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없이도 장만 잘 본다

최미랑 기자
이 기사는 금요일 아침 발송하는 식생활 뉴스레터 🍉 ‘끼니로그’에 소개되었습니다. 구독을 원하신다면 검색창에 ‘끼니로그’를 입력하거나 주소창에 다음 주소를 입력해서 신청해 주세요.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22110?groupIds=103467


어글리어스의 ‘못난이 채소 박스’에 담겨 배송된 제철 채소들. 인선 님 제공

어글리어스의 ‘못난이 채소 박스’에 담겨 배송된 제철 채소들. 인선 님 제공

화면만 몇 번 누르면 물건이 척 하고 문앞에 높여있는 세상. 이제는 좋아만 할 수 없겠다고 여기는 분들이 부쩍 늘고 있어요. 더 싸게 더 빠르게 배송하기 위해 누군가는 에어컨도 화재 경보기도 없는 창고에서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최근의 ‘쿠팡 사태’는 많은 이들에게 그 동안의 소비 생활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생활은 충분히 피곤한데’, ‘나 하나 사용을 멈춘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면서도 결국은 회원가입을 탈퇴하고 앱을 지운 분들이 많았어요.

잘 먹기 위해서는 적절한 장보기가 필수일텐데요. 쿠팡사태 즈음에, 익숙했던 장보기 방식을 돌아보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 보려는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자신의 생활에 맞는 식재료 구매 방식을 꾸준히 고민해온 네 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쿠팡을 안 쓰면 장을 어디서 보나요’ 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쓰레기 문제부터 식탁의 성평등, 먹거리 생산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특정 플랫폼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분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각자 사정과 생활이 다 다른데 장보기에 어떻게 정답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어요. 다만 지금의 방식이 최선이 아닌 것 같다면, 이 이야기를 서로 좀더 활발하게 나눠보는 것이 답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가구 구성이 나와 비슷한 사람 이야기를 먼저 찾아 읽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기사를 저장해 두셨다가, 언젠가 식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보셔도 좋겠습니다.

<순서>

“못난이 채소를 2주에 한 번 받아봐요”

- 서울 1인 가구,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 인선 님의 이야기

“믿을 만 한 농가에서 직접 사요”

- 서울 2인 가구, <대산농촌문화> 편집자 진선 님의 이야기

“어떤 실천도 성평등 없인 지속하기 어려워요”

- 수도권 2인 가구, 예술사회학자 라영 님의 이야기

“로컬 유통이 왜 중요한지, 제주에서 알게 됐어요”

- 제주도민, 정책연구자 형중 님의 4인 1견 2묘 가구 이야기

■ “못난이 채소를 2주에 한 번 받아봐요”

서울 1인 가구 인선 님의 이야기

인선님은 달리기와 수영을 꾸준히 하고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는 데 관심이 많은 기자입니다. 채소를 구독하면서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해요.

인선님 제공

인선님 제공

2년 전에 처음 독립해 요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집 근처에 전통시장이 있기는 하지만 퇴근이 조금만 늦어져도 시장 가게들이 이미 문을 닫아 장보기가 쉽지 않았어요. 장을 본 뒤에 10분 정도 언덕길을 걸어 올라와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고요..

처음에는 마켓컬리를 애용했어요. 그런데 물건을 한 번 시킬 때마다 종이 상자 등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힘들더라고요. 쓰레기를 많이 만드는 데 대한 죄책감보다도, 분리수거의 어려움이 컸던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향신료와 일부 냉동식품 같은 제품을 대형마트까지 가지 않고도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때문에 온라인 쇼핑을 계속했는데요. 채소 같은 신선식품은 품질이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아 불만족스러웠습니다.

그때 채소 구독 서비스를 알게 되었어요. 모양 때문에 상품성이 떨어지는 제철 친환경 농산물을모아 보내주는 ‘어글리어스 채소 박스’를 1년째 꼬박 받아보고 있습니다.

