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군부는 쿠데타 이후 친군부성향 매체를 제외한 모든 매체를 폐간시켰습니다. 주간경향은 폐간된 미얀마 한 매체의 기자가 쓴 기사를 게재합니다. 미얀마어 원본을 번역했기 때문에 일부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점 양해 바랍니다. 신변안전을 위해 실명과 실명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일절 공개하지 않습니다.
최루탄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냄새가 날까. 그 가스를 삼키면 어떤 통증이 있고, 군경이 던진 최루탄에 내가 당하면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탕탕탕. 총탄이 날아오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친 군중 속에서 미끄러져 쓰러진 한 소녀는 살아 있을까. 이런 생각을 나는 2021년 1월 31일 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상상 또한 해보지 않았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모두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 미얀마 사람들도 타격이 컸다. 코로나19 대책에 대한 정부 발표에 들뜬 마음으로 2021년을 맞이했다. 코로나19만 끝나면 2020년 1년 동안 악화된 경제도 살아나고 자영업자들도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코로나19로 휴학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 또한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갑자기 우리의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2월 1일 새벽, 군부가 정권을 강탈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모두는 넋을 잃었고 앞날이 캄캄해졌다. 인형극에서 줄이 잘려버린 인형 같았다. 군부 쿠데타가 사실로 확인됐을 때 우리 아이들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것과 과거의 최빈국으로 다시 전락할 것이라는 절망감으로 슬픔에 빠졌다. 군부는 쿠데타의 명분으로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했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우윈민 대통령 그리고 국가 고위급 인사들이 구금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선거를 통해 우리가 뽑은 의원들이었다.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을 국민은 믿지 않았고, 이 같은 소식에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다. 군부 쿠데타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군부 가족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제외한 온 국민은 비탄에 빠졌다.
쿠데타 소식에 온 국민은 ‘멘붕’
정치범 지원 협회(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AAPP)에 따르면 군부 쿠데타가 터지자마자 의원 133명을 바로 구금했다고 한다. 군부 쿠데타는 2월 1일 새벽 4시쯤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은 반신반의한 상태에서 서로 전화하며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침이 되자 이 소식이 사실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됐고, 세상을 잃어버린 날이라고 했다. 1988년 쿠데타를 경험한 어른들은 미리 쌀을 구입해야 한다며 쌀가게를 찾았다. 양곤에 있는 쌀가게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가게 앞에서 줄을 서는 것도 모자라 차도까지 꽉 메워 차가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가진 돈 전부로 식량을 샀고, 결국 양곤에 있는 가게의 쌀이 바닥나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날 오전 내내 쿠데타 소식에 온 국민은 ‘멘붕’ 상태였다. 통신까지 끊어져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인터넷 또한 접속이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도로로 몰려나왔고 은행 앞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은행들도 문을 닫았고, 영업중단을 알렸다. 그러자 그처럼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귀신이 나올 정도로 조용해졌다. 2월 1일 오전, 행정수도 네피도에서는 무장군경의 단속이 시작됐다. 동시에 양곤에서는 시청 앞에 수많은 군경이 단속을 했다. 군부는 오전 10시쯤 국영방송 먀와디를 통해 국가 비상상태를 선포하고, 부통령인 우민쉐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비상상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지내고 있던 미얀마를 비상상태라고 선포한 것은 2008 헌법 제417조에 따른 것이었다. 이 조항에 따라 연방의 입법, 행정 및 사법 권한을 군 최고사령관에게 모두 이전하고, 1년 후 다시 총선을 치르겠다고 했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2월 1일은 시민 모두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시위, 미래에 대한 계획 등) 알지 못하는 멘붕 상태였다. 통신도 끊겨 서로 소통을 하지 못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통화가 됐다. 그때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7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모든 시민이 72시간 동안 가만히 있어야 했다. 만약 이 시간 안에 시위에 나서면 시민의 반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군부가 나섰고 국가 비상상태를 선언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국제사회에서의 도움도 무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시민이 72시간 동안 꼼짝 안 하고 집에서 조용히 있어야만 했다.
