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40주년

응어리진 마음들과 일상을 싣고…518버스, 오늘도 광주 한 바퀴

광주 | 최민지 기자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응어리진 마음들과 일상을 싣고…518버스, 오늘도 광주 한 바퀴

초록과 흰색이 섞인 35인승의 중형 시내버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버스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다. 지난 8일 광주의 ‘518버스’를 타고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를 돌며 많은 이들을 만났다. 민주화운동의 흔적을 훑으며 달리는 이 버스를 광주시민들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누군가에게는 퇴직 후 소중한 일터였고 누군가에게는 병원에 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발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일상, 역사 그 자체였다.

■518버스 타고 5·18 사적 한 바퀴

5·18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주요 사적지 10여곳 지나는
25-2번 버스 2004년 ‘개명’

518버스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 주둔지였던 상무지구(옛 상무대 터)를 출발해 5·18자유공원과 금남로, 옛 전남도청, 5·18국립민주묘지 등 주요 5·18 사적지 10여곳을 지나가는 시내버스다. 본래 25-2번이었지만 노선에 5·18 사적지가 많이 포함돼 있어 2004년 ‘5·18을 잊지 말자’는 염원을 담아 518번으로 바뀌었다. 지역 이름과 두 자리 숫자를 결합하는 광주시 버스체계에서 예외적인 존재다.

2007년 버스 준공영제 실시로 대대적인 시내버스 노선·번호 개편이 이뤄졌지만 518버스만은 옛 모습 그대로 달리고 있다. 하루 10대씩 25~4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지난 8일 오전 10시,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기점인 상무지구에서 518버스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30년 경력의 베테랑 김원중씨(63)다. 광주 토박이인 그는 1980년 5월을 ‘대단히 암울한 시대였다’고 회상하며 매일 오후 6시 전남도청 앞 분수대로 갔던 당시 기억을 꺼냈다. 분수대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궐기대회’가 열린 장소다. 40년이 흐른 지금 김씨는 일터인 518버스로 그날의 흔적을 매일 지난다. “(5·18 사적을) 지날 때마다 그때 생각이 많이 나 뭉클하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5월만 되면 이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김원중 기사가 지난 8일 518버스의 기점인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에서 운행을 시작하고 있다. |유명종PD

김원중 기사가 지난 8일 518버스의 기점인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에서 운행을 시작하고 있다. |유명종PD

■망월동으로 가는 길, 518버스

33.4㎞ 꼬박 100분 달리며
5월 항쟁의 흔적 쭉 훑는
과거·현재 공존하는 공간

518버스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교육자료가 된다. 광주 방문이 처음인 기자는 버스를 타고 5·18 40주년 기념 전시 준비가 한창인 자유공원을 시작으로 5·18의 상징인 금남로로 향했다. 금남로는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군은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집단발포를 했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금남로를 따라 걸으며 헬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여겨지는 기관총 탄흔이 남아 있는 전일빌딩, 광주시민들의 마지막 항거 장소였던 옛 전남도청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었다. 옛 도청 건물 앞에서 만난 대학생 차의진씨(19)는 전남 나주에서 친구들과 놀러 왔다. 광주에 오면 종종 518버스를 탄다는 차씨는 “버스를 탈 때마다 5·18을 떠올리게 된다. 5·18은 책 속에 나오는 과거가 아니라 우리 삶이고 현실”이라고 말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저버린 선택이었다. 다음날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는 등교를 막는 계엄군과 “계엄령 해제”를 외치는 학생들 간 대치가 벌어졌다. 군은 잔혹한 폭력을 휘둘렀고, 분노한 이들이 결집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날 오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18연합동아리 ‘오월빛’을 만났다. 박승인 오월빛 대표(19)는 박관현 열사 추모비 등 학내 사적지를 안내하며 “518버스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알려주는 도구다. 아직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버스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지난 8일 광주전남 5·18연합동아리 ‘오월빛’의 박승인씨와 박찬우씨, 김대현씨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명종 PD

지난 8일 광주전남 5·18연합동아리 ‘오월빛’의 박승인씨와 박찬우씨, 김대현씨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명종 PD