2주에 한 번씩 받다 보니, 다음 배송일이 다가오기 전까지 잘 챙겨 먹자는 생각으로 요리를 하게 되었어요. 요리 초보도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함께 보내줘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식재료가 떨어지면 그제야 장을 보러 나가던 이전과는 차이가 컸어요.

재택근무 때 직접 차린 밥상. 인선님 제공

재택근무 때 직접 차린 밥상. 인선님 제공

처음 채소 구독을 시작할 때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재택근무를 할 때여서 제때 요리를 해 먹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재택근무 비중이 조금씩 줄면서 남아서 버리게 되는 채소 양도 늘어난 게 고민입니다. 집에서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할 때 사라졌던 잦은 배탈도 다시 슬슬 찾아오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스스로 밥을 해 먹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몸과 생활을 잘 돌보고 있는지 체크하는 기준이 세워졌다는 점이에요. 생활 패턴이 바뀌면 장보기와 식사 방식도 조정을 해야 하겠지만, 제철 채소를 활용해 밥을 짓고 먹는 즐거움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도 식재료를 챙겨 보내주시곤 해서, 요즘에는 채소 구독 서비스 외에는 따로 장보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가공식품은 거의 먹지 않아서 대형마트에 가지 않아도 큰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글리어스 채소박스 https://uglyus.co.kr/

■ “믿을 만 한 농가로부터 직접 사요”

서울 2인 가구(결혼 1년차) 진선 님의 이야기

진선님은 대산농촌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 잡지 <대산농촌문화>의 편집자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농촌의 다양한 삶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진선 님 제공

진선 님 제공

평소에 먹을 것을 미리 주문해서 냉장고에 채워 넣는 편이에요. 식재료를 조금씩 살 때는 동네 채소가게나 정육점, 친환경농산물 매장을 이용하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길에 필요한 만큼만 사고 있어요. 주말에는 시장이나 대형마트에 무엇이 나왔는지 둘러보기도 합니다.

저는 농가를 통해 식재료를 직접 구매하는 방식을 가장 선호해요. 전화나 문자로 주문하기도 하고, 농민 또는 농민을 대신한 누군가가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도 자주 이용해요. 서울에서는 농민들이 농산물을 직접 가지고 나오는 농부시장에 틈틈이 기웃거리고, 지역에 여행을 가면 농산물직매장에 꼭 들러요. 그러다 보니 제가 사서 먹는 농산물에는 ‘얼굴’이 있고 ‘이름’이 있어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농사를 지었는지 알게 되면 농산물의 맛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져요. 건강한 먹거리를 내놓기 위해 노력하는 농민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고요. 농가와 직거래하면 이런 제 마음을 농민에게 직접 전할 수 있어요. 친분이 있는 농민들은 제게 “월급을 농산물 사는 데 다 쓰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시기도 하는데요. 제 월급을 ‘탕진’하기에 농산물 값이 너무 저렴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농민들이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농사만 지어도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산물이 적정한 가격에 거래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저도 계속 맛있는 농산물을 맛볼 수 있지 않겠어요?

한살림 제주담을매장 로컬푸드 매대에서 찍은 사진. 진선님 제공

한살림 제주담을매장 로컬푸드 매대에서 찍은 사진. 진선님 제공

최근에는 농민공동체가 제철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꾸러미’도 신청했어요. 상자 안에는 두부, 유정란, 제철 채소, 밑반찬, 간식 등이 두루 들어가 있는데요. 결혼하기 전 부모님과 살 때 체험형으로 몇 번 신청해서 먹었는데 구성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오늘은 뭐 먹지’ 하는 고민을 덜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농산물을 많이 사는 게 부담되지 않았어요. 지금은 일단 우리 둘이서 다 먹을 수 있는 지 부터 가늠해요. 좀 많을 때는, 가족이랑 친구랑 나누는 재미도 있어요.

