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용기로 내딛은 한발…더는 ‘사회적 합의’ 뒤로 미뤄선 안 돼

유정인 기자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국민청원 10만명 달성 그후

차별금지법을 제정해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지난 14일 국회 소관 상임위 회부 기준인 10만명을 넘겼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지연된 지난 14년 동안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씨(두번째 사진·가운데), 차별받은 난민신청자(세번째 사진) 등 한국 사회가 함께 기억해야 할 이름이 계속 늘어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차별금지법을 제정해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지난 14일 국회 소관 상임위 회부 기준인 10만명을 넘겼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지연된 지난 14년 동안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씨(두번째 사진·가운데), 차별받은 난민신청자(세번째 사진) 등 한국 사회가 함께 기억해야 할 이름이 계속 늘어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14일 오후, 지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동료들과 함께 국회 국민청원 동의 숫자를 지켜봤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국민청원)에 찬성한 사람이 국회 소관상임위원회 회부 기준인 10만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새로고침’을 누르던 동료가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오후 4시42분, 10만명의 동의가 채워졌다. 국민청원이 시작된 지 22일 만이다. 잠시 박수치고 환호했다. 곧 몇몇 얼굴이 떠올랐다.

2007년 첫 발의·폐기 다섯 번·철회 두 번…
마침내 시민의 힘으로 법사위 테이블에 올려
“먼저 떠난 성소수자·노동자·난민…
오늘을 함께 맞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별을 가시화한 이들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핑계와 후퇴 없이 제대로 된 논의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쁜 순간에 ‘슬픔의 현장’들이 생각났어요.” 함께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이들의 장례식장, 그곳에서 눈물짓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얼굴들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리본을 달고 시청 광장에 모인 추모객 행렬이 되었다가, 최근에 또다시 사야 했던 국화꽃으로 변했다.

기쁘고, 아픈 날이었다. 1년 전 차별금지법안을 대표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입법청원 기준선을 넘긴 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오늘을 함께 맞이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조용히 몇몇 얼굴을 떠올리는 날”이라고 적었다. 누군가는 성소수자의 죽음을, 누군가는 차별받던 노동자를, 이주노동자와 난민을,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모두를 기억하고 싶어했다. 이들은 ‘기억의 힘’을 안고, 앞으로의 국회 논의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 당신을 기억합니다

차별금지법안이 국회에 처음 발의된 건 2007년이다. 국민청원 전 기준으로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폐기된 게 다섯 번이다. 두 번은 법안이 철회됐다. 20대 국회에선 아예 발의되지도 않았다. 21대 국회에서 장 의원 안이 발의됐지만, 별다른 논의 없이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번 국민청원은 21대 국회 임기 1년이 지나도록 묵혀 있던 차별금지법안을 시민들이 신속히 법사위 논의 테이블에 올리도록 한 것에 의미가 있다.

‘나중에’ ‘사회적 합의 뒤에’ 등의 이유로 제정이 미뤄진 14년 동안 떠난 사람들,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늘어갔다. 지난봄은 특히 상실이 컸다. 성소수자로 자신을 드러내고 차별에 맞서 온 극작가 이은용, 인권활동가·음악교사·정치인 김기홍, 군인 변희수씨 등이 연이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지오 위원장은 국민청원 성사 직후, 그 세 사람 얼굴이 어른거렸다고 했다. “그분들과 함께 만들어 온 운동이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영정 앞에서 더 이상 이런 세상이어선 안 된다는 다짐을 했고, 많은 다짐과 떠난 분들의 마음이 모여서 국민청원이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추모할 때마다 ‘떠난 그곳은 혐오와 차별이 없는 곳이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곤 했어요. 지금부터는 ‘당신들이 떠난 이 자리도 그런 곳이 될 거다, 그런 곳이 되었다’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어요.”

그는 하청업체 노동자 김용균씨, 비닐하우스에서 숨진 이주노동자 등을 말하면서,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이 변화의 동력이 되는 곳이어선 안 된다고도 말했다.

장 의원은 ‘오늘을 함께 맞이했으면 좋았을’ 몇몇 얼굴들로 변희수 하사 등을 떠올렸다. 최근까지 계속된 성소수자들의 죽음은 ‘조금 더 빨랐더라면’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게 했다. “얼마 전에도 성소수자 운동을 하던 분이 돌아가셨어요.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더라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청원은 한국 사회 여러 차별이 가시화하면서, 그에 공감한 모든 사람들이 같이 이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난민 인권운동가인 김영아 ‘아시아평화를 향한 이주’ 대표는 이번 입법청원과 함께 한국을 떠난 난민과 난민신청자들을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바늘구멍 같은 한국 난민심사를 통과한 ‘난민 인정자’ 중에서도 어렵게 얻은 난민 지위를 포기하고 제3국으로 출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구직상담 과정에서 ‘이 직종은 외국인을 꺼려 안 될 것’이라며 미리 제한받고, 직장 안팎에서 차별을 마주한 이들이 한국을 떠나는 선택을 하곤 한다.

