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김한솔 기자
기후위기 시대,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의 소멸과 전환은 피할 수 없다. 석탄화력발전은 순차적 폐지가 예고됐다. 내연기관차는 전기차로 전환되고 있다.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이같은 전환이 필수적이라면 전환 과정 역시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손실을 나눠야 한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기후위기에 대응해 어떤 지역이나 업종에서 급속한 산업구조 전환이 일어날 때, 과정과 결과가 모두에게 ‘정의로워야’ 한다는 개념이다.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전환 책임을 일방적으로 떠안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향신문은 ‘기후위기 시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기획 1~2회에서 전환 대상 산업에 종사하는 석탄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와 내연기관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체감하는 지금까지의 전환 과정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기후위기 시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마지막 회에서는 정의로운 전환 과정에서 더욱 소외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그런 노동자들을 늘리고 고착화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차별적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문제를 다룬다. 정부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도 짚어봤다. 이제 사회적으로 막 논의가 시작된 정의로운 전환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하는 본질적인 고민과 뗄 수 없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석탄발전소의 ‘투명인간’들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아마도 석탄을 실은 트럭을 운전하거나 발전기를 정비하는 중년 남성이 연상될 것이다. 여기 충남에 있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5년째 일하는 A씨가 있다. 발전기, 터빈, 사무실, 발전소 앞 도로…. 발전소 내·외부 모든 곳에 A씨와 그 동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A씨는 발전소 자회사 소속 청소·미화 노동자이고, 여성이다.

A씨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오전 7시30분쯤 출근해 직원 사무실 책상 주변과 화장실 휴지통을 비운다. 직원들 작업복을 수거해 세탁장에 보낸다. 기름걸레로 바닥을 밀고, 마른걸레로 마무리한다. 사무실 정수기와 커피머신 물통 청소까지 하고 나면 오전이 거의 지난다. 쪽잠을 자고 난 뒤 오후에도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발전기와 터빈 같은 ‘현장 청소’ 일이 특히 고되고 위험한데, 이것은 돌아가면서 한다. 방진 마스크와 안전모, 귀마개를 착용하고 40도 안팎의 현장에서 기름걸레로 바닥을 민다. 흔히 생각하는 발전소의 ‘핵심 업무’는 발전기를 돌아가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A씨가 쓸고 닦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발전기가 함께 멈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A씨가 쓸고 닦는 덕분에 직접 발전기를 돌리는 누군가는 깨끗한 작업복을 입을 수 있고, 깨끗한 화장실을 쓸 수 있고, 청결한 공간에서 쉴 수 있다.

발전소 일은 누구에게나 고되다. 차이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샤워실이 없어요.” A씨와 90명 넘는 그의 동료들은 매일 조를 짜고 순서를 정해 교대로 남성용 샤워실에서 씻는다. 남의 작업복은 세탁장에 맡기지만 자신들의 작업복은 맡길 여력이 없어 샤워를 하면서 직접 빤다. 휴게실이 있는 층에도 여자 화장실은 없다. 자신이 밥 먹은 그릇을 씻을 싱크대도 없다. “건물 지을 때 설계도에 우리들 공간도 들어가 있었어야 해요. 그런데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 ‘어? 아줌마들이 쉴 데가 없네?’ 해서 자투리 공간을 준 거죠.”

다양한 노동자 배제한 ‘새 일자리’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석탄발전소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청소·미화 노동자들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해물질이 배출되는 장소인 만큼 매일 청소는 해야 했을 것이다. 다만 A씨 같은 노동자들, 그러니까 ‘비핵심’ 업무로 분류되고, 직접고용돼 있지 않고, 남성 중심인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여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A씨는 항상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투명인간인 셈이다.

■노동자는 균일하지 않다

국적·성별·지역 차이 존재하는데
‘균일한 집단’으로 노동자를 묶으면
모두에게 정의로운 전환은 불가능

석탄화력발전소는 남성 중심 사업장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할 것 없이 남성 노동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 그런데 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숫자도 적은, 게다가 발전소의 ‘비핵심 업무’로 생각되는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의 문제에 신경써야 하는 걸까.

