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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디지털 성범죄에서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피해 불법촬영물의 ‘삭제’다. 정부가 인터넷에 유포된 불법촬영물의 삭제를 지원하고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삭제 지원운동에 나서기도 하지만, 1차적으로는 가해자에 대한 수사·재판 등 형사사법절차 속에서 불법촬영물을 제대로 찾아내고 없애는 게 중요하다.

디지털 성범죄가 최근 몇년간 급속도로 확산되고 그 피해가 심각한 데 비해 수사·재판을 통해 불법촬영물을 어떻게 확보하고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법 제도가 꼼꼼히 갖춰져 있지 않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에선 디지털 성범죄 특성을 고려한 압수수색과 몰수·폐기 방안이 논의된다. 반면 가해자의 방어권이나 압수물에 대한 소유권이 지나치게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수사 사각지대 ‘클라우드’



수사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불법촬영물이 저장돼있을 가능성이 있는 공간에 대한 철저한 압수수색이다. 컴퓨터나 휴대전화, 외장하드 등은 흔히 압수수색 대상이 되지만 클라우드까지 압수수색이 이뤄진 사례는 흔치 않았다. 전자기기와 동기화를 설정하거나 가해자가 직접 파일을 업로드하면 클라우드에도 불법촬영물이 존재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그래픽 | 이아름 기자

그렇다보니 클라우드의 불법촬영물을 몰수·폐기한 판결도 드물다. 몰수는 범죄행위와 관련된 전자정보나 물건을 국가가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아동 22명의 성착취물 제작 등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휴대전화와 외장하드를 몰수하는 판결을 하면서 주문에 U+Box와 네이버의 ‘클라우드 파일’을 폐기하라는 내용을 포함시킨 게 이례적인 판결로 꼽힌다. 지난해 11월 인천지법 형사14부(재판장 임정택) 판결이다.

원본과 복제본 문제도 있다. 현재 전자정보에 대한 압수는 범죄혐의와 관련 있는 것만을 선별한 뒤 복제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저장매체에는 수많은 전자정보가 들어있어 범죄혐의와 관련 없는 것까지 수사기관이 확보하면 피의자의 인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형사소송법과 대법원 판례 취지에 따라서다. 디지털 성범죄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디지털 성범죄 피의자의 저장매체에서 복제본으로 압수하게 되면 불법촬영물 원본이 피의자에게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지난달 검찰은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을 추가 기소하며 ‘잘라내기 압수수색’을 도입했다. 서울중앙지검은 박사방 사건에서 피의자들의 클라우드까지 수사했는데, 클라우드의 원본 파일의 복제본을 압수한 다음 원본은 삭제하는 방식의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했다. 신속하게 클라우드의 원본을 삭제해 유포로 인한 2차 피해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게 검찰 설명이다.

다만 이 방식이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수사할 때 반드시 이행해야 할 규정으로 정해져있지는 않기 때문에 두루 적용되지는 않는다. 사실상 수사 담당자의 ‘의지’에 달려있는 셈이다. 피해자를 대리해온 한 변호사는 “유포가 명백해보이지 않으면 압수수색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며 “불법촬영물을 가해자가 재유포할 수 있기 때문에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서 압수수색은 적극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주최로 ‘다시 쓰는 사법정의: 성착취 장려하는 사법부 규탄 집회’가 진행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주최로 ‘다시 쓰는 사법정의: 성착취 장려하는 사법부 규탄 집회’가 진행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80%는 몰수하지만…“법원 재량”



현재 불법촬영 사건에서는 법원이 대체로 몰수형을 선고하고 있다. 이 몰수는 현행법상 판사가 반드시 해야하는 것(필요적 몰수)은 아니고, 판사의 재량에 맡겨져있다(임의적 몰수). 불법촬영물 파일, 저장매체, 촬영도구 등 몰수·폐기의 범위와 폐기의 의미가 판결마다 조금씩 다르다.

피해자를 강간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촬영한 사건에서 스마트폰 자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에 저장된 동영상만을 몰수한 판결에 검사가 항소, 상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례가 있다.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스마트폰이 범죄행위에 제공된 물건에 해당하지만 몰수는 법원 재량이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몰수하지 않고 동영상만을 몰수했다고 해서 “위법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다”고 했다. 2017년 10월 판결이다.

