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너무 늦기 전, 더 미루지 말고…‘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가자

윤영호 교수

지금, 죽음에 대한 역설적 희망을 준비할 때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작별의 시간’…외로이 죽음의 고통을 견디는 건 오로지 떠날 자의 몫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슬픔이지만 미래의 생명을 위한 자리 내줌이며 또 다른 희망. 기쁨을 찾은 순간과 기쁨을 준 기억을 기록하자

그것은 삶의 참회록이고 후손들과 이웃들이 당신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보게 될 ‘지혜의 나무’

‘그날’을 맞이할 연습을 시작하자…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소풍’을 위해

승진의 기쁨에 들뜬 이반 일리치에게 뜻밖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고통이 찾아왔다. 부인은 그가 떠난 다음이 걱정되고 딸은 결혼 문제로 바빴다. 동료들은 벌써 그가 떠난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에 관심이 많다. 슬픈 일리치를 멀리한 채 남은 자들은 살아가야 할 시간과 해야 할 일들이 걱정이다. 그의 고통을 그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리치는 삶을 돌아보니 잘못된 삶을 산 것 같아 후회스럽기만 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야기다. 나 역시 그랬다.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계실 때도 현실에 바빠 어머니 곁을 지키며 삶과 죽음, 그 이후 삶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 어머니에게 찾아왔을 때조차 더 오래 사실 것이란 막연한 기대만 했을 뿐이다. 예수가 겟세마니동산에서 죽음의 잔을 받을지 근심과 번민에 싸여 기도할 때도 제자들은 밀려오는 잠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다. 외로이 죽음의 고통을 견디며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월마트 창업자로 세계적인 갑부였던 샘 월턴도 임종이 가까워져 삶을 돌아보니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며 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우리들이 맞을 죽음도 일리치나 샘 월턴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바쁜 가족들 삶을 위해 요양병원에 맡겨질 것이다. 게라심이 이반 일리치의 처지를 진심으로 가엾게 여기고 고통을 덜어주고 큰 위안을 주었던 것은 호스피스 봉사다. 절망 속에서 삶을 바로잡아 보려는 일리치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준 것은 아들의 입맞춤과 눈물이었다.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톨스토이의 또 다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만날 수 있다. 한 러시아 부자가 좋은 가죽을 구해 구두를 만들어 달라며 구둣방에 왔다. 멋진 구두를 신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를 짓고 돌아갔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만났다.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구두가 아니라 슬리퍼였다. 러시아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슬리퍼를 신기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가족, 친구들과 나눌 시간을 가져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미루지 말아야 한다. 살아갈 삶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아무도 모른다. 말기 진단을 받으면 그때 하면 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말기 진단 후 남은 6개월도 짧을 수 있다. 사람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고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기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말기암 환자의 경우 요즘 새로운 항암치료를 더 쓰다 보니 그 기간도 2~3개월로 줄었다. 암 이외에는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 알 수 없고 그날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떠나는 자는 남는 자들을 걱정한다. 1989년 학생이었던 필자에게 준비된 죽음을 보여준 40대 중반 남성이 있었다. 그의 세례명은 바르나바였다. 말기 진단을 받고 병실에 누워있던 그를 가톨릭원목실에서 봉사활동하는 학생으로서 찾아갔다. 그는 위암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남을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 준비를 했다. 투병 중에도 최악을 대비해야만 했다.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준비하려는 노력이 그를 5년간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살아갈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절실했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필자는 정말 슬펐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죽음에서 24세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던 누이의 모습이 투영돼 그랬을 수도 있다.

누이의 죽음이 의사가 되게 했듯 그의 죽음도 필자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명의료와 호스피스에 대해 알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능’과 ‘필요’가 만나면 소명이 생긴다고 했다. 필자는 호스피스 돌봄을 소명으로 생각하게 됐다. 의사가 된 후부터는 찾아가는 호스피스 돌봄을 했다. 게라심이 했던 봉사처럼 병실의 말기환자들을 방문했고 외래에서 진통제를 처방하고 수녀들과 함께 환자들 가정을 방문했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이 바뀌고 습관이 되고 그렇게 10년간의 시간이 흘러 성격이 달라지고서야 알게 됐다. 말기환자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그 희망을 ‘역설적 희망’이라 부른다.

몇 년 전 한때 ‘버킷리스트’가 유행했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두 말기환자들이 하고 싶은 것의 리스트를 적어 하나씩 실천하는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버킷리스트가 개인적 경험의 소유로 머무르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고 완성해 삶의 지혜로 남는다면 우리 삶을 가치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 영화 <엔딩노트>에서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등장했다.

영국 공영방송사인 BBC에서도 삶의 마무리를 위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다음은 필자가 이들을 현실에 맞게 수정해 만들어 본 10가지 리스트다.

이 리스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연재된 ‘윤영호의 웰다잉이야기’에 나온다. 만약 그날이 올 때를 대비해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지금 점검해 보자.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하나씩 준비하면 된다. 그러나 너무 늦추다 보면 정작 필요할 때 준비되지 않아 아쉬운 경우가 많다. 절대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가장 마지막에 있는 기쁨을 찾은 순간과 기쁨을 준 기억이다. 이집트신화에는 영혼이 하늘에 가면 신이 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한다. 대답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 첫째,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가? 둘째, 자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는가? 지금 세상을 떠나 신 앞에 선다면 기쁨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꼭 자문해 보기 바란다. 행복을 느낀 순간, 행복을 준 순간을 꼭 붙들고 살아가자. 그래서 신 앞에 당당히 서서 말하자.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죄를 짓기도 하고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인생의 기쁨을 찾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다고. 우리 삶이 허망하지 않았고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갈 수 있다.

