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기업의 퇴사 압박 기술···'전환 배치' '직장 내 괴롭힘'

주영재 기자

수평적·합리적 기업 문화 기대한 IT 기업의 배신···갑질과 괴롭힘 심각한 수준

오세정씨(가명·복수의 인물을 종합)는 기업과 관공서에 뉴스 스크랩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A사에서 일한다. 연간 매출은 150억원 안팎, 직원수는 120명이 조금 넘는 곳이다. A사는 언론보도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판매하면서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를 함께 제공한다. 프로그램을 구독하는 기관과 관련한 언론보도를 매일 추려내 해당기관 언론홍보팀이나 기관장이 보기 편한 형태로 보고서를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오씨 등 22명의 무기계약직 직원을 비롯한 30여명이 이 일을 담당했다. 큐레이션팀은 대개 주요 언론사의 초판이 나오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오 전후까지 일한다. 하루 8시간을 일하는데 급여는 최저임금을 적용한다. 오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대부분 경력단절 여성이다. 일반적인 일과 시간을 피할 수 있어 육아에 도움이 되고, 집에서 일할 수 있어 택한 직장이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근로 장소를 재택으로 명시했다. 팀원들은 세종, 대구, 춘천 등 지방에서 일한다. 보통 1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길게는 10년 가까이 일한 사람도 있다.

‘새마을금고 직장 내 괴롭힘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6월 24일 제주시 정부제주지방합동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마을금고 직장 내 괴롭힘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6월 24일 제주시 정부제주지방합동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환배치로 사실상 해고 나서
오씨 역시 장기간 일하고 싶은 희망이 있었다. 그러다 지난 5월 30일 회사가 보낸 등기우편을 받았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6월 30일자로 팀을 없애겠다, 고용 계약이 종료되니 퇴직 후 업무를 이관받는 하청업체의 프리랜서로 일하든지 아니면 희망퇴직에 합의하라는 내용이었다. 권고사직 합의를 요구하면서 미리 직원들의 의견을 구하는 절차는 없었다. 프리랜서 직원들은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사실상 해고를 하는 건데 직원들을 모아 회사 사정을 설명하고, 우리 이야기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퇴직금은 7월 중순까지 정산해주겠다면서 인심 쓰듯 합의서는 착불로 보내라고 하더군요. 일방적으로 회사에 유리한 내용으로만 정한 후 서명할 거야 말 거야만 전화로 물어봐요.” 노동자들이 동의하지 않자 회사는 6월 23일 전직을 통보했다. 서울로 출근해 다른 업무를 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법률상 계약기간과 근무장소,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이 바뀌면 반드시 근로계약서를 다시 작성하고 교부받아야 한다. 회사는 서울로 전환 발령을 내면서 부서 이동 동의서를 보냈다. 이동 희망 부서를 써도, 희망 부서로 가지 못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근무장소나 근로시간은 노동 계약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건이라 이런 내용이 현저하게 바뀔 경우,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런 내용을 우리에게 설명해주지도 않았어요. 진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면, 포기할 만큼의 대가를 제시하든지, 사과를 해야 하는데 노동자에게 너무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만 강요해요. 우리를 자르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거예요.”

회사는 뉴스 모니터링 프로그램이 핵심이고,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는 단순 보너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며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직원들은 실제 기관이 가장 관심을 둔 것은 신문 지면을 볼 수 있는 모니터링 기능보다 해당 기관과 관련한 기사를 모아서 제공하는 큐레이션 서비스였다고 말한다. 큐레이션 서비스 때문에 기관이 뉴스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이용할 정도라고 말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폄하하며, 직원을 해고하던 회사는 막상 사정이 급해지니 “조금만 더 책임지고 일해달라”고 부탁했다.

A사는 큐레이션팀 재택근무 노동자에게 전원  권고사직을 요구했다. 오세정씨(가명)의 근로계약서에 근무장소로 재택이 명시돼 있다. IT노조 제공

A사는 큐레이션팀 재택근무 노동자에게 전원 권고사직을 요구했다. 오세정씨(가명)의 근로계약서에 근무장소로 재택이 명시돼 있다. IT노조 제공

직장 괴롭힘으로 악용되는 전환배치
회사는 큐레이션 업무 아카이빙과 하청업체 이관을 위한 인수인계가 필요하다면서 업무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보내라고 했다. 직원들이 거부하자 새벽 3시 서울 출근을 지시했다. 숙소와 차편을 제공하냐고 문의하자, ‘왜 회사가 이런 걸 제공해야 하죠’라고 반문했다. 큐레이션팀이 담당하는 고객사에는 해당 직원이 퇴사해 담당자가 바뀐다고 알렸다.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적도 없고, 권고사직 의사를 밝힌 적도 없어요. 그런데 이미 회사 내부에서는 나를 퇴직자로 낙인찍고 통보한 거죠. 통상적으로 회사에 출근해 일할 수 없는 사정의 사람들에게 전환배치라는 명목으로 서울로 출퇴근하라는 것 자체가 괴롭히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거죠. 출근을 못 하면 무단결근으로 해고통보하면 끝인 거예요.”