군부 쿠데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시민의 첫 번째 항의는 밤 8시부터 집마다 냄비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냄비를 두드리면서 눈물이 났고, 이 소리가 세상 밖으로 퍼져나갔다. 미얀마에서 냄비를 두드린다는 것은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가 있다. 미얀마 시민의 이런 항의 행위는 다른 나라까지 퍼지게 됐고, 국제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동참해주었다.
2월 1일 군부에서는 계획된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연방 장관 11명을 임명하고 주 행정위원회가 구성됐다는 것을 공식 발표했다.
시민 불복종 운동, 노벨평화상 후보로
당시 시민의 거리시위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2월 2일부터 의사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CDM)이 시작됐다. 이후 각 기관에서도 시민 불복종 운동이 퍼져나갔고, 공무원들도 동참하게 됐다. 현재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한 공무원들에게 군부 정권은 때론 겁을 주고 때론 회유하며 직장 복귀를 재촉하고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한 공무원들을 쿠데타군이 잡아가 죽이고, 다음 날 시신으로 돌아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운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시민에게도 같은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군부 정권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하는 공무원들에게 퇴사 통보를 하기도 하고, 국영철도 노동자들은 공동 주택에서 살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국영철도 노동자의 경우, 현재 수중에 1달러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용감하게 공동 주택에서 나와 버렸다. 미얀마 시민은 국영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임시 거주공간을 마련해주고 아낌없이 식량을 지원하며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여전히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갈 데 없고 거주할 곳조차 없는 국영철도 노동자들은 세 손가락(복종하지 않겠다는 의미임)을 내밀며 끝까지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시민 불복종 운동 참여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다루겠다. 요즘 미얀마 공무원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스웨덴 오슬로 대학교 교수 6명이 2022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공무원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얼마나 잘돼 가고 있는지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라고 본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후 유엔(UN)이나 국제사회에서 군부 쿠데타를 규탄하고 시민의 저항운동에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주요 국가에서도 미얀마 사태에 대한 공식 회담을 통해 지속적으로 군부 정권을 규탄하고 있어 미얀마 시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미얀마인들도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국가고문을 포함한 구금된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미국, 한국, 일본, 태국 등의 시민도 미얀마인들과 함께 쿠데타 저항운동에 참여하고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 세력은 반인륜적인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미얀마 시민을 위해 국가적으로, 시민과 종교적 차원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 시민의 지지와 응원뿐만 아니라 대통령,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구금된 시민을 즉각 석방하라는 규탄 성명은 심리적으로 지친 미얀마 시민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미얀마 시민을 대신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한국에서 ‘Save Myanmar’, ‘Pray for Myanmar’, ‘Stand with Myanmar’ 등의 문구를 마스크, 커피잔 또는 커피 상표 위에 표시하는 등 여러 캠페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의 미얀마 유학생을 위한 지원, 노동자들에 대한 체류 보장, 미얀마 시민을 위해 민중가요를 한국어로 불러주는 것, 서울 명소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기도해주는 것, 한국 스님들이 미얀마 대사관에서 유엔까지 6㎞를 오체투지하는 것을 보며 미얀마 시민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많은 미얀마 젊은이들이 이 사태가 정리되면 가장 가고 싶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SNS는 겨우 사용하다 다시 끊겨
군부 쿠데타가 발발한 지 이틀째에 많은 사람이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갔다. 2월 3일에 화폐 1만짯짜리를 없애겠다는 소문이 돌아 이미 돈을 찾은 사람들이 다시 은행에 맡겨야겠다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쿠데타 발발 후 며칠째까지 많은 시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거리시위를 해야 한다, 안 해야 한다는 논쟁도 있었다. 바로 72시간을 대기해야 한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2월 4일 미얀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이 차단됐다. 페이스북 메신저, 인스타그램, 왓츠앱, 트위터 모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석방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한밤에 거리로 나오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SNS가 없어 이런 소문에도 많은 사람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후 어느 정도 SNS를 사용할 수 있었고, 지금(3월 마지막 주)은 다시 끊긴 상태다. 모바일 인터넷 사용은 아예 안 되고 있다. 와이파이가 안 되는 곳에서는 아예 인터넷에 접속을 못 해 어떤 미디어도 사용할 수 없다.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겼음에도 보도를 하지 못한 채 많은 사건이 지나쳐 버리고 있다.