전남대를 출발한 버스는 30여분을 달려 국립5·18민주묘지에 도착했다. 5·18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이들이 잠든 곳이다. 어버이날인 이날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러 온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추모탑 앞에서 만난 이선복씨(57)의 아버지는 전일빌딩 청소부였다. 1980년 5월19일 아버지는 사라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씨는 “열흘 동안 자는 시간 빼고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광주시내 안 가본 곳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를 발견한 사람은 5월31일 전남대병원에서 청소일을 하던 아버지 동료였다. 전화도, 버스도 끊긴 난리통에 그 동료는 병원에서 이씨 집이 있는 송정리까지 10㎞ 넘는 거리를 걸었다. “아버지는 시민들에게 각목을 전해주려다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자상을 입고 온몸을 두들겨 맞았어요. 의식을 잃고 열흘 만에 깨어나셨죠. 이후 5년을 술로 보내다 돌아가셨습니다.”

지난달 2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의 법정에 출석했다. 사죄는 없었다.

이날 저녁 전남대에서 동명동으로 가기 위해 518버스에 오른 대학원생 김현진씨(26)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5·18은 왈가왈부돼서 더 아픈 역사다. 518버스는 나에게 생활 속에서 함께하는 역사”라고 말했다. ‘불금’이라 친구를 보러 간다는 김씨는 대학 1학년 때 망월동묘역(구 묘역)에 다녀오는 과제로 처음 518버스를 탄 이후 매달 두세 번은 이용한다고 했다.

광주 518버스의 내부 전경. | 유명종 PD

광주 518버스의 내부 전경. | 유명종 PD

■때론 야속하지만…고마운 버스

누군가는 기억을 되새기고
누군가는 역사를 읽어낸다
‘5·18버스’의 존재 이유다

518이 마냥 편리한 버스는 아니었다. 기자는 이날 자유공원을 떠나는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놓치는 바람에 다음 버스를 4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코로나19 여파로 감차 운행 중이다.) 굽이굽이 이곳저곳 성실히 들르는 탓에 지도 애플리케이션이 알려주는 ‘최적·최단 코스’는 비켜가기 일쑤였다. 이날 오후 국립묘지행 518버스에서 만난 이정인씨(66)도 이런 야속한 마음을 내보였다. 치과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그는 “묘지 바로 밑 마을에 살아. 시내 나갈 때 맨날 타지. 버스가 이거 하나밖에 없응게. 더 자주 다녔으면 좋겠어”라며 웃었다.

518버스가 광주시내를 달리고 있다. |유명종 PD

518버스가 광주시내를 달리고 있다. |유명종 PD

기사들에게는 체력을 요하는 코스이기도 했다. 운행시간이 60~80분인 다른 시내버스와 달리 518버스는 기점부터 종점까지 33.4㎞, 100여분을 꼬박 달린다. 518버스 운행사인 대창운수 영업팀 안태완 과장은 “노선이 너무 길어 단축을 검토한 적도 있지만, 버스가 지닌 상징성을 고려해 그대로 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518버스는 연간 100만명 가까운 승객을 실어나른다. 그러나 수익은 운송 원가의 73% 수준이다. 코로나19 이후에는 하루 250~300명이던 승객이 절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긴 배차 간격, 빙빙 돌아가는 긴 노선이 대수랴. 518버스는 때때로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놓는 공간이 된다. 518버스를 운전한 지 이제 두 달이라는 염홍규씨(48)는 말했다.

518번 운전기사 김원중(왼쪽)·염홍규씨

518번 운전기사 김원중(왼쪽)·염홍규씨

“가슴 앓고 지내는 분들이 (국립묘지에 가려고) 많이 탑니다. 울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줘요. 우리도 마음이 찡하고 그럽니다.”

1년째 518버스를 몰고 있는 김원중씨에게 버스는 정년퇴직 후 얻은 소중한 일터이기도 하다. 그는 “(518버스 아니었으면)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큰 저기(의미)죠”라고 했다.

해가 지자 봄비가 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비를 피해 몸을 움츠렸던 시민들은 하나둘 버스에 올랐다. 양손 가득 장을 본 한 중년 남성은 짐을 내려놓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518버스는 그렇게 광주시민의 일상에 녹아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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