회사가 최근 수십억대 투자를 받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인공지능 서비스의 초기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 곧 흑자 전환을 할 거라는 대표의 인터뷰 기사도 나온다. 오씨는 “회사가 어렵다기에 초과근무를 해도 수당을 자발적으로 받지 않은 사람도 있고, 상을 당한 날에도 대체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한 분도 있다”면서 “하청을 준다고 해도 법으로 정한 최저시급보다 적게 줄 순 없을 텐데 굳이 팀을 해체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을 넘겨줄 때 직원들의 고용을 승계할지, 만약 누군가 정리를 해야 한다면, 그 직원은 왜 정리하는지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다”면서 “그냥 부서가 없어졌으니 무조건 해고라면서 희망퇴직 동의를 강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씨를 비롯한 15명의 직원은 민주노총 산하 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IT노조)에 가입해 대응하기로 했다. 김환민 IT 노조 위원장은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조건인 근무장소, 근무시간에 상당한 변동이 있음에도 근로자와 성실한 대화와 합의를 시도하지 않았으며, 업무의 폐쇄 및 전직에 대한 정당한 이유 역시 소명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퇴사를 압박하기 위한 사내 괴롭힘 및 기타 징벌 행위로 볼 여지가 상당하다”고 밝혔다. 회사는 노조 측의 교섭 요구에 7월 중순까지 직원들의 요구사항을 정리해오면 이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지방근무자를 서울로 배치해 자발적 퇴사를 유도하는 건 회사가 자주 쓰는 괴롭힘의 유형이다. 이 경우 노동위원회에 부당전보 구제신청을 내 배치전환 명령의 정당성을 다퉈볼 수 있다. 조영훈 노무사(노무법인 오늘)는 “배치전환의 정당성 여부는 주로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과 노동자의 생활상의 불이익을 비교해 어느 쪽이 더 큰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면서 “노동자의 생활상 불이익이 사회통념상 통상적으로 감수할 정도로 현저하게 벗어난 경우라면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이 있다고 해도 부당한 전보명령이라는 판정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야, ××× 나쁘면 ×× 접던가”, “나 한대 치려면 CCTV 없는 데로 가자. 이리 오라고 ×××야.” 안경민씨(가명)는 지난해 한 IT 솔루션 회사에 취업했다가 부당해고를 당한 후 다시 복직했다. 하지만 복직 첫 주부터 따돌림이 시작됐다. 화장실에 있다가 옥상으로 끌려가 폭언을 듣기도 했다. 근거 없이 회사 여직원을 성희롱했다면서 징계위를 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영업부 직원에게 제공하는 회사 차량과 휴대폰도 지급하지 않았다. 업무 능력을 조롱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정보를 주지 않거나 회의 등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했다. 영업을 간 회사에 전화해 실제 안씨가 찾아왔는지 확인하면서 감시하기도 했다. 외근 중 10분에 한 번씩 보고하라고 하거나 컴퓨터 본체를 들고 영업을 다니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복직 후 일주일도 안 돼서 매출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도 있었다. “매출을 잡으려면 고객을 만나야 하는데 고객도 안 만나고 어떻게 매출을 잡습니까. 그래서 영업계획에서 숫자를 빼니 ‘업무지시 거부’라고 하고 예상 숫자를 넣으면 근거가 뭐냐며 ‘거짓 보고’라고 몰아가더라고요.”

부당해고 후 복직한 직원 괴롭히는 회사
“기본이 안 돼 있다”, “근본이 덜 돼 먹은 ××” 등 사장을 비롯한 상급자들은 안씨를 모욕하는 언행을 부지기수로 했다. 회사는 유독 이직이 많은 곳이었다. 복직 후에도 여럿이 회사를 떠났다. 어떤 임원은 퇴사하면서 “널 괴롭히려고 복직을 앞두고 매일같이 작전을 짰다. 나가니까 이야기해준다. 조심하라”라고 말했다. 안씨 역시 IT노조에 가입해 대응하기로 했다. 김 위원장은 “회사의 부당해고가 인정돼 복직했다면, 그 이후 원만한 노사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고, 그럴 게 아니라면 합당한 위로금을 제시하면서 나가게 하면 된다. 이 경우는 그런 것 없이 제 발로 나가게 만들기 위해서 괴롭힌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영훈 노무사는 “복직 명령을 받으면 노동자와 사용자가 합의해 금전 보상을 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면서 “노사의 감정의 골이 심해서 합의가 되지 않을 경우 사실상 힘겨루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힘이 센 사용자 쪽에서 비현실적인 업무를 주거나 잡일을 시키는 식으로 괴롭히거나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 나가게 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안씨의 경우 스트레스로 피부병이 생기고, 정신적인 트라우마도 상당하다고 했다. 조 노무사는 “노동자 입장에선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증거를 확보해서 노동청에 괴롭힘을 신고하거나 경찰에 모욕으로 신고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환경에선 당연히 몸과 마음에 병이 올 텐데 산재를 신청하고 법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제76조의2)이 오는 7월 16일 시행 2주년을 맞는다. 그간 이 조항은 괴롭힘 신고자나 피해자에게 사용자가 불이익한 처분을 했을 때만 형사처벌 규정을 두고, 그 외에는 아무런 벌칙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행히 10월 14일부로 처벌규정 일부가 보완돼 시행된다.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하는 경우 1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하는 규정이 신설됐고, 사용자가 괴롭힘 조사나 피해자 보호, 가해자 징계 조치를 이행하지 않을 때도 올해 10월부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여전히 한계점은 있다. 근로감독관은 사용자가 괴롭힘 행위를 한 당사자일 경우 등 특별한 경우 직접 조사하고 그 외에 근로자 간의 괴롭힘 사건에 대해선 사용자가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하는지 행정지도 정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근로감독관이 전문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상시근로자 5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조 노무사는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에 방치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냐”며 “5인 미만 사업장에 이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오씨는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갑 밑에 을, 그 밑에 병으로 쭉 내려가는 사회에서 결국에는 약한 사람만 계속해서 착취를 당합니다. 저희가 이김으로써 우리 사회가 이런 천박한 사회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회사가 직원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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