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대교
국립서울현충원은 동작대교 남쪽 입구를 마주보는 곳에 자리한다. 서울에서 가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다. 표면을 매끈하게 연마한 화강암 묘비가 끝없이 늘어선 잔디밭 사이로 조용한 오솔길들이 가지처럼 뻗어나 나있고, 우거진 단풍나무 숲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색에 잠기게 된다. 이곳은 원래 한국전쟁 전사자들을 위한 국군묘지였고, 국립묘지로 승격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안장자의 대부분은 한국전쟁 전사자이다. 묘지를 산책로 삼아 돌아다니는 행동이 경건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파리 외곽의 몽마르트르 묘지를 거닐던 활기찬 여행객의 모습을 서울 한복판의 현충원에서는 보기 어렵다. 국가행사가 없는 평일이면 드넓은 현충원 부지에는 묘지의 숙연함에 어울리는 외로운 침묵만이 감돈다.
현충원 안에는 네 명의 전직 대통령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세워진 넓다란 석판 위에는 깨알 같은 글자로 대통령들의 지난 삶이 기록되어 있다.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비문을 끝까지 읽는 참배객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개 참배객은 죽은 대통령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게다가 비석보다는 무덤의 겉모습이 더 솔직한 정치적 언어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합장묘는 대통령보다는 왕의 무덤에 더 가까워 보인다. 봉분의 크기부터 예사롭지 않은 데다, 무덤 아래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위용 넘치게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병풍석은 너무 사치스러워서 영조 이후부터는 왕릉에도 사용을 금했던 석물 장식이다. 그와 반대로 민주화시대를 상징하는 정치인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는 흔하게 보는 무덤처럼 잔디로 덮인 작은 둔덕이다. 대통령들은 각자 살아서 희망했던 세상에 잠들게 된 것 같다.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현충원의 모든 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무덤에 도달하기 위한 것처럼 보여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다. 묘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박 전 대통령의 무덤은 전직 대통령 묘 가운데 유일하게 부부 합장을 하지 않았다. 피격으로 살해된 육영수 여사가 순국자의 지위에서 국립묘지에 따로 안장될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돌계단을 한참 걸어올라야 하는 높은 지대에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묘소의 배치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제왕적 삶에 걸맞은 묏자리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그대로의 시대적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현충원 산책은 언제나 이곳이 반환점이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로 이어진 돌계단에 걸터앉으면 나뭇가지 사이로 이촌동 아파트 단지와 동작대교가 눈에 담긴다. 우연이겠지만 두 건축물은 각각 박 전 대통령 통치의 시작을 열고 끝을 맺은 사업이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설립된 한국수자원개발공사의 첫번째 임무가 이촌동 공유수면 매립이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백사장의 판자촌에 살던 선주민을 이주시킨 뒤, 그 위에 공무원 아파트를 비롯한 아파트 대단지를 조성했다. 이 시기는 박 전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 시도로 미국을 자극하고,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수시로 거론할 정도로 한·미관계에 신경질적인 긴장이 감돌던 때이기도 하다. 핵무기 개발과 경제 제재로 팽팽하게 맞서는 현재의 북·미관계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같은 언론사의 기사 두 편 위로 반 세기쯤 떨어진 서울 이촌동과 평양 대동강변의 모습은 흥미롭게 포개진다.
“핵무기개발을 염두에 둔 박 대통령이… 원자력 관련 학자 수십명을 국내에 유치했다. 집이 없는 해외과학자들에게는 서울 동부이촌동의 35평짜리 왕궁 아파트를 무료로 임대해주었다.”(중앙일보 1992년 3월6일자) “김정은은 집권 초기 평양 대동강변에 46층짜리 현대식 고층 아파트 2개동을 지어 핵 개발 기술자와 김책공대·김일성대 교수들에게 선물했다.”(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1475호)
최초의 고급 주거 단지였던 이촌동 아파트에는 처음부터 고위직 공무원과 부유한 기업인, 그리고 일본인들이 주로 입주했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주민 구성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위로는 미군부대와 경의중앙선 철도에, 아래로는 한강에 틀어막혀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는데, 그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오히려 아늑함을 느낀 주민도 있었을 것이다. 이촌동 아파트 단지가 아직까지 교통의 섬으로 남아있는 것 역시 박정희시대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별개의 일처럼 보이는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엮여 있으므로 하나씩 찬찬히 짚어보려 한다.
1978년, 박정희 정부는 과천에 정부 제2청사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공식적으로는 서울의 행정 기능을 분산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과천은 서울과 너무 가까운 데다 광화문에 정부종합청사가 지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올해 행정안전부에서 발간한 <정부청사 50년史>에는 유사시에 정부 주요 인물들을 위한 지하대피시설을 확보하는 것이 정부과천청사 건립 이유 중 하나였다고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일까? 정부 주요인물이 지하로 대피해야 하는 ‘유사시’는 어떤 상황이며, 왜 그 지하대피시설은 광화문이 아닌 과천에 있어야만 했을까? 이에 대해 한 월간지에서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했던 적이 있다.