[윤영호의 웰다잉 이야기](11)너무 늦기 전, 더 미루지 말고…‘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가자

삶을 거꾸로 돌려 찾아보자. 그래 감동을 준 사람, 행복을 주고받은 사람, 어디 한 사람쯤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한순간만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거나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절실하게 찾아보자. 인간은 누구나 선의를 가지고 있다. 배려와 사랑으로 온갖 죄악 속에서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1960년 초에 있었던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선한 일을 한 ‘익명의 그리스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서 중국인들의 전염병을 치료하다 죽어가는 의사 탈록이 아직 신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자 시셤 신부는 울면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느님께서 자네를 믿을 텐데. 인간의 괴로움, 그게 다 회개하는 행위라네”라며 그를 위로한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당신이 인생의 기쁨을 찾았고 그 기쁨이 또 다른 이들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것. 거기에 당신의 가치가 있고 삶의 의미가 있다. 죽음의 절망 앞에서도 꿈꾸는 삶의 희망, 바로 역설적 희망이다. 스피노자가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사과가 필요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듯이.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빛을 볼 수 있는 인간이다.

먼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가까이에 행복했고 행복을 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의 전설이 있다. 자식들에게 두고두고 어떤 분이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이다. 얼마전 문재인 대통령 모친인 강한옥 여사가 임종하셨다. 여사는 “행복했다”는 말을 남겼다. 인생에서 행복을 느꼈고 대통령에게도 행복을 주었을 것이기에 여사에게 천국의 길이 열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듯 대통령도 우리 국민에게 삶의 기쁨을 주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죽음의 순간에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 또한 대통령에게 있다. 국민의 웰다잉을 위한 대통령의 역할이 있다. 국민에게 죽음을 넘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용기를 대통령은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고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에서처럼 국민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삶의 위기를 도전과 성장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선택한 삶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을 향한 존재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 죽지 않으면 생명은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연속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삶은 죽음을 지향하며, 삶의 목표는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죽음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 삶을 포기하지 말자.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슬픔이지만 미래의 생명을 위한 자리 내줌이며 희망이다. 죽음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자. 기쁨을 찾고 누군가를 기쁘게 하자.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넘어서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하자. 그날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고 말하자.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선택이며 믿음이다. 그 믿음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현재의 삶과 미래의 인생도 바꾼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떠난 다음 남은 사람들 삶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많은 환자에 대한 경험과 연구를 통해 증명했으며 필자 스스로가 체험하면서 살아왔다. 역설적이면서도 실용적인 희망이다. 미래의 어느 날, 그 믿음이 내 삶을 통째로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생각을 바꾸고, 행동하고 습관이 되도록 연습하자. 성격이 바뀌도록.

새뮤얼 스마일스가 말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성격이 달라지며 성격이 달라지면 운명이 달라진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도 실천하는 데 한 달이 걸릴 수 있다.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행동을 해도 습관이 바뀌는 데 6개월이 걸린다. 습관이 바뀌고 10년을 유지해야 성격이 달라지고 20년이 걸려야 운명이 달라진다. 만약 남은 삶이 20년보다 짧다고 생각된다면 더 절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하루에도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다. 그날에는 너무 늦다. 그때는 웰다잉 전문가들에게 맡기자.

지금이 생각을 바꾸려는 연습을 시작해야 할 때다. 그러면 내 삶이 달라질 것이고 내가 달라지면 주변도 달라진다. 혹시 불행했던 기억이 있거나 많은 잘못을 했더라도, 자신의 잘못이든 다른 사람의 잘못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럴수록 인생의 기쁨을 찾고 인생의 기쁨을 줄 수 있도록 남은 인생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시작하자.

삶과 죽음에 대한 역설적 희망을 위한 시작이다. 과거의 일로 괴롭다면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양심이 우리를 구원한다. 혹시 행복했고 행복을 주었던 자신만의 노하우(know-how)가 있다면 미리 기록으로 남기자. 불행을 피할 수 있는 지혜가 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인 아이작 뉴턴이 그랬듯이, 후손들과 이웃들이 당신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지혜를 볼 수 있도록 하자. 그들이 러시아 부자가 알지 못했던 지혜를 미처 깨닫지 못해 천국과 지옥 문 앞에서 서성이거나 너무 늦게 깨닫지 않도록 기록하고 나누자.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그것은 삶의 참회록이고 우리 삶이 문화 속에 이어질 것이다.

지금, 역설적 희망의 사과나무를 심자.

▶윤영호 교수는

[윤영호의 웰다잉 이야기](11)너무 늦기 전, 더 미루지 말고…‘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가자

중1 때 누님이 위암으로 돌아가시자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본과 4학년 때 자원봉사를 하면서 호스피스를 알게 되어 호스피스를 전공으로 택해 가정의학과 수련을 받고 전문의를 마쳤다. 2000년 국립암센터 설립 초기부터 참여해 삶의질향상연구과장,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했다. 2011년 서울대 의대 교수로 옮겼으며 건강사회정책실장, 연구부학장,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장을 역임했다. 최근 설립된 웰다잉시민운동 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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