결혼을 계기로 독립하고 나자, 먹을 것을 스스로 정하게 된 게 큰 변화에요. 농산물을 사고, 요리를 하고, 입에 넣는 순간까지 온전히 책임지는 일이 참 재밌으면서도 고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손님을 모신다고 주말 이틀 동안 음식을 만들었다가 다음날 앓아누운 적도 있어요. 누군가의 먹을 것을 책임지는 모든 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얼굴있는농부시장 https://blog.naver.com/krucc

농부시장 마르쉐 http://www.marcheat.net/

서울시 농부의시장 http://seoulfarmers.kr/

■ “어떤 실천도 성평등 없인 지속하기 어려워요”

수도권 2인 가구 라영 님의 이야기

라영 님은 예술사회학 연구자입니다. ‘먹기’를 소재로 일상의 부조리를 풀어낸 책 <정치적인 식탁>을 썼습니다. 채식을 지향하고 있어요.

지난해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식사>에서 무대에서 요리하고 있는 라영님. 두산아트센터 제공

지난해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식사>에서 무대에서 요리하고 있는 라영님. 두산아트센터 제공

저는 신도시에 살고 있어요. 근처에 전통시장이 없어서, 가급적 대형마트 이용을 줄이고 집에서 가까운 가게를 이용하자는 생각으로 나름의 원칙을 세웠어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서, 가져간 배낭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사자. 20분을 걸어 가서 물건을 짊어지고 다시 20분을 돌아와야 하니까, 너무 많이 사는 건 자제할 수가 있어요. 이렇게 원칙을 세워 두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차를 가지고 대형마트에 가게 돼요.

냉장고는 제 키 정도 되는 것을 써요. 요즘 치고는 작은 편이지요? 용량을 확인해 보니 322리터라고되어 있네요. 많이 쌓아두면 결국 많이 버리게 되는 것 같아서, 김치냉장고도 사지 않고 저것 하나로 다 해결하고 있어요.

실은 이런 방식은 아이를 키우거나 집안에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면 하기 어려울 겁니다. ‘새벽배송’이나 ‘로켓배송’으로 인한 노동착취가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거예요. 저는 온라인 쇼핑을 전혀 하지 않는데, 옆집 현관 앞에는 항상 상자 여러 개가 쌓여있어요. 아이를 돌보느라 집을 비우기 어려운 상황이니 당연할 것 같아요. 이런 분들에게는 저처럼 무자녀인 사람이 차도 이용하지 않고 걸어가서 물건을 사 온다는 이야기가, 되게 비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을까 싶고요.

부모님께서 강원도의 텃밭에서 나는 채소를 철마다 택배로 보내주셔요. 작은 텃밭인데 철마다 다른 게 열리니까 다양한 것을 맛볼 수 있는데요. 장을 봐 오든 텃밭 채소를 가져오든, 식재료는 사오는 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더라고요. 제대로 저장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변질 되어 버리니까요.

강릉에서 온 식재료는 적절한 방식으로 재빨리 손질해 보관해야 한다. 라영님 제공

강릉에서 온 식재료는 적절한 방식으로 재빨리 손질해 보관해야 한다. 라영님 제공

이 과정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여성들, 평생 전업주부였던 분들에게 뭔가를 배우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시장이나 마트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는 중년 여성분들한테도 팁을 정말 많이 얻어요. ‘어떻게 해 먹어요’ 여쭤보면 아는 걸 막 얘기를 해 주셔요.

여성들이 오랜 경력으로 쌓은 지식과 정보가 권위와 가치를 제대로 인정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은 부엌에서 보내는 것이 제 목표이고 희망인데요. 사실 잘 안 돼요. 평일에 바쁘다 보니 거의 주말에 몰아서 하게 되거든요.

제철 채소를 잘 요리해서 먹으려면 결국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겠더라고요. 사람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저와 배우자는 임금 노동으로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밖에서 많은 것을 해결하기보다는 집안일을 잘 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밥도 가급적 집에서 먹으려 하고요.

