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에 비친 ‘코로나 그늘’…‘항공 승무원’ 새 책 판 대학생 “날아간 내 꿈”읽음

최민지·오경민·조해람 기자

매물 하나에 ‘폐업 눈물’

매물 하나에 ‘재기 소망’

당근마켓에 비친 ‘코로나 그늘’…‘항공 승무원’ 새 책 판 대학생 “날아간 내 꿈”

“<항공 승무원 길라잡이>(위 사진)책 판매합니다. 비닐 안 뜯은 새 제품입니다.”

서울에 사는 대학생 ‘윰’(21·닉네임)은 최근 중고거래 앱인 당근마켓에 책을 한 권 내놨다. 승무원 지망생이라면 한 번쯤 읽는다는,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다. 윰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학생 때 비행기에서 서비스하는 승무원을 본 이후 그는 줄곧 승무원을 꿈꿨다. 고교 시절 교내 승무원 동아리를 만들었고, 대학 진학 이후로는 관련 스터디 모임에도 꾸준히 참가해왔다. 그런 그가 오랜 시간 간직해 온 책을 5000원에 내놓았다. 코로나19 때문이다.

“항공사들이 여객기 좌석을 뜯고 화물을 싣는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소문으로는 앞으로 3년은 승무원 공채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진로를 바꾸려고 합니다. 승무원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갑자기 꿈이 사라지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어요.”

항공 승무원 교재 판 대학생
“공채 없다는 말에 진로 바꿔”
손님 줄어 폐업한 미용실 원장
“울면서 직접 가스온수기 떼내”

코로나19의 그늘이 당근마켓에도 드리웠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업계의 현실을 알 수 있는 물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장기 불황과 언택트 시대의 만남은 당근마켓을 ‘국민 앱’으로 만들었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개씩 올라오는 이 물건들을 불황과 언택트, 두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경향신문은 지난 10일부터 사흘간 당근마켓을 관찰하며 물건을 내놓은 판매자들의 사연을 들었다. 이들이 소중히 간직해 온 물건을 중고시장에 내놓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 당근마켓은 안다, 코로나의 그늘

A씨(63)는 지난달 말 자신의 미용실에서 사용하던 가스온수기(아래)를 매물로 내놨다. 지난 3년간 머리를 감을 때 쓰는 물을 데워냈던 온수기를 그는 “울면서 뜯었다”고 말했다. A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로에서 가장 큰 미용실의 사장이었다. 한때 디자이너가 8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오랜 불황에 직원들은 하나둘 떠나야 했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덮쳤다. 그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이 나빠졌다. 직원들을 붙잡을 명분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지난달 3년의 임대차계약이 끝났다. 그는 미용실을 접기로 했다. “착잡하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하겠습니까. ‘내 탓이오’ 해야죠.”

B씨(27)의 당근마켓 계정에는 알록달록 화려한 옷들이 가득했다. 샛노란 색깔의 민소매 원피스부터 프릴이 잔뜩 달린 블라우스까지 그의 취향이 가득 담긴 옷들이다. 2년 전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옷이 좋아 차린 B씨의 옷가게는 곧 문을 닫는다. 그는 “휴양지에서 입을 만한 화려한 옷을 주로 팔았다”며 “그런데 코로나19로 (여행도 못 가고) 다들 체육복만 입고 다니지 않느냐”며 웃었다. 설상가상 그의 가게가 입점한 쇼핑몰 내 영화관과 결혼식장이 영업을 중단하면서 가게 매출은 평소의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사람 구경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그는 결국 폐업을 결정했다. 그는 말했다. “옷을 갖고 있다가 내년에라도 팔아볼까 했는데 코로나19가 종식될 듯 반복되니까 후련하게 털어버리자고 생각했어요.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자영업은 다신 못할 것 같지만요.”

폐업을 할 수 있어 ‘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의 한 지역에서 큰 레스토랑을 했던 C씨(50대)다. 그는 식당에서 쓰던 각종 식기 등 물품을 당근마켓에 내놨다. 그의 가게는 주요 일간지에 소개될 만큼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영향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그의 가게에는 가족 단위 손님이 많았는데, 코로나19에 취약한 노인과 어린이의 발길이 끊기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작년 말부터 경기가 안 좋았어요. 봄이 오기를 기대하며 준비했는데 코로나19로 정말 어처구니없이 고꾸라졌죠. 그런데 난 운 좋은 거예요. (가게를 빼고) 나왔잖아요. 폐업 못하고 그 안에서 고사하는 사람들이 제일 힘들어요.”

■ 절망과 희망 사이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 이들은 절망과 희망, 미련 등 복잡한 심경을 고루 드러냈다. 미용실을 접은 A씨는 “이렇게 앞이 안 보였던 적이 없었다”며 “지금 고생하면 앞으로 좋은 날 올 거라는 생각으로 어려움을 헤쳐나왔는데 요즘에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먹고살아야 한다. 그는 또 다른 업종을 찾아 가게를 열 생각이다. “이 나이에 누가 받아주나요. 집을 전세로 옮기든 대출을 받든 시작을 해야 합니다. 두렵지요.”

B씨는 남은 애착을 드러냈다. 인터뷰 말미 그는 가게 이름을 익명으로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다시 (가게 이름을) 쓸지도 모른다. 자영업을 다시는 못할 것 같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내 일이고 내 작업장이라 애정도 남아 있다”며 웃었다.

한 줌 희망을 품고 내일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식당 집기를 내놓은 김모씨(52)는 요즘 햄버거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닌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 오픈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포장마차식 주점, 지난 5월 족발집에 이어 올해 세 번째 ‘오픈’이다. 그는 “코로나19가 빨리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울 것 같아 배달이 많은 햄버거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3개월 전 카페 폐업을 결정하고 물품을 정리 중인 장민준씨(34)는 배달 전문 카페로의 전환을 고민 중이다. 그는 “굶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승무원 책을 내놓은 윰에게는 사실 같은 책이 한 권 더 있다. 책을 남겨둔 이유에 대해 그는 말했다. “나중에 상황을 보고 한 번 지원해보려고 합니다. 그냥 포기하기에는 그동안의 시간들이 물거품이 돼버리는 것 같아서요.”

당근마켓은 최근 빠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1년 새 이용자가 3배가량 늘었다. 지난 9일에는 이 앱의 월 사용자가 1000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안 쓰는 물건을 팔아 수입을 충당하거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팔 만한 물건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등의 분석이 나왔다. 당근마켓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자전거나 화분 등의 판매가 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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