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투표' 18세 청소년 14명이 말하는 내가 바라는 정치
2001년생 김예현씨는 오는 4·15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로 투표권을 갖게 된 만 18세 유권자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빅매치’로 주목받는 서울 종로에 살지만, 둘의 대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서 비례 표를 노리는 정당이 많아졌지만, 어느 정당에 표를 줄지도 확실치 않다. “가족들 성향이 다들 특정정당이긴 해요. 그런데 그 정당이 절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진 않았어요. 하지만 익숙해서 그 정당을 찍지 않을까 싶어요. 아마도요.”
그가 이번 총선에서 던질 표의 향배를 살피기 위해 관심사부터 들어봤다. 지난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됐지만 가지 않았다. “대학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언니, 오빠들 얘길 들어보면 대학에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기회도 많고요. 대학 안 가는 사람들은 서러워서 어떻게 살죠?” 최근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야채’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과자에 쇠고기나 닭고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게 상당히 불편한 ‘채식주의자’이기도 하다. 전쟁 성범죄에 반대하는 서명운동과 군비 축소 집회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운동권’이라고 불리기에는 민망할 정도다. “대규모 군비를 지출하는 미국을 비판하는 집회에 갔었죠. 구경도 할 겸 지인을 따라 참여했는데 하필이면 제가 그날 미국 국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간 거예요. 그때만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나네요. 미국 국기가 보일까봐 들고 있던 패널을 내릴 수가 없었죠.”
좋아하는 정치인은 없지만 ‘불호’는 확실하다. “홍준표씨(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돼지발정제’ 이야기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일말의 기대와 관심도 다 사라지게 되더라고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고, 전쟁에 반대하며, 채식을 하는 10대의 표는 어디로 향할까. ‘정치 1번지’라는 종로 지역구에서 그를 대표할 정치인을 찾을 수 있을까. 김씨처럼 이번 선거에서 새롭게 선거권을 획득한 만 18세 유권자(2001년 4월17일~2002년 4월16일생)는 53만여명이다. 일각에선 이들의 표심이 한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2001년생 6명, 2002년생 8명 등 만 18세 유권자 14명을 만나 ‘내가 원하는 정치’에 대해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달 6일, 12일, 14일 3번에 걸쳐 진행됐다.
이들에게 먼저 국회의원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다. ‘세금충’ ‘기득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 ‘고집불통’ ‘적폐’ 등 비판이 쏟아져나왔다. “20대 국회는 이합집산을 통해 여러개의 정당을 만들었을 뿐 별로 다를 것 없이 이권 다툼만 벌였다”(김진우)는 지적도 나왔다. ‘욕심 많은’ ‘국회에서 언성 높이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파렴치한’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고 편협하고 성차별적인’ 정치인은 뽑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하는 ‘다른’ 정치란 무엇일까. 청소년인권운동을 했던 정유정씨는 “나를 위한 정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삶을 보듬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김예현씨의 경우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지가 최대 관심사다. 국회의원들도 이 문제를 고민하고 해법을 내주길 바란다. “대학에 진학하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 정보 같은 것들이 많잖아요.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아요. 다양한 기회를 접하지도 못하는 거죠.”
올해 수능을 앞둔 2002년생 고3들도 자신들의 미래에 더 많은 선택지가 있기를 바랐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보통 대학을 가죠. 직장을 얻어야 하니까요. 그것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려고 다들 학원에 치여 살고 있죠.”(진선우) “저는 대학 가려고 ‘만들어 놓은 꿈’은 있는데 정말 좋아하는 꿈은 없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불안해하는 친구들이 주변에도 많아요.”(최하영) “대학을 잘 못 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 좋은 시선들이 줄었으면 좋겠어요. 우린 자신의 꿈을 펼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인데 (어른들은) 학생이라면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아예 대학을 평준화로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차태영) “제가 성적이 중위권이에요. 상위권 친구들과 있다 보면 선생님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태도가 느껴져서 서운할 때가 많죠.”(이영현)
고등학교 3학년인 정인해씨는 ‘성소수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는 생각, 그로 인한 편견 어린 말들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랑하는 이와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지금으로선 그러기가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에겐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망이 되기도 한다. 숙명여대에 합격했던 트랜스젠더 학생은 교내외 반발에 입학을 포기했고, 성전환 수술을 받은 변희수 하사는 군에서 강제 전역해야 했다. 박선우씨는 “차별받는 성소수자를 보호하는 법안이 필요하다”며 “내가 국회의원이라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정유정씨도 학교에서의 차별적 발언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학생인권법’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만 18세부터 선거권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거부했다. 최유경씨는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가하는 ‘미성숙 담론’들이 있다. ‘10대는 어리니까 안돼’라는 그 말들이 언젠가부터 ‘나는 아직 어리니까 안돼’라며 스스로를 옥죄기 시작했다”며 “(이번 총선에서 만 18세가 행사하는 표는)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했던 시간들, 어린 게 부끄러웠던 시간들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차태영씨는 “선거권이 생겼으니까 이제 정치인들이 우리 의견을 좀 더 들으려고 노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오히려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참여해온 경우도 꽤 됐다. 김예현씨는 오른손 팔목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란 팔찌를 찼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시위에도 참여했다. “저희 아빠가 정치에 무관심하면 내 삶에 무관심한 거라고 하셨죠.”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촛불시위 등을 보아온 지금의 만 18세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정치’를 경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인터뷰한 14명 중 6명은 ‘혁신학교’인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민주시민’ 교육을 경험했다. 카카오톡 채팅방에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청와대 청원에 동의해달라’는 메시지가 올라오기도 한다. 또 다른 7명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등 시민단체 활동을 한다. 이들 중 4명은 정당에 가입했다.