난민 신청자의 경우는 더하다. 2018년 가을, 이집트 출신 난민 신청자들이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을 했다. 난민신청자에 대한 투명한 심사와 인간적 대우 등을 요구했는데,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이들이 폭로한 난민신청자 면접조서 조작에 한국 법무부도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작은 승리였지만, 농성자 일부는 난민신청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한국을 떠났다. 난민반대집회와 신상털기, 혐오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들을 보며 또 다른 난민 신청자들도 짐을 꾸렸다.

“한국을 떠난 난민 인정자들, 그리고 단식 농성을 하신 난민신청자들에게 지금 당장 다시 차별금지법의 첫 단추를 끼웠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낯이 없어요. 몇해 전 세계인종차별철폐의날 행사에 발언자로 나선 난민 인정자가 한국에 차별금지법이 이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아직 없다’고 바로잡아주어야 했던 낯 뜨거운 기억도 떠오릅니다. 법이 제정되면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를 냈던 분들, 당신들도 한국이 한 발 더 나아가는 데 기여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모두를 기억합니다

현재까지 발의된 차별금지법안들은 공통적으로 차별 사유와 유형, 예방·구제 방안을 구체화한다. 개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이 불합리한 차별의 사유가 돼선 안 된다는 헌법정신이 일상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성별·장애·나이·출신국가·종교·성적지향·성별정체성·학력 등 법안들이 금지하는 차별 사유는 다양하다.

개인의 정체성은 수시로 변화한다. 누구나, 어느 순간에는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차별금지법이 사회적 소수자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법이라는 인식이 더 퍼져야 한다고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는 말했다. 그는 “이 법이 생긴다고 당장 모든 차별이 사라질 거라 할 수 없지만 지표가 되고, 모두의 인권의식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면서 “누구나 지금의 일상에서 밀려날 수 있고, 당장은 ‘차별받는 이’와 자신이 멀어보이더라도 어느 순간 강제적으로 그런 상황에 들어갈 수 있다. 한국 사회 차별을 가시화한 이들을 기억하는 것과 함께 이 법이 필요한 우리 모두를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국민청원 10만명 달성 뒤에도 이름을 떠올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 전반의 인식이 변화하는 것은 수치상으로도 드러났다.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2020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에선 응답자 10명 중 9명(88.5%)이 평등권 보장을 위한 법 제정에 찬성했다.

지오 위원장은 “10만 달성이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조직된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라면서 가족과 동료, 친구들에게 청원 참여를 독려한 이름 모를 제안자들의 행동이 모인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런 제안은 단지 한 명의 청원인을 늘린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분에게 함께하자고 얘기해볼까’라고 고민하고 용기를 낸 행위입니다. 이 작은 시작이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낸 용기로 한발 나아갔구나’라는 걸 느끼게 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제안자들 곁에 앞서 떠난 이들의 마음도 같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 다시, 앞으로

변화는 시작됐다. 국민청원 성사 이틀 뒤인 지난 16일 더불어민주당 등 범여권 의원 24명이 ‘평등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1년간 법사위에 묶여있던 장 의원 안과 함께 법사위에서 논의 예정이다. 앞으로의 국회 논의 과정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안기고 있다. 지난 14년간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데는 일부 보수 기독교단체들이 ‘성적지향’을 차별금지 사유에 넣으면 안 된다고 반발한 게 영향을 미쳤다. 굵직한 선거를 앞두고 쟁점법안인 차별금지법 논의가 ‘나중’으로 밀려난 경우도 적지 않다.

남 활동가는 “이렇게까지 오래 시민들이 피와 살을 갉아내야만 했는지, 무산돼 온 과정을 돌아보면 이번 국민청원 성사를 기뻐할 수만은 없다”면서 “정치인들은 ‘법안 반대 민원이 많으니, 찬성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하다가 선거를 앞두고는 미뤄왔다. 이제는 핑계와 후퇴 없이 제대로 된 논의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 의원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심화한 차별이 오히려 모든 시민을 차별에서 보호하는 법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키웠다고 생각한다”며 “시민들이 정치권이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문제로 만들어주었으니, 그 뜻을 정치권이 받아 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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