최근에는 어디에서 장을 봐도 플라스틱 포장재를 피할 수 없게 된 것 같아 정말 고민이에요. 저는 온라인 쇼핑을 전혀 안 하는데도 쓰레기가 감당할 수 없이 많이 나와요. 로컬 푸드를 판매하는 농협의 유기농 코너에서 농산물을 사도 플라스틱에 담겨 있고, 작은 동네 과일가게도 포장을 해서 판매하는 경우가 늘어나요. 딸기철에는 딸기를 한 알 한 알 스티로폼에 담아 내놓기도 하더라고요.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소비자들이 싫어하니 농민과 생산자 입장에선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지만, ‘이런 것들을 받아 들이면 정말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막막해져요.

“환경 정의는 성평등을 타고 온다.” 요즘 제가 이 말을 많이 하고 다녀요. 쓰레기와 환경 문제는 성평등 없이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전업주부들은 이미 최선을 다해 살림을 하고 있는데, 쓰레기를 배출하는 윤리적 책임까지 이 분들이 떠안는 건 부당한 일이에요. 살림은 안 하고 집밖에서 임금노동만 하는 사람은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나버리고요.

제가 집에서 채소를 다듬고 식재료를 관리할 여유가 있는 것도 배우자와 집안일을 최소 반반 나눠 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윤리적으로 소비하려는 어떤 실천도 동거인의 성평등 의식 없이는 어렵다!” 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렇게 얘기를 더 많이 해야 여성분들이 너무 큰 윤리적인 부담을 지지 않을 것 같아요.

■ “로컬 유통이 왜 중요한지, 서울을 떠나 알게 됐어요”

제주도민 3년차 4인 1견 2묘 가구 형중 님의 이야기

형중 님은 정책연구자입니다. 세금과 복지정책, 기본소득 연구를 주로 하는데, 올 초부터는 텃밭 농사도 짓기 시작했다고 해요.

형중님과 두 아이들. 형중님 제공

형중님과 두 아이들. 형중님 제공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한 지 올해로 3년째입니다. 저희 가족은 좀 큰데요. 저와 아내, 초등학교 1학년 딸과 6살 아들, 동물보호센터에서 데려온 늙은 유기묘 장군이, 두살 개 바오와 돌이 갓 지난 고양이 티케 이렇게 무려 일곱입니다. 개와 고양이들은 제주에 와서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서울에 살 때는 마켓컬리와 쿠팡을 엄청 많이 이용했어요. 배우자와 저 모두 먹는 것에 관심이 많고 신경도 많이 쓰는 편이거든요.

제주에 와서도 한동안은 쿠팡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서울과 달리 제주에서 온라인 쇼핑을 하면 배송비가 많게는 만원까지 나오는데, 쿠팡은 제주에 물류창고를 마련해놓고 로켓배송의 경우 배송비를 안 받거든요. 파스타면이라든지 오트밀 음료처럼 동네 마트에서 사기 어려운 품목을 쿠팡에서 주로 샀어요.

이번에 저와 아내 모두 쿠팡에서 탈퇴하면서, 우리 가족이 어떻게 장을 보아 왔는지 한 번 돌아봤습니다. 제주의 삶에 적응하면서 삶의 방식을 점차 바꾸어나가고 있었는데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지금 쿠팡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처음엔 시행착오가 많았죠. 동네 마트에서 구하지 못하는 걸 쿠팡에 주문하기도 하고 차로 멀리 제주 시내에 있는 대형마트까지 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반년 쯤 지나니까 오일장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지금은 세화오일장과 서귀포 향토오일장, 대정오일장 등을 주기적으로 방문합니다.

