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안84와 달팽이 인간, 그리고 ‘이대남’이라는 정체성

위근우 칼럼니스트

보이는대로만 그린 청년의 초상…그 안엔 빠진 것이 있다

[위근우의 리플레이]기안84와 달팽이 인간, 그리고 ‘이대남’이라는 정체성

“저 요즘 만화에 달팽이가 몇 주째 나오고 있거든요. 욕을 엄청… (먹고 있어요).” 지난 6월11일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에서 기안84는 전현무가 현재 거주 중인 한옥에서 기르는 달팽이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랜만에 출연한 전현무는 “너 아직도 욕먹고 있니?”라고 물었다. 정말 그렇다. 기안84의 웹툰 <복학왕> 중 최근 완결된 에피소드 ‘인류의 미래’ 편에선 주인공인 우기명과 봉지은의 결혼식 중 갑자기 기명의 친구인 김두치가 봉지은과의 비밀 연애를 고백하고 둘이 함께 자웅동체 달팽이가 된다. 뒤를 이어 수많은 결혼식 하객들도 남녀 몸을 합쳐 달팽이가 된다. 해당 에피소드 총 5회는 모두 별점 10점 만점 중 4~5점대를 기록 중이다. 댓글도 살벌하다. 그러니 ‘아직도 욕먹고’ 있는 게 맞다. 다만 분노하는 주체가 다르다. 과거 그가 사과문을 올린 바 있는 장애인 차별적 장면이나, 여성 구직자에 대한 차별적 표현에 대해선 기안84의 우호적 독자층 바깥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면, 이번엔 기존 독자층으로 보이는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전개에 대해 분노하는 중이다. 얼핏 이 사태는 <복학왕>의 지난 1~2년간의 논란보다는 기안84의 과거 작품 <패션왕>에서 주인공 우기명이 패션쇼 중 늑대인간이 되거나 닭이 되는 무리한 진행과 지각 연재에 대해 별점을 깎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번 에피소드의 뜬금없는 진행과 억지스러워 보이는 메시지는 단순히 작가의 역량 부족이나 날림 마감 정도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방향은 자주 틀리지만 언제나 본능적으로 청년 세대에 대한 촉수를 세우던 기안84가 지닌 세계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이번 ‘인류의 미래’ 에피소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늑대인간이 등장하던 <패션왕>보다 더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기안84가 2009년 야후코리아에서 연재했던 <기안84 단편선> 중 괴작이라 불리는 ‘패딩 신드롬’은 여러모로 ‘인류의 미래’를 연상케 하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고급 패딩이 필수 아이템이 된 고등학교에서 패딩을 입은 아이들은 서로 뭉쳐 거대한 애벌레 형상으로 한 몸이 되고, 그 애벌레는 역시 서로의 몸이 뒤섞인 형태의 거대 나방이 되어 경쟁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로부터 떠난다.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다른 생명체의 형태로 서로의 정신을 유지한 채 한 몸이 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경쟁 속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생존 방식이라는 점에서 ‘패딩 신드롬’과 ‘인류의 미래’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달팽이 형태로 자웅동체가 된 김두치와 봉지은은 “너무 비싼 집값, 너무 많은 갈등, 끝도 없는 갈등, 코인뿐인 희망, 가족의 해체, 출산율의 종말. 인류가 살아남는 방법은 자웅동체화뿐”이라 말한다. 달팽이 껍데기를 안식처로 삼을 수 있는 이 변태(變態)는 “결혼과 내 집 마련을 한번에”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패딩 신드롬’의 10대 아이들 역시 “시급 4500원 받아가면서 굽실대기보다는 더 매력적이고 좋은 자리,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그건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이외에는 이뤄지지 않는다”며 나방의 형태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고, 중산층 이하 청춘이 본인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기안84가 청춘을 묘사하며 일관되게 유지하는 시선이다. ‘패션왕’이 될 거라던 소년은 나름 패션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주목을 받지만 탈락 후 지방대 패션학과에서 별다른 희망도 꿈도 없는 대학 생활을 한다(<패션왕>). 그리고 그 대학이 자랑하는 취업률 1위라는 타이틀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비정규직으로 이뤄진 것이다(<복학왕>).

