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코피노들

②필리핀에 남겨져 미등록 체류 11년···한국 돌아가려 한글 공부하는 형제

마닐라(필리핀) | 이보라 기자

'도움과 이용 사이' 시민단체에 좌우되는 삶

지난달 7일 필리핀 마닐라 숙소에서 강수석(왼쪽)·보석 형제를 만났다. 이들은 시민단체 사무소 2층의 방 한 칸을 사용한다.  이보라 기자

지난달 7일 필리핀 마닐라 숙소에서 강수석(왼쪽)·보석 형제를 만났다. 이들은 시민단체 사무소 2층의 방 한 칸을 사용한다. 이보라 기자

“저는 강수석입니다.” 수석이(17)가 서툰 한국어로 이름을 말했다. 수석이는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를 둔 코피노다.

한국에서 태어난 수석이는 여섯 살 때 필리핀으로 왔다. 한국말을 곧 잊어버렸다. 한국 국적자인 수석이는 필리핀에서 ‘미등록 체류자’다. 형도 마찬가지 신분이다.

아버지 강모씨(50)는 결혼한 지 10년째 되던 해 어머니 수사나(50)와 수석이 삼남매를 필리핀에 보냈다. 이후 연락을 끊었다.

그렇게 이들은 11년 동안 필리핀에 남겨졌다. 여러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거처를 얻었고 한국행을 시도 중이다.

코피노 가정들은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현지 한국 시민단체를 찾는다. 한국 남편도, 한국·필리핀 정부도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 있는 단체를 만나면 다행이다. 간혹 그렇지 못한 단체들도 있다. 일부 단체는 코피노 가정에 해를 끼친다.

방송 출연을 이유로 더 열악한 삶을 사는 것처럼 연출시킨다. 곧잘 거짓말로 회유한다.

일부 코피노 가정은 한국 남편에게 버려진 뒤 다시 한국인에게 피해를 본다. “한국인을 믿을 수 없다”고 코피노들은 말한다.

■가족에게 편도행 티켓 끊어주고 잠적한 아버지…시민단체 도움으로 거처 얻은 수석이네

수석이가 필리핀 마닐라 파시그의 숙소에서 한글을 쓰고 있다.  이보라 기자

수석이가 필리핀 마닐라 파시그의 숙소에서 한글을 쓰고 있다. 이보라 기자

수석이는 필리핀 타갈로그어만 할 줄 안다. 한국말은 잘 모른다. 한글은 간신히 이름 정도만 쓴다. 참고서를 펼치더니 연필로 삐뚤빼뚤 글을 적어 내려갔다. ‘강수석, 강보석, 강세사나, 강민지, 강…’ 어머니와 형, 여동생의 이름까지 적었다. 어머니 이름인 ‘수사나’는 세사나로 썼다. 아버지 이름은 ‘강’ 한 글자다. 아버지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다. “10년 전 일이라 거의 기억이 없어요. 이젠 익숙해졌어요.” 수석이가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지난달 7일 수석이와 큰형 보석이(19)가 머무는 숙소에 갔다. 이들은 집이 없다. 지난 7월부터 마닐라 파시그에 있는 현지 시민단체 사무소 2층의 방 한 칸에서 지낸다. 3평 남짓한 방에는 2층침대와 옷을 수납하는 서랍 등이 놓여 있었다. 수석이는 “다른 사람들 집에 사는 것은 어렵다. 그들이 나와 함께 살아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청소를 열심히 한다”고 했다.

아버지 강씨는 2008년 부인 수사나, 자녀들과 연락을 끊은 뒤 한국에서 노숙인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나는 필리핀에 돌아온 뒤 원래 앓고 있던 정신질환이 더 심해졌다. 올해 6월 치료를 위해 한국에 왔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친구 엘레나의 집에 살면서 치료를 받는다. 막내딸 민지(15·가명)는 지난해 11월 가족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 코피노단체 드림컴트루재단이 도왔다. 부모가 아이들과 떨어진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빨리 한국에 와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단체는 판단했다. 민지는 엘레나 집이 있는 강원 원주의 한 보육시설에 살면서 대안학교를 다닌다. 보석·수석은 필리핀, 어머니와 민지는 한국에 산다.

필리핀 세부에 살던 수사나는 1998년 한 종교단체의 주선으로 강씨와 결혼했다. 그해 한국에 들어온 뒤 삼남매를 낳았다. 2008년 강씨가 갑자기 수사나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가서 좀 쉬고 오라”고 했다.

