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강제동원의 숨겨진 피해자들...“당신의 80년은 어땠습니까”읽음

김찬호 기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가 꼬여갈수록 ‘시계’만 쳐다보는 이들이 늘어간다. 피해자가 모두 사망하면 이 문제가 일단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을 근거로 한국 정부가 해결책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들은 개인청구권을 내세워 일본의 주장을 비껴가고 있다.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은 정부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며 짐짓 뒷짐만 지고 있다.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진상규명이라도 철저히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004년 피해 규명을 위해 출범한 ‘강제동원위원회’는 2015년 위로금 지급 기관으로 전락한 채 문을 닫았다. 이들이 진상규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3년 남짓이었다. 다시, 광복절이 다가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피해자의 사연은 쏟아질 것이다. 매년 새로운 증언이 나오지만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향신문은 사할린 강제동원, 강제동원위원회 해체 과정을 통해 이 문제의 숨겨진 구조를 살폈다. 복잡하게 얽힌 문제의 한편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한국 정치의 민낯이 보였다.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자녀인 이광남, 김원진, 신윤순씨(왼쪽부터)가 아버지와 관련된 물건을 손에 들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자녀인 이광남, 김원진, 신윤순씨(왼쪽부터)가 아버지와 관련된 물건을 손에 들고 있다. / 이석우 기자

화태(가라후토). 현재는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섬의 일본식 명칭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본 홋카이도 북단과도 가깝다. 러시아와 일본은 19세기 중반부터 사할린 영유권을 두고 갈등을 벌였다. 사할린 남쪽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은 1943년 이곳을 ‘내지’로 편입한다. 남사할린을 일본 본토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사할린 영유권은 다시 러시아(당시 소련)로 넘어갔다.

영유권 문제만 놓고 보면 사할린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었다. 하지만 사할린 개발사를 놓고보면 한반도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사할린은 대표적인 대일항쟁기 국외 강제동원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석탄, 목재 등의 자원이 풍부한 남사할린을 개발하기 위해 일본인 이주를 장려했다. 하지만 노동력 부족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강제로 동원한 것이 한반도 사람들이었다. 1945년 광복 당시 사할린에 있던 한인만 3만~4만5000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다.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귀환 논의는 1980년대 후반에야 본격화됐다. 1992년부터는 일부 피해자들의 영주귀국이 이뤄지는 등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보상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사할린 강제동원에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1945년부터 1990년까지 남한, 북한, 일본, 소련의 이해관계가 만든 피해자 방치와 이로 인해 파생된 문제다. 사할린을 여타 강제동원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이해관계로 흘러간 시간

강제동원 중 사망은 대부분 피해자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동원지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다. 반면 사할린 강제동원은 독특한 측면이 있다. 피해자가 광복 후에 동원지에서 사망한 경우가 많다. 이는 사할린 피해자들은 광복 후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의미다.

상황이 복잡해진 근본 원인은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다. 전후 일본 정부에게 사할린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1956년 일소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후에도 기본적으로 일본인만 귀환 대상이 됐다. 1957년부터 약 2년간 일본인이 돌아갔는데 이들 중에는 1541명의 한인이 있었다.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한인 남자와 그들 사이의 아이들이다. 일본은 사할린 문제를 전후 책임이 아닌 철저히 ‘혈통’에 따라 처리했다.

당시 일본으로 돌아간 한인 중에는 박노학씨가 있었다. 박씨는 사할린 한인들의 편지를 국내에 전달하며 이들의 존재를 알렸다. 1965년 한일협상이 시작되자 편지 속 정보를 활용해 약 7000명의 사할린 귀환희망자 명부도 만들었다. 이 명부는 1969년 한국 정부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 하지만 일본은 ‘귀환경비 지불을 누가 할 것이냐’, ‘귀환자를 어느 나라가 수용할 것이냐’를 두고 10년을 끌었다. 1976년부터 일소관계가 냉각되자 논의조차 멈췄다.

문제해결에 소극적인 것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할린 한인의 ‘한국’ 송환에 ‘북한’이 반발하고 있었다. 사할린 개발을 위한 노동력 측면에서도 한인은 필요한 존재였다. 소련은 이 문제의 협의 대상을 북한으로 결정하며 사실상 ‘억류’ 방침을 굳혔다.