제주 대정오일장 어물전에 놓인 생선들. 형중님 제공

제주 대정오일장 어물전에 놓인 생선들. 형중님 제공

오일장에 가면 제주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알 수가 있어요. 초여름까지는 초당옥수수가 제철이고 봄에는 딸기, 여름부터는 블루베리, 늦가을부턴 당근, 겨울엔 귤, 이런 식으로요. 어류도 봄에는 자리돔과 멸치, 여름엔 한치, 가을엔 옥돔, 겨울엔 방어 이렇게 다양합니다. 유통단계를 거의 거치지 않고 농민들이 땅에서 캐온 것들을 바로 사니까 신선도가 남다르고요. 미리 장바구니를 챙겨 가면 비닐이나 플라스틱 포장재를 이용하지 않고 장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동네마다 농협 하나로마트의 판매 상품 구성이 다르다는 점도 큰 매력입니다. 하나로마트가 상당히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인근 지역 생산물을 많이 팔거든요. 어떤 곳에서는 지역 브랜드의 두부를 팔고, 어떤 곳에서는 그 지역 특성을 담은 김치를 팔고 회를 팔고 하는 식으로요. (제주에 여행을 오는 분들께는 하나로마트에 꼭 들러 보시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도 쓰레기 문제가 아주 심각하거든요. 지난 10년간 1인당 쓰레기 배출량이 2배 늘었는데 매장할 곳이 없어서 아주 곤란한 상황이에요. 오일장과 한살림을 이용하면 비닐이나 플라스틱 포장을 거의 안 쓸 수 있어요. 최근에는 돈까스나 순대볶음 같은 것을 포장할 때도 포장용기를 챙겨가서 받아왔습니다. 도시 생활자들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 추천하기 쉽지 않지만, 일단 저 부터라도 해 보려고 해요.

제주에 살다 보니 농산물을 어떻게 키우는지에도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귤밭에선 농약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치는데요. 농약을 뿌리는 철에는 가까운 학교에까지 피해가 있을 정도예요. 도시에 살 때는 ‘내 몸의 건강을 위해서 유기농을 먹어야지’, ‘유기농은 비싸니까 부자들이나 자기 몸을 챙길 수 있겠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여기에 와서는 농약을 치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내 건강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위해서 유기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올해 2월 부터는 텃밭 농사를 시작했는데요. 감자, 옥수수, 가지, 토마토, 블루베리, 천혜향, 상추, 로메인 등을 농약과 비료 없이 키웁니다. ‘옥수수는 화학 비료 없이 잘 안 자란다’고 동네 어르신들이 조언하셨지만, 커피찌꺼기 같은, 비료와 동일한 성분의 잔반을 찾아 퇴비로 만들어가며 대안을 강구하고 있어요. 집에서 배출되는 음식물 쓰레기는 전부 땅에 묻어 퇴비로 만들어 텃밭 농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기농 농사를 텃밭 수준에서 실천하고 있다고 할까요.

온라인에서 사던 것을 오프라인으로 사면 비싸지 않냐고 물어보셨는데요. 원래 쿠팡에서 사던 고양이 모래와 개·고양이 사료 같은 것을 이제는 동네 반려동물 용품가게에서 구매합니다. 제주에도 반년 전 부터 지역화폐가 도입됐거든요. 지역화폐는 10%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화폐로 결제하면 쿠팡에서 사던 가격과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앞으로 언제까지 지역화폐에 할인율이 적용될 지 모르겠지만, 지역 상점의 입장에선 분명 장점이 있는 제도인 것 같고, 저도 지역화폐를 쓰기 시작하면서 대형마트나 온라인 쇼핑 의존도가 더 낮아진 것 같아요. 온라인 구매에는 지역화폐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장보기를 하면서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위한 농업의 변화까지 고려하게 된 게 제주에 온 후 생긴 가장 근본적인 변화인 것 같아요. 또 지역에서 생산한 농수산물이 바로 인근에서 유통되는 게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좋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장보기가 단순히 먹기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등 지향하는 바를 실천하는 적극적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이 <미식예찬>(1825)에 적은 문장입니다. ‘먹을 것’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식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산업, 농업, 경제부터 시작해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돼 있습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도 결코 빼놓을 수 없죠. [먹.진.사]에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먹을 것에 진심인 사람들’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


Today`s HOT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황폐해진 칸 유니스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