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유엔 마담, 특수업태부, 기지촌여성……. 주한 미군 기지촌의 여성들을 부르던 명칭들은 다양했다. 국가 문서와 신문에는 ‘위안부’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법 제8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성병에 관한 건강진단을 받아야 할 자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중간 생략) 위안부 또는 매음행위를 하는 자.” (전염병예방법시행령, 대통령령 제1257호, 1957년 2월 28일 제정.) “현재 위안부들이 잠깐 동안 위안해주는 데는(속칭 숏타임) 3~5달러가 고작이며 긴 밤(롱타임)은 10~15달러라고 한다.” (매일경제, 1969년 4월 24일 6면)
위안부(Comfort Women)는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여성이다. 대상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이었고, 6·25전쟁 기간에는 한국군이었으며, 전후에는 주한 미군이었다. 기지촌여성 김정자의 증언은 “미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며 시작한다. “그래도 일본군 위안부 언니들은 외국 정부에 당했지. 물론 우리도 미국정부에 당한 것이지만은, 더 기가 막힌 것은 우리 정부에도 당했다는 거야.” (김정자 증언, 김현선 엮음, 새움터 기획,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 아카데미, 2013년, 12쪽.)
성을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는 ‘윤락행위등방지법’은 1961년에 제정됐다. 하지만 기지촌은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오히려 권장됐다.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고, 정부는 그들을 애국자라 치켜세웠다. 계획도시처럼 조성된 기지촌도 있다. 군산의 논밭 위에 남아 있는 ‘주식회사 옥구 아메리칸타운’이다. 1969년 5·16쿠데타의 주역인 백태하 대령의 조카가 1만여 평의 땅을 사들여 만들었다. 군부대처럼 입구에 초소와 철문이 있었다. 철조망 담벼락에 둘러싸인 마을에는 환전소, 식당, 클럽, 매춘방이 있었다. 그곳은 미군들의 성 해방구였고, 기지촌여성들에게는 철저히 통제된 감옥이었다.
정부는 성병을 치료한다는 미명하에 기지촌여성들을 낙검자 수용소에 감금했다. ‘토벌(미군, 한국경찰, 보건소의 합동단속)’에 걸려든 여성들이 끌려갔다. 동두천시 소요산 아래 남아 있는 낙검자 수용소도 군부대 시설을 닮았다. 입구의 감시 초소를 지나면 2층으로 된 빛바랜 하얀색 건물이 나타난다. 그래서 ‘언덕 위의 하얀집’이라 불렀다. 창문에 철장이 쳐진 2층 8개의 방은 내무반을 닮았다. 철장 안에 갇힌 원숭이 신세 같다며 ‘몽키하우스’라고도 불렸다.
1971년 12월 청와대는 ‘기지촌 정화대책’을 발표했다. 주한 미군을 감축하는 닉슨독트린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책이었다. 성병 진료소와 낙검자 수용소는 정화된 기지촌여성들을 미군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2회 성병 검사에 탈락한 여성들은 낙검자 수용소에 잡혀갔다. “완전히 감옥살이라니까……. 걸루 끌려가면 거기서 인제 놔주지, 주사를. 페니실린 맞고 죽는 사람도 있구, 부작용이 나서.” (같은 책, 246쪽) 미군으로 부터 제공받은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쇼크사로 목숨을 잃는 여성들이 있었다. 페니실린 부작용이 겁이 나 탈출하기 위해 2층 옥상에서 뛰어내리다 숨진 여성들도 있다. 동두천시 상패동의 무연고 공동묘지에는 억울하게 죽은 기지촌여성들의 무덤들이 있다. 성병검진패스(보건증) 등록 번호로 짐작되는 숫자가 적힌 나무 막대가 비석을 대신했다. 1992년 케네스 마클 일병이 잔인하게 살해한 윤금이의 시신도 화장된 후 이곳에 뿌려졌다. 증언록을 남긴 김정자는 유언도 남겼다.
“나 죽으면 꼭 화장해서 묻어다오. 그냥 뿌려다오. 다른 단체에게 넘기지 말아다오. (중략) 나는 아무도 없어.” (같은 책, 301쪽) 김정자는 외로웠다. 하지만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가 나타났다. 기지촌여성 117명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했다.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하고 불법행위 단속 예외지역으로 지정해 성매매를 단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8년 법원은 “정부는 기지촌 내 성매매 방치, 묵인을 넘어 적극적으로 조장, 정당화했다”며 2017년 1심 보다 폭 넓게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2년이 넘도록 미군 위안부 판결을 미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