2월 4일에는 만달레이 의대 앞에 최초로 30명의 학생이 용감하게 거리시위에 나섰다. 몇명의 학생이 체포됐다. 같은 날 네피도에서는 구금된 NLD정당 70명의 의원이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뜻으로 맹세를 했다. 그리고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온라인 회의를 하고 2월 5일 연방의회대표의원회(Committee Representing Pyidaungsu Hluttaw·CRPH)를 구성하고 “군사 정권은 불법적으로 정권을 강탈했다”고 선언했다.
연방의회대표의원회와 공무원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 시민의 저항운동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월 6일에는 1만명이 넘는 시민이 양곤 시내로 나와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에 힘을 보내주기 위해 많은 시민이 물과 음료 등을 나눠주면서 시위 분위가 활기를 찾았다. 시위대는 체계적으로 움직였고, 시위 끝난 후 길거리에 있던 쓰레기는 하나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멋진 평화 시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 투쟁을 “미얀마 봄 혁명”이라고 말했다. 이 항쟁에서 주요 역할을 하는 시민은 Z세대라 말하는 젊은층이다. 전국에서 적극적인 시민참여가 이루어졌고, 시민의 응원 또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도시인 양곤, 만달레이, 네피도 등의 수많은 도시에서 수십만명이 넘는 시민이 거리로 나왔다. 이런 활발한 시위 참여를 지켜보던 군부는 2월 8일 야간 통행금지 제144항을 발표했다. 아무리 통행금지를 발표해도 시민의 저항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시위대를 응원해준 아주머니들의 물, 음료 등은 넘쳐났고 다시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시민의 저항운동이 거세질수록 국제사회에서의 응원도 많아졌다. 군부는 거세지고 있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평화 시위를 하는 시위대를 향해 폭행을 행사하고, 군부의 돈을 받고 동원된 자들이 평화 시위대에 몰래 숨어 들어가 군부를 지지한다고 난동을 피우는 등 별짓을 다했다. 그리고 그들이 시민 시위대를 대낮에 칼로 찌르는 일도 있었다. 결국 2월 9일에 네피도에서 스무 살 여성이 머리에 실탄을 맞았다. 연이어 각 도시에서 머리에 실탄을 맞아 사망자가 속출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머리에 실탄을 맞아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문에 군부는 점술가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그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이런 미친 짓을 했다고 한다. 왕이 되려면 머리를 쏴야 한다는 점술가의 말에 따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 아웅 흘라잉 군사령관은 이름의 첫 글자인 ‘민’과 같은 발음의 ‘도시’인 ‘미치나’, ‘만달레이’, ‘몽유아’ 같은 곳은 다른 도시보다 더 잔혹하게 진압했다는 것이다.
군부는 구금된 시민(범죄자) 100명 정도를 석방했다. 그날부터 밤에 편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군부의 돈을 받고 동원된 자들이 동네 골목까지 쳐들어와 방화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들의 방화를 막기 위해 교대로 순찰을 해야만 했다. 이들은 동네에 몰래 쳐들어와 방화하고 식수대에 독을 넣는 등 난동을 피우고 있다. 동네에 들어온 낯선 사람을 주민들이 검거해 조사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석방된 지 얼마 안 된 확인서와 독이 든 병, 무기 등을 갖고 있었다.
주민들이 이런 동원된 자들을 제때 잡으려 노력했다. 동네에서 잡힌 범죄자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군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운동을 하는 시민을 향해 밤이든 낮이든 괴롭히고 있다. 이후 동네에 낯선 사람들의 침입이 줄어들었지만 곧이어 군경이 찾아왔다. 교대로 동네를 지키고 있는 순찰대 남성들을 체포하기도 하고, 몰래 데려가 죽이기도 했다.