“산 밑에 바로 붙어있는 지역의 경우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포탄이 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청와대. 멀게는 북한산 남장대(해발 716m)와 비봉(536m), 가깝게는 북쪽의 북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이 포탄을 상당부분 막아주는 구실을 한다. ……외교부·국방부 장관 공관, 각국 대사관, 주한미군 영외숙소 등이 있는 한남동도 정도는 훨씬 작지만 남산(262m) 덕분에 비슷한 효과를 얻는다. 관악산(632m) 밑의 과천 정부종합청사도 마찬가지다. 산 밑에 있는 이들 시설의 위치는 우연이 아니다.”(‘신동아’ 2004년 12월호)
박정희 통치의 시작을 열고 끝을 맺은 이촌동 아파트와 동작대교 사업
핵개발과 주한미군 철수로 맞서던 한·미의 해빙에 안보환경 급변하며
원래 구상과 달리 미군기지 앞서 끊기고 이촌동을 휘어감은 동작대로
예정대로 개통됐으면 김재규의 계획 이뤄지고 운명은 달라졌을까
1970년대부터 서울을 사정거리에 둔 북한의 장사정포가 휴전선 가까이 배치되기 시작했고, 정찰위성이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식별한 것은 1978년이었다. 관악산을 혹시 모를 포격의 방패로 삼기 위해 같은 해 제2청사 위치를 과천으로 결정했다는 가설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한편으로 1978년은 국가안보환경이 급변한 기점이 된 해이다. 이 시기 전후로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취소했고, 한국은 핵개발을 중단했으며, 양국이 미사일 사거리 지침을 협의하고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하면서 군사적 동맹을 다졌다. 정부 제2청사 건립에 발맞춰 서울시는 정부과천청사에서 군사시설과 정보기관이 모여있는 남산까지를 잇는 동작대로 신설 계획을 발표했다. 동작대교는 한강 남북단의 동작대로를 잇는 도로 연장 교량으로 구상된 것이다. 그러나 한·미관계가 호전되면서 미군 철수 계획이 백지화되었기 때문에, 동작대로는 미군기지 앞에서 허리가 끊겨 이촌동을 섬처럼 감아싸는 형태로 휘어져야만 했다.
일련의 사건들은 도로의 모양뿐만 아니라 역사의 방향까지 구부려뜨렸는지도 모른다. 이듬해인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는 삼각지의 육군본부에서 기습적으로 체포당하게 된다. 김재규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참모총장을 곁에 두고 육군본부로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남긴 선례를 통해 쿠데타의 성공은 군을 장악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배웠을 테니까. 군의 지휘계통을 장악한 뒤 계엄을 선포해 쿠데타를 완성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홀연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갔지만 김재규는 누구도 감히 자신에게 손대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육군본부와 가까운 중앙정보부 본청에 막강한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포당한 김재규는 “부하들이 곧 쳐들어올 거야”라며 느긋하게 반응했다고 알려져 있다. 계획은 거기서 틀어졌다. 그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정치비평가들은 김재규가 권력에 취해 너무 방심했다거나, 정치적 추가 이미 기울어버렸다는 등의 다양한 평가를 내놓는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설명 쪽에 더 끌린다. 중앙정보부와 육군본부 사이에는 직선도로가 놓여 있지 않았다. 동작대로가 예정대로 개통됐다면 차로 1분 거리였겠지만, 그 자리에는 이전이 취소된 미군기지가 정부과천청사를 품에 안은 관악산처럼 육군본부를 감싸고 있었다. 심지어 한 해 전 창설된 한미연합군사령부 본부가 전운이 감도는 두 권력기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기에, 김재규의 부하들이 포로가 된 상관을 되찾으려면 미군기지 코앞에서 시가전을 벌여야만 했다. 주한미군의 전쟁 억지 효과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증명된 밤이었다. 엉뚱하게도 권력은 김재규를 제압하고 10·26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에게로 넘어갔다.
김재규가 법정에서 주장한 암살 동기 중 하나는 터무니없는 궤변처럼 들렸다. 영애 박근혜와 결탁한 최태민 목사가 저지른 부정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십년이 흘러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 결탁해 저지른 부정으로 탄핵되었을 때, 사람들은 낡은 문서철 속의 문장을 찬찬히 곱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동작대로의 운명에 주목했다. 전국으로 생중계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수감 장면 속에서, 호송 차량이 의왕의 구치소까지 달렸던 도로가 바로 동작대로(현 도로명 과천대로)였다.
박근혜가 구속될 때 차로 달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되걸은 동작대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동작대교 건너는 모습에도 ‘역사’는 있다
올해 초, 30년이 넘는 형량을 선고받은 박근혜의 대통령직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되걸으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동작대교를 건너 청와대로 향했다. 한 손에는 태극기를, 다른 손으로는 성조기를 흔들면서. 역사는 어디에나 스며 있다. 분기점을 만들어낸 발 밑의 길,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던 두 국가의 국기, 가망 없는 주장을 내세운 시위대의 정신세계 속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