최근엔 주목할 만한 판결도 나온다. 지난 5월 광주지법 형사12부(재판장 노재호)는 아동 강간, 성착취물 제작 등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하면서 판결문에 몰수·폐기에 관한 문구를 넣었다. 재판부는 “(디지털 정보는)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 아무런 존재론적 차이가 없다”며 피해자를 협박하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 받고 촬영을 한 스마트폰 자체는 물론, 수사기관이 스마트폰에서 추출해 증거로 제출한 복제본도 모두 몰수한다고 했다.

이 재판부는 불법촬영물의 몰수·폐기는 ‘다시 복원해낼 수 없도록’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로서는 (불법촬영물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라며 “몰수란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당 전자정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없도록 검증 가능하고 완전 무결한 방식으로 모든 전자기록을 삭제할 것을 포함하는 의미”라고 했다. 법원이 판결에 불법촬영물의 ‘복구 불가능한 폐기’를 명시해주면 피해자에게는 안정감을 줄 수 있고, 폐기를 집행하는 수사기관과 가해자에게는 불법촬영물 폐기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여러 법조인들이 말했다.

복구 불가능한 폐기란



그렇다면 복구 불가능한 폐기란 무엇일까. 불법촬영물 파일을 컴퓨터 시스템에서 삭제 버튼을 누른다고 영구히 삭제되는 게 아니다. 데이터베이스에는 흔적이 남아있고, 기술적으로 복원해낼 수 있다. 따라서 저장매체 자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방법, 디가우저 등의 장비를 이용하는 방법, 다른 데이터를 여러번 덮어쓰는 방법 등이 제시된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3월 2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호욱 기자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3월 2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호욱 기자

입법 대안도 필요하다. 20대 국회에서 불법촬영물의 몰수·폐기와 관련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여러건 발의됐다. 불법촬영물의 압수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면 사건 종결 전에도 수사기관이 불법촬영물을 폐기할 수 있도록 하는 안(신용현 의원), 불법촬영물을 촬영하거나 저장한 매체를 법원이 의무적으로 몰수하게 하는 안(김삼화 의원)이 있었다. 이 개정안들은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한 ‘n번방 방지법’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불법촬영물의 압수·몰수·폐기 문제는 수사·재판 절차에서 피의자·피고인의 방어권과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신 의원 개정안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검토보고서를 보면 전문위원과 법원행정처가 방어권 침해를 부정적 측면으로 짚었다.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의 <디지털 성범죄 대응방안 연구> 논문에서 양양한씨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특수성을 반영해 압수·몰수·폐기 관련 법을 정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수사기관이 가해자에 대한 기소 여부와 관계 없이 압수한 불법촬영물을 삭제할 수 있게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논문에 의하면 유사한 입법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군사기밀보호법은 수사기관이 군사기밀을 불법하게 점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군사기밀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고, 점유자가 즉시 삭제하지 않으면 처벌한다고 규정한다. 프랑스에서는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전자정보는 사본 압수 후 검사 지시에 따라 원본을 삭제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이슈가 되면서 경찰이 수사에서 획득한 불법촬영물 정보를 여성가족부·방송통신위원회 등에 제공해 신속한 삭제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에 감경요소로 ‘삭제를 위한 조치를 했는지 여부’를 넣는 방법이 논의된다. 한국여성변호사회 변호사들은 법원의 삭제명령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제안한 적이 있다. 디지털 성범죄를 연구해온 김현아 변호사는 “디지털 성범죄의 가장 큰 특징이 평생 가는 두려움이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사후적인 처리가 돼야 한다”며 “양형으로 반영하면 가해자가 실제로 삭제하지 않을 경우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삭제명령 의무화는) 최소한 법원 단계에서라도 가해자가 갖고 있는 모든 것(불법촬영물)을 삭제하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이나 영상의 불법촬영·유포,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지지동반팀(02-2275-2201, digital_sc@hanmail.net), 여성긴급전화 1366,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02-735-8994, www.women1366.kr/stopds),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02-817-7959, hotline@cyber-lion.com)에서 지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이혜리 기자 lhr@khan.kr
윤지원 기자 yjw@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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