언론사 무단 침입 기자들 잡아가
군부는 저항운동을 하는 시민을 여러 방법을 동원해 전략적으로 진압하며 폭행했다. 군경을 동원해 전국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시민의 저항운동이 거세질수록 군부의 불법적인 진압이 더 악랄해졌다. 시민은 모래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동네를 방어했다. 시위대 근처에 방어벽을 만들고 최루탄에 견딜 수 있는 가스마스크를 준비하고 보호장비를 철저히 준비했다. 하지만 시민군이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무기가 있는 군경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날이 갈수록 피해가 커졌다. 시민군은 방어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모래 바리케이드뿐만 아니라 군경이 동네에 쳐들어왔을 때 이들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소방 가스를 뿌리고, 가짜 총을 쏘고 새총으로 방어를 했다.
군부는 군인뿐만 아니라 경찰까지 동원해 무장하고 전국에서 시위대를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쏘고 또 쐈다. 무기라곤 하나도 없는 시민을 향해 방탄복을 입은 채 총을 쏘고, 높은 빌딩에 올라가 사격까지 하는 미친 짓을 자행하고 있다. 특히 군부는 양곤과 만달레이를 타켓으로 기존보다 더 강한 진압을 준비했다. 그렇지만 시민은 용기를 가지고 전국적인 시위에 나서고 있다.
군부 정권은 쿠데타 이후 언론에 대한 탄압도 시작했다. 집과 언론사에 무단 침입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에 있는 기자들을 체포하고 있다. 몰메인시에 있는 DVB 기자의 집을 포위해 군경이 갖은 폭력을 쓰며 체포한 것이 증거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각 언론사를 무단 침입해 기자들을 잡아가고 있다. 현재까지 전국에서 잡혀가 강금된 기자, 편집장, 사진기자, 프리랜서 기자가 총 50명 정도 되며, 이중 여기자가 8명 정도 된다고 현지 언론 에야와디가 밝혔다. 현재 모바일 인터넷을 차단했기 때문에 시민은 정확한 뉴스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양곤의 각 지역에 군경이 쳐들어와 모래주머니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불태우고 있다. 모래주머니는 군경이 가져가기도 했다. 시민에게 총을 겨누며 모래주머니를 옮기게 했다. 길가에 시민이 안 보이면 동네에 들어와 ‘주민 스스로가 나와 우리를 도와줘야 해. 안 그럼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지’ 하면서 협박까지 하고 있다. 도로에 앉아 외치던 시위대 규모가 줄었을 때 군경은 골목 안으로 들어와 마구잡이로 총을 쏘며 협박했다. 지나가는 차를 막아 운전기사를 내리게 한 다음에 차를 강제로 가져갔다. 심지어 구급차 운행까지 방해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시위 계획이 있었는데 시위대에 나서기도 전에 군경이 체포하러 왔다는 얘기도 있었다.
현재 군부 정권은 시민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있다. 2월 9일부터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3월 28일까지 총 희생자는 423명이라고 정치범지원협회(AAPP)가 발표했다. 어떤 도시는 하루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사상자 리스트에 포함돼 있지 않은 실종자와 군경이 죽이고 시신을 치워버린 사망자까지 계산한다면 사망자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망자 숫자
“그들은 정말 인간이 아니다. 무기를 이용해 죄 없는 국민을 살인하는 짓은 용서할 수 없는 너무나 잔인한 짓이다. 지금 상황을 한번 보자. 시민 1명을 체포하면 무자비하게 때리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정말 어이가 없다. 얼마 전에 합장해 애원하는 여성 시민을 총으로 쏴 죽였다. 총에 맞은 시민을 끌고 가 시신도 돌려주지 않았다. 다섯 살 아이를 총으로 쏘는 것도 너무 잔혹한 일이다. 장례식을 치르는데 ‘시신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분하고 슬픈지 모르겠다”라고 흘라인따야에 사는 시민이 비탄에 젖은 채 말하고 있다.