그는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아득바득 살아가는 청춘을 전투적 서사로 그려내기보다는 그 경쟁의 출발선에도 설 수 없는 이들의 무력감과 현실 안주의 자조적 풍경을 핍진하게 묘사한다. <패션왕> 연재 당시 인터뷰에서 “<드래곤볼>처럼 주인공이 계속 이겨나가는 걸 현실에서 본 적이 없다보니 만화도 그렇게 된 거 같다”고도 했지만, 그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이거나 희망적인 전망을 남기기 위해 서사를 구성하기보다는 자신이 관찰하는 세상의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옮기려 한다. 여기에 창작자로서 기안84의 장점과 재능, 진정성이 있다. 물론 그 관찰하는 시선 자체에 특정 세대와 젠더의 통념이 작동한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묘사는 거의 언제나 스스로에겐 솔직하지만, 많은 경우 세상을 정직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몇 번의 혐오 차별 표현 논란은 여기서 비롯된다. 또 다른 문제는 보이는 대로만 재현하는 과정에서 현상의 기저에 있는 정치적 맥락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청년 주거난을 소재로 했던 ‘두더지 마을’ ‘부동산’ ‘청약대회’ 세 개 에피소드의 몇몇 장면에 일부 매체는 문재인 정권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의도적 비판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억지다. 작품에서 딱히 구체적인 정책 요소를 꼬집거나 비판하지도 않지만, 관점의 부재인지 의도적인 회피인지, 기안84는 중산층 이하 청년 세대가 경험하는 소외를 다분히 탈(脫)정치적으로 다룬다. 이것이 그의 작품이 고뇌 끝에 나방과 달팽이의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근본적 이유다.

[위근우의 리플레이]기안84와 달팽이 인간, 그리고 ‘이대남’이라는 정체성

기안84라는 본능적 감각의 관찰자에게 수도권 집값 상승과 청년들의 주거난, 지방대생의 취업난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이다. 이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분노나 상실감도 생생하다. 그는 이 생생함을 작품에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복학왕>의 세계는 가장 구체적이고 팔딱팔딱 생생한 순간에조차 그들 청년을 표상하되 대의하지는 못한다. 후자에는 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 정치적 기획이 필요하다. 그게 부재한다고 작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기안84가 정치적 기획 혹은 상상력을 고민할 만큼 세심하진 않지만, 청년 세대의 상실과 우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넘어갈 만큼 무신경하진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들’이 적응을 위해 변태해야 한다. 정치적 상상력이 제거된 세계관에서는 승자독식의 구조와 믿음을 바꾸는 것보다 인간이 자웅동체가 되어 달팽이가 되는 게 더 쉬운 일이다. ‘패딩 신드롬’의 고등학생들과 ‘인류의 미래’의 청년들은 같은 위기의식과 동질감 안에서 하나의 종으로 결합한다. 그들은 육체적 결합을 통해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이고 호명되지만, 정치적 주체로 호명되진 못한다. 혹은 그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정치 기획의 언어들이 휘발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자웅동체가 된 봉지은과 김두치가 “싸움, 이별, 이혼. 그런 수많은 갈등들은 이제 없는 거지. 우리는 이미 하나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미지의 기괴함과 별개로 섬뜩하다. 정치가 사라진 곳에서 갈등은 담론을 통해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되어 무마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우연이지만, 기안84가 그린 달팽이 인간의 황당함은 최근의 소위 ‘이대남’ 담론의 허구성과 조우한다. 왜 20대 ‘남성’들의 목소리만 세대론으로 대표되느냐는 정당한 의문을 차치하더라도,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같은 이들이 ‘이대남’ 혹은 ‘반페미’라는 미심쩍고 모호한 정체성으로 뭉뚱그려 호명할수록 정작 20대 남성 각각이 경험 중인 계층 사다리의 부재, 폭력적 군 문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해결할 정치적 대안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기안84의 탈정치와 공정 경쟁으로 정치를 대체하려는 이준석의 반(反)정치 사이에서 청년 담론엔 담론 없이 정체성만 남는다. 달팽이 인간이 허무맹랑하다면 ‘이대남’은 양심적이지 못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왠지 기안84만 ‘아직도 욕먹고’ 있는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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