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자·평화운동가인 이용석이 말하는 ‘평화주의’
모두가 평화를 말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물론이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까지 ‘평화’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평화는 헌법에도 등장한다. 평화적 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해 국가가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강한 군대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진정한 평화란 무엇일까?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군 복무 때문에 20대 남성이 힘드니 여성도 군대에 가라는 식의 주장으로 ‘성 대결’ ‘불행 경쟁’을 몰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평화는 먼 이야기로 비쳐왔다.
지난 14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는 시민단체 ‘전쟁없는 세상’ 사무실에서 이용석씨(41)를 만났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이면서 평화운동가인 이씨는 최근 책 <평화는 처음이라>를 펴냈다. ‘어떻게 하면 평화운동을 더 많이 알릴 수 있을까, 시민들이 평화운동에 참여하게 만들까’라는 생각에서 쓴 책이다.
“노동운동” 하면 금세 체감하는데
“평화운동 뭐냐” 물으면 답 어려워
제국주의 국가선 ‘반성 차원’ 성장
보조적 역할해온 한국은 기회 없어
9·11테러와 이라크 파병으로 평화와 전쟁을 두고 많은 논쟁이 벌어지던 2000년대 초반 이씨는 병역거부 선언을 했다.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다. 당시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는 척박했다. 국내 자료가 별로 없던 시절 외국 자료를 번역해 시민들에게 알리면서 평화운동을 했다. 법원에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정찰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씨는 2006년 판결을 받고 1년6개월을 복역했다. 하급심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잇따라 선고하기 시작한 게 불과 2015년이다. 2018년 헌법재판소 결정 끝에 지난해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대체복무를 할 수 있게 됐다.
평화는 한국에선 꺼내기 어려운 주제다. 남북 분단과 정전 상황, 반공 이데올로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는 모습에 평화가 온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남북관계가 얼어붙는다. 독재정권 땐 군을 비판하면 ‘북한을 이롭게 하느냐’며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강한 군대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프레임은 공고하다. 헌법상의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게 대체복무제 도입의 취지지만, 여전히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병역기피자와 다름없이 취급하는 혐오의 시선들이 있다.
이씨는 “한국은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는 국가인 데다 분단 이후 시민사회라는 게 없거나 붕괴됐고, 북한과의 갈등 상황 때문에 오랫동안 평화와 군사주의, 징병제를 말하는 게 사회적으로 금기시됐다”며 “한반도 정세를 정치인들이 나쁘게 이용하고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해 평화를 이야기하는 장 자체가 없었다”고 했다.
그가 덧붙였다. “제가 평화운동을 하지만, 평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참 어려워요.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노동자를 일상에서 마주하잖아요. 택배노동자, 배달하는 라이더, 마트의 캐셔…. 그런데 평화운동은 피부로 체감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평화란 좋은 것이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이죠. (…)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는 반성의 차원에서 평화운동이 성장하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낀 측면이 있다면, 반대로 전쟁에서 보조적 역할을 해온 한국에선 평화운동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1960년대 베트남전쟁 때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병역거부와 함께 반전·평화운동이 펼쳐졌지만, 한국은 예외였다.
‘전쟁과 폭력은 인간의 본성 아니냐’ ‘군대가 없으면 나라는 누가 지키느냐’ ‘모두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게 맞지 않느냐’ 등 평화운동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들은 질문에 대해 오해를 푸는 방식으로 이씨는 책을 썼다. 강한 군대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프레임은 이제 깨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코로나로 중단된 한·미 군사훈련
전쟁·군대서 전염병과 기후변화로
안보 개념의 축 이동하는 과정 보여
‘군대만이 평화 지킨다’ 프레임 깨야
첨단 무기가 개발되고 군사력은 점차 막강해졌지만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은 한 해 무려 50조원이 넘는 예산을 국방에 쏟는다. 이씨는 코로나19 확산은 강한 군대만이 평화를 지킨다는 프레임의 허구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예비군 훈련이 중단됐어요. 어떤 이들은 엄청난 안보 공백이 생길 것처럼 떠들어댔는데 안보 공백이 있나요? 요즘엔 핵실험보다도 코로나19나 지진, 조류독감 같은 것들이 사람들 일상에서의 안정과 평화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잖아요.” 안보와 안전 개념의 축이 전쟁과 군대에서 전염병, 기후변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책도 그에 맞춰져야 하지만 여전히 군대 문제는 성역처럼 다뤄진다.