군 지도부의 충견인 군경이 자기들이 총으로 쏘아 죽인 시신을 가져가는 건 정말 이상하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들이 사람을 죽여 놓고 시신을 유기하기도 하고 돌려준 시신은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훼손돼 있기도 하고, 시신을 부검하고 난 후 바느질하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달레이의 태권도 소녀로 알려진 쩨이신의 시신을 도굴해간 것, 시신을 강제로 가져간 것은 수상하다는 표현보다 괴상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잔혹한 행태 중에 가장 최악은 다섯 살 아이를 총으로 쏘고 열다섯 살 이하의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 살짜리 아이도 포함돼 있다. 오른쪽 눈과 목에 고무총알을 맞아 결국 아이는 한쪽 눈을 잃었다. 3월 27일 하루에 사망한 국민은 100명이 넘었다. 이중 열여섯 살 이하는 총 6명이다.
“군경은 잔혹한데 우리는 당해야만 하는 처지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국제사회가 나서서 도와주는 것보다 연합군이 빠른 시일 내에 구성되고 저항 시민이 연합군에 합류해 군부의 충견인 군경과 맞서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시위대에 나서고 있지만, 그냥 당하고만 있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분하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무기다. ‘맨몸으로 싸워야만 하는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라고 젊은 남성이 말했다.
군부는 매일 잔혹하게 국민을 죽이고 협박하고 겁을 주고 있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은 단위인 동네 주민 관리자조차 임명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동네에서는 주민센터가 불이 나고 어떤 동네는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동네를 관리할 수 있는 동네 관리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잔혹하고 엽기적인 만행들
소수민족 무장단체도 맨몸으로 싸우고 있는 시민 편에 서서 군부를 향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지방으로 군경이 대거 이동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도시에서는 군경이 빠져나가며 그곳 시민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 하지만 군부는 3월 27일 이후 양곤에 있는 어떤 도시에 총을 쏘는 것도 모자라 수류탄까지 던지며 시민을 위협하고 있다.
한밤에 마구잡이로 시민을 체포하고, 이들을 총으로 쏘고 있다. 한밤에 체포해 가면 다음 날 싸늘한 시신이 돼서 온다. 동네에 있는 군부 끄나풀의 신고로 골목 곳곳을 자세히 체크하며 체포와 구금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동네의 끄나풀들로 인해 시민군으로 나서는 청년들은 본인의 집에 있지 못하고 다른 동네로 피신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군경의 진압이 심각해져 도시민들이 지방으로 숨어 내려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대도시에서는 문이 잠겨 있는 주택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청년이 시위 도중 사망했는데 아들의 시신을 등지고 대문 앞에 넋을 잃고 앉아 “우리 아들이 아무것도 못 먹고 나갔어”라는 말만 되풀이한 채 죽은 아들만 기다리는 아버지도 있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아버지 사진에 뽀뽀만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프다. 어떤 시민은 식량이 다 떨어져 누룽지를 물에 타 먹어야만 하고, 어떤 이는 아들에게 단기 출가 행사를 해주려고 초대장까지 만들었는데,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아들이 죽어 아버지 앞에 누워 있다. 이 아들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거의 미쳐간다. 민주주의 국가로 향해 가야 한다고 외치면서 우리들의 시민 영웅들은 하나둘씩 저세상으로 가고 있다.
최근 군경의 가장 엽기적인 만행은 4명의 아이를 둔 아버지도 산 채로 불에 태워죽였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유골만 볼 수 있는 이런 비참한 사건들… 희생자들의 피해상황을 계속 체크해야 한다. 그렇지만 폭탄에 맞고,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과다 출혈로 쓰러져간 청년들은 이렇게 말하고 우리 곁에서 떠났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거라고.”
카멜리아(필명)는 현재 미얀마에 살고 있으며, 언론사에서 16년간 활동하고 있다. 많은 신문과 잡지에 기사 100편 이상을 보도했다. 군부에 의해 언론사가 폐쇄됐지만, 시민을 위해 펜을 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