“미국에서는 정의로운 전환 논의가 원주민이나 흑인 문제와 결합해서 나오고 있어요. 같은 노동자라도 그 안에서 국적·성별·지역 등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균일한 집단’으로 묶여서 논의돼 온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한 거죠. ‘너희에게 적용되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아’라는 목소리인 거예요.” 정은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이 말했다.

노동자는 모두 다르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더라도 성별에 따라 더 불리한 업무환경에 놓일 수 있고, 국적에 따라 차별받을 수 있으며, 고용형태에 따라 맞닥뜨리는 문제가 다를 수 있다. 개별 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이렇게 다양하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서는 이 다양성이 고려돼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정의로운 전환 가이드라인’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정의로운 전환) 정책과 프로그램은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도전과 기회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때 젠더 관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공평한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구체적인 젠더정책이 고려돼야 한다.”

■정의의 범위는 넓다

기존 노동시장의 문제 반복 없도록
새 일자리의 고용형태·임금체계 등
어떻게 짤 것인지 고민을 해봐야

정의로운 전환은 전환 과정에서 과정과 결과가 모두에게 정의로울 것을 지향한다. 석탄화력발전소 대신 신재생에너지가 들어서고, A씨를 포함한 기존 발전소 노동자들에게 바뀐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자. 하지만 A씨가 여전히 시간에 쫓겨 남성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쪽잠을 자야 한다면, 그것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는 2019년 ‘젠더 관점에서 본 신재생에너지’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재생에너지 분야의 여성 비율은 32%로,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분야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지만 그 안의 여성들은 같은 직위 남성보다 적은 임금과 유리천장의 문제를 겪고 있다고 밝혔다.

“영역의 차이일 뿐 남성 노동자를 기본값으로 상정하는 노동구조 자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뀐다고 해도 (노동 조건은)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이 되는 거죠.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서 그런 차별이 얼마나 사라질 수 있을까.” 정 연구원이 말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간다면 그건 정의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아직은 주체가 되지 못한, 가시화되지 않은 이들을 발굴해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젠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조직 노동자, 동일노동 동일임금, 노동시장 이중구조 같은 것도 젠더와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제기된 문제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의 범위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 보전’에 한정하는 것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오래된 문제’까지 함께 논의한다면 정의로운 전환과 기존 노동운동의 주장을 동어반복하는 게 아닐까.

“정의로운 전환을 통해서 기존 노동시장이 갖고 있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가지면 안 됩니다. 다만 정의로운 전환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의 고용형태, 임금체계 같은 것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고민해 볼 필요는 있어요. 기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만들어낸 문제점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조성주 정치발전소 대표가 말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때를, 고착화된 현실에서는 바꾸기 어려웠던 구조적 문제점들을 개선할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정규직 일자리여야 한다’ 같은 납작한 논의로는 그 안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안고 갈 수밖에 없어요. 예컨대 전통적으로 저숙련, 저학력 그리고 여성에게 집중됐던 일자리들의 ‘사회적 가치’를 더 높게 설정한다거나,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임금체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고민들이 많이 필요하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열린 2050 탄소중립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열린 2050 탄소중립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는 메시지 분명히 줘야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 ‘한국판 그린뉴딜’에서 정부가 그리는 미래는 낙관적이다.

정부는 탄소중립은 ‘도전적 과제’이지만 가야 할 길이며, ‘전향적, 선제적, 능동적 접근’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경제·사회의 부담은 최소화하고, 우리의 역량은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으로 움직일 것이고, 그린뉴딜은 “미세먼지 해결 등 우리 삶의 질을 높여줄 뿐 아니라 날로 강화되고 있는 국제 환경규제 속에서 우리의 산업 경쟁력을 높여주고, 녹색산업으로의 성장으로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해 낼 것”(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의 대통령 기조연설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쉬운 전환’은 없다. 전환은 필연적으로 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의 고통을 수반한다. 석탄화력발전소·내연기관차 퇴출로 일자리를 잃을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이 이미 이를 보여준다.

