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는 코딩은 안 하고 치킨집 차렸습니다.” 정보기술(IT)산업의 중심지 성남 판교의 한 치킨집 간판에 적힌 글귀가 몇해 전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요식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전직 프로그래머가 내건 기발한 홍보 문구다. 이를 본 옛 동료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프로그래머 10년이면 치킨집을 차린다”라는 업계의 자조적인 농담이 엄연한 현실임을 단적으로 드러내 줬기 때문이었다. 29일 경향신문 유튜브 채널 <이런 경향>이 만난 게임회사 넥슨·스마일게이트의 개발자 배수찬·차상준씨는 “게임·IT업계의 개발자들과 프로그래머들은 40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이상 이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 현실도 그렇다”라고 전했다. 두 사람은 각 회사의 노동조합 지회장을 맡고 있다.
게임산업은 극소수 출시작만 시장에서 살아남는 특징이 강하다. 이같은 적자생존 구조는 개발자들의 수명을 짧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국내 1위 업체인 넥슨에서만 지난해 9개의 프로젝트가 출시하기도 전 중단된 것으로 전해진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서, 개발 도중 트렌드가 바뀌어서 등의 이유로 프로젝트가 접히면 개발자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배수찬 지회장은 “예전에는 (프로젝트가)접히자마자 바로 권고사직을 받았다”라고 했다. 어쩌다 출시가 되더라도 흥행에 실패하면 얼마 못 가 서비스가 종료된다. 이런 게임의 개발자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운 좋게 다른 팀에 스카웃되지 않는다면, ‘자발적 퇴사’를 강요당하곤 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순순히 사직을 받아들이는 게임 개발자가 대다수였다. 차상준 지회장의 설명이다. “노조에 가입한 직원들이 가장 놀랐던 것이 정규직이라는 용어의 뜻이었다. 정규직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년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개념을 노조에 가입해서야 알았다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 전에는 회사가 권고사직을 제시하면 ‘월급 몇달 치 주실 겁니까’라고 협상해 한두달치 월급만 챙겨 이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2018년 가을 무렵 넥슨·스마일게이트 등 대표적인 회사들에 노동조합이 하나둘 세워지면서 업계의 스탠다드는 서서히 개선되어가는 추세다. 아직 게임업계 전체에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노조가 생긴 두 회사에서는 고용안정 면에서 어느 정도의 긍정적 변화가 만들어졌다.
고질적인 초과근로 관행도 바뀌고 있다. 2018년 말부터 2019년 초반까지 넷마블·넥슨·위메이드 등 유수의 게임회사들이 포괄임금제를 폐지했다. 포괄임금제는 연장·야간수당 등 초과근로에 대한 수당을 월급에 미리 포함시켜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근로계약으로, 제한 없는 장시간 야근을 유발한다고 비판받아 왔다. 이에 맞물려 정책적으로도 주 52시간 제도가 정착되면서 ‘크런치 모드(게임 출시 직전 밤샘작업을 가리키는 업계 용어)’는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다만 넥슨·스마일게이트 등의 사례는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면서 노동조합도 설립돼 있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했던 일”이라는 평가다. 대기업·중견기업 반열에 들지 못한, 30인 미만 규모의 영세 업체들에서는 여전히 구조조정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차 지회장은 “수많은 중소 게임업체들에서는 지금도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권고사직을 당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떠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게임산업은 1990년대 중반 인터넷·PC의 보급과 더불어 20여년에 걸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그 구성원들은 ‘왜 이제서야’ 자신들의 노동권을 부르짖게 된 것일까. 게임산업이 한창 커 나가던 시절에는 산업 전체가 ‘크런치 모드’에 빠져 있었다. 에너지음료와 인스턴트 식품만으로 버틸 수 있는 젊고 건강한 20대 개발자를 투입해 단숨에 게임을 출시한 뒤, 재빠르게 다음 프로젝트로 갈아타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그 개발자들이 이제 30대 중후반이 됐다. 퇴직 이후를 고민하면서 가정도 돌봐야 하는 나이다. 차 지회장은 “게임 산업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라며 “개발자 본인의 잘못보다는 경영적인 판단에 의해 게임이 접히고 일방적으로 해고당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잦은 야근으로 누적된 건강 문제 등이 겹쳐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노동권을 되찾겠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게임 만드는 사람들이 고용불안과 야근에 시달리지 않고 지속가능한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몇십년 쌓여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게임업계 구성원들은 4차 산업의 가장 최전선에 있다”라며 “경영진들도 ‘시간을 투입해 생산량을 뽑아낸다’라는 2차 산업혁명에서나 가능했던 방식 이외의 전략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