총선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만 18세들은 투표에 얼마나 참여할까. “제 주변에는 관심들이 많아요. 첫 선거인 데다 (투표 가능 연령이) 만 18세로 내려간 의미 있는 선거이기도 하잖아요.”(김승수) “투표는 누굴 뽑을지 생각만 있으면 도장 찍으러 가면 되니까 어렵진 않은데, 어떤 공약을 했는지 시간을 내서 찾아봐야 하잖아요. 신경 못 쓰는 친구들도 많을 것 같아요.”(이도균)
최유경씨는 “투표율로 만 18세를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인 사회에서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이제 되찾았을 뿐이고,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라며 “성인들의 투표는 그렇지 않은가”라고 했다.
이들의 기대처럼 정치가 ‘내 문제’를 바꿀 수 있을까. 인터뷰에 응한 14명의 유권자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만 18세 선거권 운동’을 벌였던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청소년의 삶을 제대로 대변하는 공약이나 정당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청소년들이 원하는 공약을 모아 국회의원 후보와 정당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적어도 이들이 뭔가 바꾸고 싶고, 바꾸려 나서려는 건 분명하다. 이들은 이미 선거법을 바꾸어 놓지 않았나. 한국 정치는 이들의 요구를 어떤 변화를 통해 응답할 것인가.
선관위 모의선거 교육 전면 불허에 사실상 '반쪽짜리 선거권'
선거 가능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낮아졌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선거 교육’에 대해 규제 위주의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사실상 ‘반쪽짜리 선거권’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나마 가능한 ‘선거법 안내 교육’도 코로나19로 교사들 연수가 취소되고 개학이 늦춰지면서 어렵게 됐다.
지난 2월 선관위는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했던 ‘모의선거’ 교육이 공직선거법에 위배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이 정당별 공약을 분석하고 토론한 뒤 모의투표까지 하는 수업이 실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모의선거 교육의 주체가 교육청과 국공립 교사라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공직선거법은 공무원이 정당 또는 후보자에 대한 선거권자의 지지도를 조사하거나 발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미국, 독일, 스웨덴, 캐나다 등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의선거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 결정이다.
박선우씨(18)는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세워진 교육기관 아니냐. 이런 교육들이 진행돼야 나중에 민주사회의 일원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지 않겠나. 그것이 헌법정신 아니냐”고 지적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법 교육도 코로나19로 사실상 무산됐다. 교육부 관계자는 13일 경향신문과 통화하며 “선관위와 함께 학생들을 상대로 선거법 안내 교육을 진행하려 했는데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한 달 전 시·도교육청 담당자를 대상으로 선거 교육 등을 진행했지만 이후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크게 번지면서 잡아놨던 교사 연수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집합 교육은 어려울 것 같다. 개학을 하게 되면 교사들이 선관위에서 제작한 선거 안내 동영상 등을 이용해 자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야당은 학생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금지하는 교육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미래통합당 박인숙 의원이 지난 1월 대표발의한 개정안에는 ‘학생은 학교 안에서 특정한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다른 학생의 학습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담겼다. 이에 대해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성명을 내고 “학습을 방해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기준으로 참정권을 제약하겠다는 것은 정당성도 없을뿐더러, 학내에서 학생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전면 금지하는 규정이나 지침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