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되지 마라, 잔혹한 세상이 악당을 만들었다는 윤리적 기만에읽음

위근우 칼럼니스트

영화 ‘조커’ 폭력적인 자기연민의 서사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조커>에는 1980년대 초 대도시 고담을 배경으로 코믹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 조커가 등장한다. 2019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조커>에는 1980년대 초 대도시 고담을 배경으로 코믹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 조커가 등장한다. 2019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조커>에 대한 스포일러 다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조커>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주인공이자 후일 조커가 되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자신의 삶이 비극인 줄 알았지만 실은 희극이었노라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부조리함 속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코미디를 발견한다. 하지만 현혹돼선 안된다. 우리는 지금 아서의 삶이 아닌 영화 <조커>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자, 우리는 자신에게 벌어진 불행들을 코미디로 바라보는 아서에게 밀착해 강한 비애와 연민을 느낄 것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한발 벗어나 또 다른 코미디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미리 답을 하자면, <조커>는 코미디로 해석해야만 하는 작품이지만, 그렇게 하기 어렵도록 만든 작품이다. 앞서 인용한 아서의 대사의 원전이라 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통찰을 기계적으로 대응시키자면, <조커>는 조커라는 인물의 행동들에 비평적 거리를 확보해 그의 폭력적 자기연민을 비웃어줄 수 있을 때만 윤리적일 수 있는 작품이지만, 정작 영화는 관객이 한발 떨어져 바라볼 퇴로를 차단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차단이, 텍스트에 대한 비평적 개입을 막는 기술이 영화의 단점조차 가릴 정도로 현란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윤리적으로 동의하지 못하지만 만듦새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만듦새가 윤리적 기만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얼핏 <조커>는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인생의 우연과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병 때문에 종종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광대 아서는 지하철에서 여성을 희롱 및 협박하던 세 명의 남성을 보고 웃다가 두들겨 맞고 우발적으로 총을 쏴 그들 모두를 죽인다. 사건은 계획적이지 않았지만, 마침 죽은 세 명이 고담의 금융업체 직원이라는 게 밝혀지며, 졸지에 그의 살인은 계급적 저항으로 격상되고 그의 광대 얼굴은 봉기의 상징이 된다.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며 잘나가는 코미디언이 되길 바랐던 아서가 이 커다란 오해 앞에서 강한 만족감을 느끼고 자의식을 살찌워가는 과정,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그가 정작 스탠딩 코미디 무대에서 아무도 웃기지 못한 걸로 웃음거리가 되었다가 또한 덕분에 자신이 동경하던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의 쇼에 섭외되는 과정에는 무엇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그래서 웃긴 우연의 음악이 연주된다. 이 선율을 그대로 따라갔다면, 영화 마지막 즈음 아서가 조커가 돼 시민 봉기의 상징으로 환영받는 장면은 더 웃기고 덜 불편한 장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아서가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우연의 운율을, 영화는 아서가 조커가 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재구성한다.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아서는
시도때도 맥락도 없이 핍박받는다
상처는 결국 분노로 폭발되고…

그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은
졸지에 계급적 저항으로 격상
‘선지자’ 조커로 변모하는 과정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 서사가 된다

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트릭이며
많은 이들을 매혹하는 요소가 된다
이 질 나쁜 조크에 웃긴 쉽지 않다