정의로운 전환을 오래 연구해온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이 보기에 지금 정부가 내놓는 메시지는 지나치게 ‘긍정적’이다.

“지금은 이 산업 전환이 ‘굉장히 크고 어려운 전환이며, 전환 과정에서 피해와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는 게 우선이에요. 그런데 현재 정부는 계속해서 무언가의 앞에 ‘K’를 붙여가면서 (이 전환이) 새로운 산업의 기회라는 식의 말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기업과 정부부처, 노동조합 모두 이것이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시그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전환의 과정을 자꾸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기회’로만 부각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과정’임을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넘어…‘살고 싶은 사회’로의 전환 생각해야

한국노동연구원의 이정희 박사도 지금까지의 정부 정책은 ‘산업정책으로서의 접근’이었다고 평가한다. ‘탄소중립을 위해 어떤 산업정책을 펴겠다’는 계획만 밝혔을 뿐, 그로 인해 직접적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로부터는 구체적인 의견수렴도 받지 않았고, 하다못해 전환 과정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해당사자인 노동자들은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 계획상) 그린뉴딜도 결국은 녹색산업 혁신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인데, 기후위기를 빌미로 기업활동을 어떻게 잘 영위하게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느낌이에요.”

■‘잊혀진 사람들’ 막기 위한 소통과 정보 공유

정부, 전환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해·협조 구해야
‘잊혀진 사람’ 없도록 다양한 소통을

불평등 연구자인 로버트 라이시 미국 캘리포니아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코로나 4계급’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계급으로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이 등장했다고 했다. 미국인 대부분이 ‘볼 수 없는 곳’에 머무는 이들이 코로나19가 닥쳤을 때 가장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이정희 박사는 정부가 지금과 같은 접근 방식을 고수한다면 일부 노동자들은 조용히 사라져 ‘잊혀진 사람들’이 되고, 일부는 대안을 찾지 못해 극한투쟁만 하는 두 그룹으로 나뉠수 있다고 우려한다.

“누군가 나한테 영향을 미칠 의사결정을 하면 그 과정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에요. 요구를 100% 관철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게 민주주의이고, 특히 기후위기와 같은 전 인류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당연히 그런 주체들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게 중요하죠. (지금처럼) 마치 경제 개발하듯이 정부 주도로만 가면 어떤 저항으로 이어질지 몰라요.”

그는 “각 주체가 각자의 고민을 들고 와 이야기하고, 공감대 형성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대화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정부는 최근 출범한 탄소중립위원회를 통해 이 박사가 말한 것처럼 각계의 의견수렴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무려 97명의 위원을 둔 ‘거대 조직’에서 실질적인 의견수렴과 논의가 가능할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솔직한 고민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는 작은 단위의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기구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층위에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현우 위원의 말이다. “소통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대표 몇 명이 공식적인 기구에 소속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도 많고, 비정규직도 많기 때문이에요. ‘여러 층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결국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제도가 결합됐을 때 가능해요.” 캐나다의 정의로운 전환 태스크포스(TF)는 2018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투명한 정보 공개’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노동자들과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소통하라.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무언가가 결정되지 않았다면,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정보 공개와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 및 시민사회단체 연합인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정부의 그린뉴딜 계획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환경 및 시민사회단체 연합인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정부의 그린뉴딜 계획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정의와 공정 사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어의 문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현우 위원이 쓴 책 <정의로운 전환>을 보면, 이 용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과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환경정의,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이 작성한 ‘기후변화와 노동계의 대응과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위하여’이다. 영어의 ‘Just Transition’이 ‘정의로운 전환’으로 번역돼 소개된 뒤 연구자들은 대개 이 용어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며 이 용어가 부각되기 시작한 요즘, 정부는 ‘정의로운 전환’ 대신 ‘공정(한) 전환’이라는 표현을 쓴다.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에서도 ‘탄소중립사회로의 공정 전환’을 3대 정책방향 중 하나로 제시했고, 탄소중립위원회의 분과에도 ‘공정전환위원회’가 등장했다.