한국 정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정부 수립 직후 사할린 지역 강제동원 피해자를 데려올 ‘여력’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공산권 지역에 있는 피해자를 데려올 ‘이유’가 없었다. 이념 문제가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사할린은 소련이 지배하는 지역이었다. 1990년 한러수교가 이뤄지기 전까지 직접 협상에 나설 방법도 없었다.

■멈춰버린 그들의 시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할린에 방치된 한인들은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숨겨진 피해자 집단이 한 부류 더 있다. 이른바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국내 가족’이다. 이들은 지금도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가족의 행방을 모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가족을 기다린 시간은 강제동원된 시점부터 80여년이다.

이들의 삶은 강제동원이 내포한 폭력성을 잘 보여준다. 국외로 끌려가지도, 가혹한 노동조건에 처하지도 않았지만 평생을 ‘기다림의 고통’에서 보냈다. 이 고통은 세대마저 건넜다. 아버지 얼굴을 보지도 못한 딸의 유일한 소원은 “무덤이라도 찾고 싶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지난 5월부터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국내 가족들을 만났다. 남편을 기다렸던 새색시는 거동이 불편한 90대 노인이 됐다. 아버지가 강제동원 된 시점에 태어났던 아이는 어느새 70대 후반의 어른이 됐다. ‘강제동원 간 내 남편, 내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이들의 말을 멈추고 “당신의 80년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이들의 기억을 완전히 되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기억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자녀인 신윤순, 김원진, 이광남씨가 보충설명을 했다. 또 10여년 전 증언을 직접 채록한 정혜경 박사의 자료를 참고해 부족한 내용을 보완했다.

■백봉례의 시간

“떠나기 하루 전날 우리 각시 얼굴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했다대요. 부끄러워서 ‘모레는 꼭 갈게요’ 했습니다. 나를 보지도 못하고 그 뒷날 끌려갔습니다. 그날 바로 가서 볼 것을. 지금도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신경철씨의 국내 가족인 배우자 백봉례씨(왼쪽).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남편이 친정으로 보내준 월급 일부로 만든 반지. / 신윤순 제공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신경철씨의 국내 가족인 배우자 백봉례씨(왼쪽).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남편이 친정으로 보내준 월급 일부로 만든 반지. / 신윤순 제공

백봉례씨(95)의 기억은 78년 전 그날에 멈췄다. 결혼한 지 1년 남짓. 남편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이 간 곳이 일본 ‘화태’라고 했다. 이듬해 백씨는 홀로 딸을 낳았다. 백씨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백씨는 1942년, 열여섯 살 나이에 결혼했다. 남편 신경철씨는 백씨와 같은 전북 임실 사람으로 일곱 살 연상이었다. 혼인하지 않은 10대 여자아이들은 ‘처녀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친정 식구들은 급히 혼처를 수소문해 신씨와 짝을 맺게 했다. 물 한그릇 떠 놓고 한 결혼이지만 서로 평생 아껴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한 지 3개월도 안 돼 남편 앞으로 첫 징용장이 나왔다.

남편은 강제동원을 피하기 위해 도망을 갔다. 이장은 시아버지를 붙잡아 고문했다. 모진 매질에도 시아버지는 남편이 숨은 곳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편은 강제동원을 한 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2차 징용장이 나왔다. 시아버지는 더 이상 고문을 견딜 수 없었다. 면 서기와 이장에게 양쪽 팔을 붙들려 끌려가던 것이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943년 10월 30일 저녁의 일이다.

백씨는 남편을 기다리며 딸을 낳아 키웠다. 어느 날 남편이 입고 갔던 옷과 편지가 우편으로 왔다. 남편의 옷에서는 새카만 탄가루가 떨어졌다. 탄광으로 끌려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첫 월급의 일부를 백씨의 친정으로 보냈다. 시댁 가족이 어린 부인에게 돈을 주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백씨는 남편이 보내준 돈으로 반지 하나를 만들었다. 남편의 보내온 징표로 생각하고 평생 간직했다. 밥을 굶는 날에도 이 반지만은 팔지 않았다. 백씨는 “그 사람 돌아오면 꼭 보여주고 싶어서 간직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남편에게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로 답장을 하려 했지만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소련’ 글자(키릴 문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전주 일대에는 정희여중 교감 선생님만이 유일하게 해당 글자를 알았다. 교감 선생님에게 부탁해 주소를 쓰고 편지 한통을 보냈다. 답장도 왔다. 남편은 “딸을 귀하게 키워달라. 곧 돌아갈 수 있을 테니 조금만 참자”고 했다.