영화를 폭력이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도식적으로 구분했을 때, 영화 전반부의 주어이자 폭력의 주체는 세계이고 아서는 목적어다. 세계가 아서를 멸시하다. 세계가 아서를 때리다. 이것이 지하철에서의 살인과 함께 역전되며 아서는 조금씩 폭력이란 행위의 주어 자리를 차지하고 세계는 목적어로 밀려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주어는 아서가 아닌 조커가 된다. 조커가 세상을 불 지른다. 목적어에서 주어로 옮겨가는 그 과정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닌, 떠밀린 것이다. 상관없다. 인생의 변곡점이란 우연처럼 찾아온다. 머레이의 쇼 엔딩 멘트처럼 “이것이 인생이다”. 문제는 영화가 이것을 예정된 미래를 향한 운명론적 시각으로 연출한다는 것이다. 첫 살인을 저지른 아서가 화장실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마치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조커를 깨우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잊어선 안된다. 그가 방금 세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도망치는 마지막 한 명은 기어코 쫓아가서 죽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아서 혹은 조커의 춤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윤리적 질문 대신 아서의 마음속에 대한 궁금증이 화면을 지배할 때, 살인 사건은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아닌, 조커로의 각성을 위한 일종의 예정조화가 된다. 그래서 폭력을 중심으로 한 앞서의 구분은 실제론 틀렸다. 정확히 말해 아서가 새로이 주어가 되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윤리적 무게를 동반하는 명제다. 영화 후반부에서도 여전히 주어는 세계다. 세계가 아서를 (폭력적인) 조커로 만들었다. 여기서 아서의 폭력과 아서의 폭력에 대한 관객의 암묵적 카타르시스는 쉽게 알리바이를 얻는다. <조커>가 비윤리적인 작품이라면, 폭력을 묘사해서만도, 폭력을 정당화해서만도 아니라,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트릭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조커>를 보고 난 뒤 상당히 당혹스러운 건, 서사 안에서 유의미한 수준의 갈등, 서사적인 역동성을 만드는 갈등이 없다는 점이다. 얼핏 잔혹한 세상과 아서가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은 구조적 실체가 없다. 단지 아서를 핍박하거나 유혹하며 결과적으로는 조커가 되도록 밀어붙이는 경험의 총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영화 초반, 광고판을 들고 모객 중이던 아서가 십대 불량배들에게 광고판을 뺏기고 종국엔 두들겨 맞는 장면이나, 버스 안의 흑인 아이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겨주다가 아이 어머니에게 무안을 당하는 장면에서처럼 그는 시도 때도 맥락도 없이 핍박받는다. 우연히 그가 총이 있어 저항했던 그 순간의 대상(혹은 세계)이 중산층 백인 남성이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우연적 간극에 집중하기보단, 언제나 오해받고 상처받던 아서가 분노를 표출하고 그 분노가 노동계급의 분노와 공명하는 과정을 마치 필연적이고 세계사적인 과정처럼 그려낸다. 시장 후보이자 부르주아 리버럴인 토마스 웨인(브렛 컬런)을 자신의 아버지로 오해하고 접근했다가 주먹으로 맞은 장면은 어떤가. 그의 개인적 사유와 계급적 갈등은 우연인 듯 의도적으로 겹쳐지고 또다시 필연적 결말을 향한 레드 카펫이 깔린다. 이 의도적 혼동은 아서가 조커라는 예명으로 머레이 쇼에 출연해 머레이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더 교묘히 작동한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의 광대 분장과 광대 마스크 시위 사이엔 연관성이 없다고 했지만, 최종적으론 자신의 조크에 웃지 않는 출연자와 관객들을 향해 웃음의 기준 역시 계급적인 것이라고 설파하며 머레이에게 총을 쏜다. 이것은 마치 사회적 차별 속에 모욕당하던 약자의 각성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좌절돼온 불만족을 폭력으로 풀어내며 개중 가장 정당해 보이는 탄환을 집어든 것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아서가 폭발할 수밖에 없이 필연적으로 정렬된 사건에 관객을 몰아넣어 결말까지 달리게 한 뒤, 이 분노의 탄환이 정당한 자리를 향해 발사됐는지 따져볼 최소한의 형식적 거리를 마련하는 대신 불타는 도시로 형상화된 시민 봉기의 스펙터클 속에서 조커의 탄생을 알린다. 거대한 불기둥은 영화 안과 밖에서 논의의 공간을 환호 속에 집어삼킨다.

[위근우의 리플레이]현혹되지 마라, 잔혹한 세상이 악당을 만들었다는 윤리적 기만에

그래서 <조커>의 조커는 거짓 선지자다. 그는 자신의 폭력으로부터 우연히 발발한 시민 폭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인식하고 각성한 혁명가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타락에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영화 <조커>의 책임은 지워지고 캐릭터 비평만이 남는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아서가 조커로 변모하는 <조커>의 모든 필연적 과정은 사실 아서가 자신을 둘러싼 경험적 질료로 재구성한 주관적 망상으로 볼 때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진다고. 앞서 <조커>의 모든 순간이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 서사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것은 자의식 과잉의 범죄자가 세상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행동에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나는 언제나 핍박받아왔으며,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이며, 나의 행동엔 언제나 정당성이 따라붙으며, 나의 고난은 언제나 극복 가능하며, 그로 인해 세상은 나를 숭배한다. 즉 <조커>의 스토리는 실제로 조커에게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조커가 자신에게 벌어졌다고 믿는 조커 자신의 주관적 경험으로 볼 때 비로소 그 모든 순간의 우연과 필연이 정합을 이룬다. 거짓 선지자의 탄생기가 아닌, 자신이 선지자라 주장하는 이의 그럴싸한 허언증. 어쩌면 이것이 <조커>가 건전한 코미디로 해석될 마지막 여지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내적인 형식에서도, 영화 외적인 수용에서도 주인공의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경험세계가 서사적 진실로 인정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조커>는 윤리적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좌절은 실제론 단점이지만 정작 많은 이들을 매혹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 장점으로 상찬받는 아이러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질 나쁜 조크처럼 보인다. 하지만 웃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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