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 생명”…공공의료 강화가 답
한국 공공의료기관 보유 병상 비율 10% 불과, OECD 평균의 7분의 1에 그쳐
“공공이 주도하고 민간이 보조하는 체계로 바꿔야 2차 대유행 와도 대응 가능”
막대한 예산 투입 우려 목소리엔 “미리 대비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 덜 들어”
대구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던 3월 초 한때 2300명 넘는 환자가 입원할 병실이 없어 자택에서 대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할 이들에 대한 조치가 늦어지면서 국내 코로나19 초기 사망자 75명 중 17명(22.7%)이 입원하지 못한 채 숨졌다. 2017년 기준 인구 1000명당 병상 수가 12.3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4.7개)의 3배 가까이나 돼 과잉공급이란 우려를 사는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인구 243만명의 대구는 병상 수가 4만개에 육박해 전국적으로도 넉넉한 편에 속한다.
이같이 아이러니한 상황의 원인은 민간에 의존하는 의료체계에 있다. 한국의 전체 병상 중 공공의료기관 보유 병상 비율은 10.2%로 OECD 평균(70.8%)의 7분의 1 수준에 그친다. 공공병원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1.3개(OECD 평균 3.0개)에 불과하다. 코로나19 대응에 동원된 대구 지역 병상은 1600여개였는데, 이 중 대구의료원 등 5개 공공의료기관이 1200여개였고 민간은 400여개였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분석에 따르면 전체 병상의 10분의 1을 가진 공공병원이 전체 코로나19 환자의 77%를 진료했다.
■공공병원·의료인력 부족 심각
문제는 턱없이 부족한 공공병원이 감염병 환자를 전담하다보니, 코로나19 치료도 과부하가 걸릴 뿐 아니라 공공병원이 맡아왔던 기존 취약계층 의료에도 사각지대가 생긴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주기적인 재확산을 반복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때마다 이런 사태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김동은 대구 계명대 동산병원 교수(이비인후과)는 지난 2월부터 자진해 코로나19 환자 진료를 하고 있다. 대구의 초기 혼란을 직접 목격한 그는 “민간병원 병실 대부분이 만실인 상황에서 코로나19 환자를 위해 쉽게 동원 가능한 공공병원이 턱없이 부족했다”며 “민간이 주도하고 공공은 취약계층 치료 위주로 보조하는 구조를 공공이 주도하고 민간이 보조하는 체계로 바꿔야 2차 대유행이 와도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구의료원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을 주로 이용하던 소외계층은 아파도 갈 곳이 없어졌다. 150병상 규모의 대구적십자병원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경영적자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의료인력 부족 문제도 한국 의료체계의 고질적인 문제다.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임상의사(한의사 포함)는 2.3명으로 OECD 평균(3.4명)에 못 미치는 최하위권이다. 간호인력(간호사·간호조무사)도 OECD 평균(9.0명)을 크게 밑도는 6.9명 수준인데, 실제 활동하는 간호사 수만 따지면 OECD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당장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환자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숙련된 간호인력을 확보하고 의료보호장비와 필수 의료장비를 비축하는 것”이라며 “대구에서 보호장비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한 채 간호사 1명이 환자를 20명이나 봐야 했던 상황이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공공의료 방치 시 더 큰 사회 비용
문재인 정부는 2017년 대선에서 지역별 공공의료기관 확충 및 기능·역할 확대, 공공·민간병원의 적정 규모 유도, 공공의료인력 정원 외 모집 개편 등 의료 공공성 강화 공약을 대거 내놨다. 하지만 임기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부분 장기과제로 남아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공공의료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부는 비대면 진료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 공공의료 확대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고위 관계자는 “(공공의료체계 정비는) 당장 쉽지 않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없다”며 “당면 과제는 코로나19가 재확산하면 (민간병원을 포함한) 지역별 주요 병원 1~3개가 곧바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공공의료 확충에는 비용 문제가 뒤따른다. 한국노총은 공공병상 비중을 지금의 2배 수준인 20%로 높이려면 약 5조7000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적 타격으로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상황을 고려하면 공공의료 확충을 통해 미리 대비하는 것이 훨씬 적은 비용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지적이 나온다. 윤강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의료연구센터장은 지난 3월 ‘코로나19 대응을 통해 살펴본 감염병과 공공보건의료’라는 글에서 “감염병 대비는 단기적으로는 손실이 불가피하나 사후 대응만으로는 더 큰 사회적 비용을 부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며 “공공의료기관에는 ‘착한 적자’를 허용하고, 민간의료기관에는 손실을 보전하는 등 제도적 보완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윤 교수도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해 막대한 예산을 쓰는 것보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의 제도화와 공공의료체계 강화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나은 정책”이라며 “정부가 정한 70개 의료생활권 중 적정 규모의 종합병원이 아예 없는 25개 진료권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공공병원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공공의료체계가 잘 갖춰진 유럽 국가들도 코로나19로 큰 피해를 입은 점을 들어 공공의료 강화가 답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유럽 국가들 중 피해가 특히 컸던 이탈리아 등은 지난 20~30년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를 삭감해온 나라들”이라며 “또한 ‘방역 실패’와 ‘의료 실패’를 구분해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결핵 같은 다른 호흡기 감염질환이나 당뇨 같은 만성질환의 경우 공공의료가 잘 갖춰진 유럽 국가들이 한국보다 훨씬 적게 걸린다”며 “방역 성공에 자만해서 공공의료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단순히 병상·인력 등 공공의료의 양을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공적 동원이 가능한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구에서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했을 때 병원·지역 간 환자 이송 등 조정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서 초기 대처가 늦어졌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연구소장)는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했을 때 공공병원뿐 아니라 민간병원도 함께 공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법·계획·재정 체계를 명확히 갖추는 게 공공시스템”이라며 “일일이 민간에 협조를 구하는 상황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