역사 속에서 한국은 외세의 침략을 당해온 전쟁의 피해자 입장에 자주 섰지만, 이젠 가해자 입장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이씨는 지적했다. 베트남전쟁 때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한 게 한국군이고, 한국은 이라크전에 파병을 했다. 한국은 해외에 무기도 수출한다. “아랍의 봄 이후 아랍 국가들에서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바레인 활동가들이 저희한테 e메일을 보내왔어요. 바레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최루탄을 맞고 죽었는데 최루탄을 수출하는 곳이 한국이라면서 막아달라는 내용이었어요. 저희도 모르고 있다가 캠페인을 해서 막았죠. 한국은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쪽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어요. 2000년대 이후부터는 무기를 많이 판매하는 국가 순위가 점점 올라가고 있고요.”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은 2015~2019년 세계에서 10번째로 많은 무기를 수출한 국가로 꼽혔다. 무기 수출엔 ‘치안 한류’라는 이름까지 붙는다. 백남기 농민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돼 한국 경찰은 못 쓰게 된 물대포를 해외에는 수출한다. 최근엔 포스코 등 한국 기업이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있는 미얀마 군부와 수익사업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이런 것을 모두 ‘외화벌이’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4·7 선거 후 이슈된 군 복무 문제
“여자도 가라”는 ‘불행 경쟁’일 뿐
복무기간 단축 등 개선 고민하며
‘평화적 수단’으로 평화 지킬 논의를
4·7 재·보궐 선거 이후 군대 문제의 불똥은 페미니즘으로 튀었다. 20대 남성 유권자의 지지가 국민의힘으로 몰리자 류근 시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자 군대 갈 때, 여자들은 사회봉사를 하라”고 썼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군 복무한 사람에게 합당한 국가의 보상과 책임이 있어야 하고, 여성계가 그 보상을 막아서지 않아야 한다”고 거들었다.
이씨는 “질 낮은 정치선동”이라고 꼬집었다. “류 시인 등이 정말 20대 남성들이 공평한, 공정한 징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징병제를 어떻게 개선할지를 논의해야 해요. 복무기간을 줄이고 평화적 시선으로 군대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죠. 20대 남성이 인생의 황금기인 젊은 시절에 억지로 끌려가서 최저임금도 못 받으니까 20대 여성도, 병역거부자도 같이 고생해야 된다는 주장은 20대 남성을 더 불행으로 끌어들이는 것밖엔 안 됩니다. 모두를 위한 방식이 아니에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모병제·남녀평등복무제 도입 주장도 기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했다. “강한 군사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안보를 지키는 게 아니라 평화적인 수단으로 평화를 지켜나가려는 고민이 필요한데 그게 삭제된 채로 논의하고 있어요. 세계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을 고려했을 때 한국군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적절한 군사력은 얼마이고 병역제도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를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쏙 빠져 있죠.” 병역제도를 논할 때 ‘평화적 시선’이 중요하다고 그는 여러 차례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일단 군 병력을 대폭 축소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씨는 징병제가 국가안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민국가에서 국민으로서의 동질성이나 군사주의를 유지하는 기제로도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군대 갔다온 사람과 안 갔다온 사람을 구분하고, 특정 사람은 군대에서 원천 배제함으로써 차별적 대우를 하기도 한다. 강제로 전역당한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가 예다. 이씨는 “징병제는 군대에 갈 수 있는 신체 건강한 이성애자·내국인 남성을 1등 국민으로 여기고, 적군은 물론 우리 편이지만 군대 갈 자격이 없는 사람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며 “징병제 자체가 차별과 배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평화 이야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씨는 평화에 기회를 달라고 했다. “평화운동가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이 현실성 없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래, 네 말 좋다. 그런데 한국은 분단국가이고 전쟁이 안 끝났는데 어떡하냐’라면서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세요.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거든요. 지금처럼 더 강한 무기, 더 강한 군대를 만들 때 평화가 지켜질 것이라는 게 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요. 예멘이나 시리아 등에서 전쟁은 계속, 또 점점 더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다만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죠. 한국이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더 평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맨날 남자들 고생하니까 여자도 군대 가라는 수준의 논의가 아니라, 이제는 어떤 평화적 노력을 해야 되느냐를 고민해야 해요. 존 레넌의 노래 ‘give peace a chance’처럼 평화에 기회를 주세요. 어려운 길이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평화를 모색하고, 국가가 그렇게 하게끔 만드는 평화운동을 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