1년 뒤 해방이 됐다. 금방이라도 남편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기차의 화물칸, 지붕에까지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백씨는 매일 전주역 앞에 나갔다. 그렇게 꼬박 5년을 기다렸다. 당시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돌아왔다. 백씨는 “사람들이 새하얗게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들 중에 없었다.

그렇게 1950년이 됐다. 전쟁이 시작됐고, 난리 통에 남편과의 연락은 끊겼다. 전쟁이 끝나니 먹고살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1959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딸이 열일곱 살 되던 해에는 시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며 남편과 닿을 수 있는 모든 고리가 끊어졌다. 시아버지는 임종 전 딸 아이를 불러 남편이 보낸 편지봉투 하나를 건넸다. “나는 세월을 잘 못 만나 너희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오거들랑 꼭 너희 아버지를 찾아라.” 시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사할린으로 강제동원 된 신경철씨가 집으로 보낸 편지를 담았던 봉투  / 이석우 기자

사할린으로 강제동원 된 신경철씨가 집으로 보낸 편지를 담았던 봉투 / 이석우 기자

딸 아이는 편지봉투를 들고 당시 외무부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이후 딸은 공무원과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소련과 같은 공산권에 가족이 있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시절이었다. 백씨는 “이제는 남편의 뼈라도 고국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며 “할 수만 있다면 바다라도 넘어 사할린이라는 곳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백씨는 신경철씨를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헤어질 당시 남편은 20대 청년이었다. 이내 ‘아, 우리 신랑’이라고 고쳐 말했다. 백봉례씨를 할머니라고 호칭하지 않는 것 역시 그의 기억이 1943년, 남편과 헤어진 날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윤도연, 하선순, 황계순의 시간

윤도연씨의 남편 김화병씨는 1944년 4월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 한달 뒤 아들 김원진씨가 태어났다. 남편은 아들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다. 김씨는 당시 ‘모집’이라고 불렸던 국내 강제동원을 여러차례 다녀왔다. 사할린으로 떠나기 전까지 약 5년간 결혼생활을 했지만 ‘모집’ 때문에 실제로 함께 산 기간은 1년 남짓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국외 강제동원을 보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전라남도 강진에서 사할린으로 갔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윤씨는 논에서 모를 심다가 혼자 아들을 낳았다. 그때 윤씨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딸이 둘이 있었지만 한 아이는 입안에 염증이 퍼져 다섯 살에 목숨을 잃었다.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지만 늘 가난했다. 재혼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친정의 도움을 받거나 모시를 짜서 장에 나가 팔아 생활을 이어나갔다.

남편 소식은 1979년 사할린에서 돌아온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살아 있지만 사할린에서 재혼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풍문 같은 이야기가 확인된 것은 1989년이었다. 남편과 재혼했다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3년 전, 심근경색으로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던 남편이 사할린에서 일가친척들의 족보를 정리하곤 했다며 이를 전해왔다. 윤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이 족보에도 아들 이름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혈육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이별했다.

1984년 11월1일 김화병씨가 사할린에서 작성한 족보. / 이석우 기자

1984년 11월1일 김화병씨가 사할린에서 작성한 족보. / 이석우 기자

아들 김원진씨는 “1991년에 새어머니가 한국으로 와서 아버지 사진을 주어 처음 얼굴을 봤다”며 “당시 어머니는 새어머니 손을 잡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오히려 다독이셨다”고 말했다. 평생을 기다리기만 했던 윤씨는 남편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김원진씨는 “사할린에 묻힌 아버지와 함께 묻어드리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하선순씨(94)는 열일곱 살이었던 1943년, 남편 이돌몽씨와 결혼했다. 1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남편은 그해 10월 남사할린 탄광으로 동원됐다. 이씨 역시 이듬해 태어난 아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남편은 해방 전 자신의 사진 2장을 편지로 보내왔다. 그것이 남편과의 마지막 연락이었다. 하씨는 농사를 지으며 아들을 키웠다. 50여년을 기다렸다. 하지만 1991년 사할린으로부터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남편의 친구라는 사할린 동포 김정주씨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남편이 이미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김씨는 두 차례 편지 후 연락을 끊었다. 이씨의 사망 원인이나 어딘가에 있을 무덤의 위치 등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치매에 걸린 하씨는 더 이상 옛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들 이광남씨는 어머니가 평소에 자주 하셨던 말을 들려줬다. “1년만 갔다가 금방 돌아오마 했으면서 왜 오지 않습니까. 많이 기다렸어요. 늙어가면서 더 많이 보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 김정주씨가 이돌몽씨의 국내 가족에게 보낸 편지. 이석우 기자