강씨는 왕복이 아닌 편도 항공권을 끊어줬다. 수사나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세부 근교의 작은 섬 마스바테로 갔다. 마스바테에 도착하자 강씨는 잠적했다. 수사나는 아이들과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을 구할 수 없었다. 큰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11년간 한국 국적의 수석 삼남매는 미등록 체류자였다.

어머니 수사나(왼쪽부터), 민지(가명), 수석, 보석. 드림컴트루재단 제공

어머니 수사나(왼쪽부터), 민지(가명), 수석, 보석. 드림컴트루재단 제공

“자라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것과 같았어요. 어머니는 아팠고, 아버지는 없었어요.” ‘가장 힘든 게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수석이가 말했다. 보석이는 열 살 때, 수석이는 열네 살 때 학교를 그만뒀다. 삼남매는 이 집 저 집을 한두 달씩 떠돌며 살았다. 학교도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학비가 무료인 공립학교를 다녔지만 교통비, 식비 등을 마련하기 힘들었다.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이후 수석이와 보석이는 공사장 노동이나 세차 일 등을 하며 살았다. 이달부터는 세부로 가 식당에서 일을 배운다. 어른처럼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여느 청소년 같은 구석도 있다. 보석이는 이날 방 안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휴대폰 게임에 집중했다. 수석이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서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찍은 수석이의 ‘셀카’도 몇장 볼 수 있었다. 수석이는 교회에서 얻은 기타를 연주하는 게 취미다. 연주를 부탁하자 팝송을 연주했다.

수석이가 지난달 7일 필리핀 마닐라 파시그의 숙소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리듬오브호프 제공

수석이가 지난달 7일 필리핀 마닐라 파시그의 숙소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리듬오브호프 제공

두 사람은 한국에 돌아가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제 삶이 더 나아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엘레나에게 듣기로 한국이 필리핀보다 아름답대요.” 이들은 매일 한두 시간씩 한국어를 공부한다. 엘레나가 화상통화로 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수석이가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걸자 화면에 엘레나가 등장했다. 수석이는 침대 위에 앉아 무릎 위에 교재를 펼쳤다. 방에는 책상이 없다. “안녕하세요. 나는 호주 사람입니다.” 수석이가 교재에 나온 한글을 읽었다. 교재에는 수석이가 펜으로 적은 한글이 빼곡하다.

수석이는 정보기술(IT) 전문가가 되고 싶다. “IT에 대해 배운다면 컴퓨터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는 언젠가 컴퓨터 가게를 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한국에 가고 싶어요.”

수석이가 한글 공부를 한 공책. 리듬오브호프 제공

수석이가 한글 공부를 한 공책. 리듬오브호프 제공

한국에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미등록 체류자 신분이 걸림돌이다. 출국 수속을 밟기 힘들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과 외교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들을 돕고 있는 정진남 드림컴트루재단 대표는 “한국 미성년자들이 외국에 버려져 있는 상황이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영사와 면담하고 외교부에 지원도 요청했으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수석·보석 형제가 한국에 와도 복지 사각지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정 대표는 “아이들이 한국말도 모르는 상태인데 곧 성년이 되면 시설에 들어가기 어려울 수 있다”며 “이런 가정을 위한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통학비·집 주겠다며 방송 출연 요구…촬영 끝나자 주 450원씩 주고 말아

이전보다 가난한 삶을 살게 만든 시민단체…‘탈출’을 해야 했던 민석이네

지난달 5일 필리핀의 한 도심에서 코피노 민석(가명), 어머니 앤젤(가명), 여동생 수진(가명·왼쪽부터)을 만났다. 신원을 노출하길 원치 않아 뒷모습을 촬영했다.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지난달 5일 필리핀의 한 도심에서 코피노 민석(가명), 어머니 앤젤(가명), 여동생 수진(가명·왼쪽부터)을 만났다. 신원을 노출하길 원치 않아 뒷모습을 촬영했다.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지난 8월5일 오후 필리핀 모처의 한 카페에서 코피노 어머니 앤젤(46·가명)과 두 자녀를 만났다. 민석이(가명) 표정은 어두웠다. 인터뷰 내내 땅만 바라봤다. 음료를 시키라는 권유도 거절했다. 한국 단체 때문에 힘들었던 그때를, 또다시 ‘한국인’에게 이야기해야 해서였을까. 이들을 기자에게 소개해준 한국 ㄱ코피노단체 관계자가 말했다. “처음 왔을 때 별명이 ‘얼음가족’이었어요. 아무도 웃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한국인을 믿지 않는다고 했죠. 지금은 훨씬 나아진 거예요.”

