 여자들의 옷을 벗기고 골라 어디론가 데려가서 강간을 했고 이를 지휘관에게 보고했죠. 여성을 대상으로 고통을 주면서 공동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공포를 심어줬어요. 집단학살 성격을 가진 강간이었습니다.”
유엔 미얀마 진상조사단은 2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 여성과 남성, 소년, 소녀, 트랜스젠더에게 조직적이며 광범위하게 성폭력을 가했으며 종족학살 의도까지 보여준다”고 했다. 피해자 신체에 심각한 상처를 입혀 성관계나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도 했다.
방글라데시 캠프도 상황이 열악하다. 최단 기간 가장 많은 난민이 유입돼 물자가 부족하다. 로힝야자유연합에 따르면 난민의 생계는 2주마다 지급되는 쌀 2㎏과 렌틸콩, 기름 등으로 겨우 유지된다. 난민들은 천막 아래 땅바닥에서 무더위와 긴 우기를 견뎌야 한다. 법적으로 캠프 내 자원봉사를 제외하면 난민의 고용 노동이 금지돼 일을 하거나 돈을 벌 수도 없다. 의료 서비스도 없다. 아동 40만명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인신매매와 성매매 대상이 돼 갔다.
미얀마 정부와 방글라데시 정부는 일방적으로 로힝야 난민의 송환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23일 예정됐던 송환에 로힝야 난민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 미얀마에 돌아가도 시민권과 신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니는 “난민들은 악어의 입 속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힝야 활동가들은 국가간 제소제도인 국제사법재판소에 미얀마 정부를 집단학살방지협약 위반으로 제소하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본다. 집단 학살은 국가 범죄라고 했다. 하지만 집단학살방지조약에 비준한 100개 이상 국가들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지 않고 있다. 로힝야 활동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봤다. 인도, 중국, 일본 등은 미얀마 정부에 동조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로힝야 문제에 대한 입장을 뚜렷히 하고 있지 않다.
자니는 한국이 미얀마에 대한 투자를 중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자니는 “전쟁과 학살은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미얀마에 대한 투자는 미얀마 정부의 집단 학살 행태를 용인한다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유엔 진상조사단 보고서를 보면 미얀마 정부 사업체 MEHL(Myanmar Economic Holdings Limited)과 합작사업을 하는 15개 외국 기업 중 6개 합작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미얀마 정부에게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한국이 이 범죄에 가담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얀마 정부가 무기를 제조하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순히 여러분의 양심에 호소하러 온 게 아닙니다. 아시아의 리더 국가인 한국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데 동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