사할린 동포 김정주씨가 이돌몽씨의 국내 가족에게 보낸 편지. 이석우 기자

황계순씨(98)는 열여섯 살 때 남편 임병갑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첫딸이 세 살 되던 해인 1942년 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 황씨는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황씨는 둘째딸을 낳았다. 하지만 열흘 만에 사망했다. 아이를 땅에 묻어야 했는데 시댁에서는 ‘집안에 혼사가 있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시어머니와 황씨가 죽은 아이를 들고 산으로 올랐다.

황씨는 곡괭이를 들고 아이를 묻을 땅을 직접 팠다. “동짓달이 참 환하게 뜬 날이었는데 눈도 하얗게 내렸어. 아이를 묻으려고 보니 눈이 너무 예뻤어. 지금도 썩지 않았을 것만 같아” 황씨가 기억하는 그날, 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다.

■사할린 공동묘지 곳곳에 한인이 있다

백봉례, 하선순, 황계순씨의 남편은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뒤 행방을 찾을 수 없다. 강제동원 당시 나이를 고려하면 이들의 무덤을 찾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과거 소련은 출생·사망에 대한 기록과 관리를 철저히 했다. 또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공동묘지에 묻었다. 사건에 휘말려 변사한 것이 아니라면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공동묘지나 기록을 조사할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중 공동묘지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됐다. 2010~2015년 사할린 내 공동묘지에 대한 전수 조사가 완료됐기 때문이다. 사할린 내 공동묘지가 처음 주목받은 것은 2007년 강제동원위원회에서 파견한 조사단에 의해서다. 당시 조사단을 만난 사할린 한인들은 “생존한 사람보다 돌아가신 분이 더 많으니 공동묘지를 가보라”고 조언했다. 이에 조사단은 유즈노사할린스크 등 주요 도시 공동묘지를 방문해 한인 무덤으로 보이는 곳을 촬영해 왔다.

러시아 사할린 브이코프 탄광 공동묘지의 한인 묘비 / 경향신문 자료사진

러시아 사할린 브이코프 탄광 공동묘지의 한인 묘비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사진을 본 것은 당시 위원회 유해팀장을 맡고 있었던 오일환 중앙대 교수였다. “사진을 보고 한숨이 푹 나왔다. 이렇게 많은 무덤 주인들이 고국으로 못 돌아온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바로 팀을 꾸려 사할린 답사를 나갔다.” 오 교수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이다. 답사팀은 오 교수와 당시 조사팀장이던 방일권 한국외대 교수가 주축이 됐다. 이들은 유즈노사할린스크, 브이코프, 코르사코프 등 사할린 내 주요 도시 공동묘지를 찾아다녔다.

한여름 더위, 모기떼 등과 싸워가며 한인 무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인 것은 러시아인들의 묘는 비석이 땅에 누워 있었던 반면, 한인의 묘는 봉분 형태로 확연히 구분됐다는 점이다. 답사팀은 모든 한인 무덤을 찾는 데 필요한 시간, 예산을 계산하기 위해 표본조사를 진행했다. 공동묘지를 몇개의 구역으로 나눈 뒤 면적당 몇기의 한인묘가 있는지 파악했다. 오 교수는 “계산해 보니 5년 계획으로 열심히 하면 모든 묘를 조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하지만 정부를 설득해 예산을 따내는 데만 3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실제 조사는 2010~2015년 동안 진행됐다. 한인묘임이 확인되는 경우 GPS 장비를 활용해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고 비석의 전후좌우를 촬영했다. 작업이 완료됐을 당시, 남사할린 전역 67개 공동묘지에서 1만5110기의 한인묘를 확인하고 데이터베이스화했다. 러시아 정부를 설득해 2013년부터 한인묘를 발굴해 국내로 유해를 봉환하는 작업도 동시에 이뤄졌다.