앤젤은 1999년 한국 남편을 만나 세 자녀를 둔 코피노 어머니다. 그는 필리핀 모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재원이었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남편과 만났다. 남편과 함께 필리핀에서 세 자녀를 키웠다. 평범했다. 2011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다. 혼자서 세 자녀를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대학 졸업 직전 임신해 교사자격증을 따지 못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허드렛일을 전전했다. 가난했다. ‘세 아이 아빠가 한 사람이 맞냐’ ‘술집에서 일한 것 아니냐’ 등 이웃들의 편견도 참아야 했다. 결국 앤젤은 한국 ㄴ사회복지단체에 접촉했다.

민석이에게 ‘단체와 만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 같았다. 앤젤이 대신 설명했다. 앤젤은 2014년 7월 ㄴ단체 사람을 만났다. ㄴ단체는 앤젤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앤젤은 ㄴ단체 관계자의 집안일을 도우며 일당을 받았다. ㄴ단체는 좋은 제안도 했다. 마땅한 거처가 없었던 앤젤 가족에게 공짜로 살 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민석이가 다니던 사립중학교를 그만두고 공립중학교로 옮기라고 했다. 앤젤은 “지금 생각하면 방송 출연을 위해 삶이 어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설정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민석이는 전액 장학생으로 사립중학교에 다녔지만 ㄴ단체의 설득에 결국 그 학교를 그만뒀다. 살 집이 더 중요하다고 민석이네는 판단했다. 민석이는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약 1시간 걸리는 공립중학교로 옮겼다. 필리핀 공립학교는 사립학교에 비해 교육의 질이 크게 떨어진다. 대학 등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선 사립학교에 다녀야 한다. 앤젤 가족은 다른 코피노 가정과 함께 사는 공동주택으로 이사했다. 방 한 칸을 한 가족이 쓰고 부엌, 화장실 등을 공유하는 구조였다.

이사가 끝나자마자 ㄴ단체는 앤젤 가족에게 한국 방송 출연을 요구했다. 앤젤네 이사와 민석이의 전학은 마치 방송 출연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앤젤 가족은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앤젤이 출근한 사이 민석이 등 자녀들이 방송사와 인터뷰했다. 앤젤은 촬영장비에 붙어 있던 한 한국 방송사 마크를 기억한다. 촬영이 끝난 뒤 앤젤 가족의 사연을 담은 팸플릿도 나왔다. 팸플릿은 한글로 적혀 있었다. 나중에 다른 단체를 통해 팸플릿 내용을 알게 됐다. 내용은 거짓이 많았다. “아이들을 실제와 다르게 굉장히 불쌍하게 보이게 써놨어요.” 앤젤이 말했다.

촬영이 끝나자 ㄴ단체의 태도가 달라졌다. 통학비와 쌀을 제공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자녀들에게 약 20페소(약 458원)만 줬다. 약속에 없던 전기료 이야기도 했다. 전기료 납부가 밀리면 내쫓는다고 겁을 줬다. 단체가 목표를 달성하자 말을 바꾼 것이다.

앤젤은 2015년 3월 ㄴ단체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을 옮기겠다고 했다. ㄴ단체의 현지 직원은 “변호사를 부르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또 다른 한국 언론의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앤젤 가족은 용기를 내 ㄴ단체로부터 탈출했다.

이후 ㄱ단체를 찾아갔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당장 경제·교육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ㄱ단체 관계자는 민석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가 “그 사립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줄게”라고 하자 민석이는 단번에 “No(싫다)”라고 했다.

민석이는 현재 현지 약학대학에 들어갔다. 나머지 자녀들 역시 사립학교를 다닌다. ㄱ단체가 교육을 적극 뒷받침해줬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얻었어요. 전에는 자신들이 이런 환경에서 뭘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코피노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이 단체가 환대해준 덕분이죠.” 앤젤이 말했다.

앤젤 가족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한 ‘코피노 성공 스토리’다. 코피노 가정들은 이 순간에도 시민단체를 찾아간다. 일부 잘못된 단체를 만나면 코피노 가정들은 ‘가난팔이’를 해야 하거나 속임을 당한다. 코피노들의 운명은 한국·필리핀 정부도, 한국 남편도 아닌 시민단체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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