영어의 ‘just’에는 ‘공정(fairness)’의 의미도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이 쓰이는 맥락은 분명히 다르다. “ ‘공정한 전환’에는 전환 과정이 절차적, 사후적 보상 문제로 축소되는 뉘앙스가 있어요. 의미가 분명히 달라요. 영어에도 ‘Fair and Just Transition’(공정하고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례도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의미는 다른 것이죠.” 김현우 위원이 말했다. 정은아 연구원도 같은 생각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공정 담론’을 고려했을 때, ‘공정한 전환’은 정의로운 전환이 기존에 주장했던 깊이와 폭을 충분히 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의로운 전환에는 기후위기 대응 정책이 어떤 차별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노조 자체의 역량을 강화해 작업장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것이라든지 지역 내 산업 다양화와 생태 전환 같은 문제도 포괄돼 있어요. 정부가 ‘공정 전환’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발표하는 정책은 결국 노동자의 ‘일자리 대책’으로만 축소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의든 공정이든, 그 의미만 잘 구현되면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어떤 개념을 정책화하는 데는 어떤 단어로 시작하는지도 중요하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진행한 산업 전환 관련 연구용역 설문조사에는 ‘정의로운 전환과 공정한 전환’이라는 용어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도 포함됐다. 이정희 박사는 지금은 보편화된 ‘비정규직’ 단어를 예로 들었다. “외환위기(IMF) 이후에 비정규직이 50%를 넘었다는 통계청 수치가 나왔어요. 노동진영에서는 ‘비정규’라는 말을 들고나왔는데, 당시 노동부에서는 ‘비전형’ ‘비정형’이라는 단어를 썼죠. 용어 때문에 엄청 논란이 있었어요.” ‘비정규’가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의 지위를 강조하는 단어인 반면 비전형이나 비정형은 고용의 특수한 형태를 강조한다. “그때 한창 (비정규직의) ‘규모 논쟁’이 있었거든요. 정부는 당시 종사자 지위에 따라 상용직, 임시직, 일용직으로 분류했을 때 임시직과 일용직만 ‘비정형(혹은 비전형)’에 해당한다고 했고, 노동계에서는 상용직으로 분류되더라도 파견이나 하청업체의 경우 용역업체 계약이 끝나면 잘리는데 정규직으로 볼 수 있느냐고 맞섰어요. 결국 특정 단어를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죠. ‘정의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과정에서의 참여와 가치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정부 쪽에서 생각하는 공정한 것은 무엇인지 들어봐야죠.”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 작성에 참여한 부처 관계자는 “ ‘정의’라는 단어가 공문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고, 의미상으로는 정의로운 전환과 같다고 생각한다. 과정과 결과가 모두 포함돼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

전환의 범위, 더 넓고 깊게 확장될 것
수많은 이해 관계자 조율하려면
‘지향해야 할 가치’를 기준 삼아야

충남연구원은 올해 초 석탄화력발전소 폐지로 영향을 받는 ‘20명의 주체’에 대한 가상 인터뷰집,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스무가지 목소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노동자뿐 아니라 발전소 인근 어민과 개발위원회 임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의원, 지역기자, 청소년 등 발전소와 직접적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각 주체가 어떻게 전환의 영향을 받는가 상세히 다룬다.

정의로운 전환의 범위는 명확히 정해진 것이 없다. 논의가 무르익지 않은 초기 단계에는 ‘화석연료 기반 산업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조금 좁게 다뤄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넓고, 깊게 확장될 것이다. 이 보고서가 보여주듯 전환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직접적인 종사자들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개인의 일상, 산업의 구조, 국가의 정책방향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면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많은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조율돼야 할까. 결국 정의로운 전환에 관한 논의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정희 박사가 말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지금과 같은 대량생산 시스템하에서 계속 살 것인가,라는 고민들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기후위기와 관련한 논의를 축소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자리 문제’로 제한해서 한정된 파이를 내가 가질지 네가 가질지 논의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의로운 전환 이후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 대량생산, 대량소비, 과도성장주의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당장 답이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본질적인 고민일 것 같아요.”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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