공동묘지를 조사하는 것과 동시에 기록물 입수 작업도 추진됐다. 사실 한인들을 찾는 데 가장 기대를 모았던 것은 기록물이었다. 남사할린을 탈환한 소련군은 일본이 남긴 기록 상당수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또, 소련군은 당시 남사할린에 잔류한 인원들에 대한 신상조사도 별도로 진행했다.

이중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자료는 두가지다. 하나는 사할린 주정부의 출생·사망등록소(ZAGS) 내에 있는 ‘사망신고서’다. 해당 자료에는 창씨명, 출신민족, 소속, 사망원인, 사망일 등이 기록돼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사할린 주정부 이민국(OVIR)이 1945년 9월 이후 작성한 조선인 ‘주민등록서’다. 사진, 본적지 등의 개인 신상정보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당시 위원회는 해당 자료의 존재를 확인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경향신문은 해당 보고서를 입수해 ZAGS가 만들어둔 사망등록철, 한인들의 기록이 쌓여 있는 문서보관소 모습 등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러시아 사할린 주정부의 출생·사망등록소(ZAGS)가 보관하고 있는 사망등록철

러시아 사할린 주정부의 출생·사망등록소(ZAGS)가 보관하고 있는 사망등록철

이같은 사실을 전해 들은 외교부는 러시아 측과 자료에 대한 열람 및 입수 협상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협상을 거부했던 러시아 정부는 2013년 실무협의를 제안해왔다. 이를 통해 ‘ZAGS’ 자료에 대한 조회 의뢰 및 확인, ‘사할린주 역사기록보존소(GIASO)’ 기록 열람 및 제공 등이 합의됐다. 러시아 측은 본인들이 믿을 수 있는 한국 전문가의 입회하에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그 대상으로 지명된 것이 방일권 교수였다.

합의를 마친 위원회는 2014년부터 5년에 걸쳐 GIASO가 정리한 한인 자료에 대한 수집 계획을 세웠다. 이 사업은 2014년 단 한차례만 추진됐다. 한 번의 조사로도 약 1만건의 자료와 7193명의 한인 기록이 확인됐다.

러시아 사할린주 문서보관소를 방문한 오일환 당시 강제동원위원회 유해팀장 / 오일환 제공

러시아 사할린주 문서보관소를 방문한 오일환 당시 강제동원위원회 유해팀장 / 오일환 제공

■예산 5000만원이 없어서

러시아와 기록물 입수에 합의한 것은 역사문제의 해결 뿐만아니라 한국 외교에도 큰 성과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예산을 배정받지 못해 좌초됐다. 1차 조사에서 한인 자료를 상당수 확보한 위원회는 2016년에 진행할 2차 조사 예산으로 약 2억원을 신청했다. 정부는 이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위원회는 유골봉환 예산을 5000만원 줄여 기록물 입수에 사용할 것을 다시 제안했다. 하지만 이 5000만원도 배정받지 못했다.

아버지를 찾는 가족들은 애가 탄다. 기록물은 러시아와의 합의에 따라 반드시 정부가 입수해야 한다. 개인이 사비를 털어서 5000만원을 마련한다고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신윤순 회장은 “2013년 8월 15일, 사할린에 있는 지인이 아버지 기록을 찾았다며 연락이 왔다”며 “자료를 촬영한 파일이었는데 아버지 신상과 근무일지 등이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금만 더 찾으면 최종 행적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신윤순씨가 사할린에 있는 조력자에게 사진파일로 전달받은 아버지 신경철씨의 기록

신윤순씨가 사할린에 있는 조력자에게 사진파일로 전달받은 아버지 신경철씨의 기록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대일항쟁기피해지원과의 올해 예산은 약 3억원이다. 또 다른 부서인 유해봉환과가 사할린 지역 업무에 책정한 예산은 2억3000만원이다. 사할린 지역에서는 최근 3년 동안 총 14구의 유해봉환이 이뤄졌다. 공동묘지를 전수 조사한 오 교수 계산에 따르면 이 속도로 유해봉환을 할 경우 모든 유해를 국내로 모셔오는 데 앞으로 1200년이 더 걸린다.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를 찾는 데 필요한 자료, 추진 방법, 전문가 등은 모두 명확한 상태다. 찾지 ‘못하는’ 것과 찾지 ‘않는’ 것은 다르다. 사할린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은 80여년을 기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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