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의 ‘젠더 페널티’…“짐 싸서 타 도시로 나가 봤지만 제자리”

윤지원·박상영 기자

(2)공장 생산직으로 일한다는 것···그 여자 이야기

일자리가 많은 도시에서조차 여성 청년들은 취업과 실업 사이 경계로 밀려난다. 자동차·조선·기계 생산에 특화된 두 도시인 울산과 창원의 경우도 그렇다. 중공업 노동자인 남성 가장의 외벌이 고소득으로 전업주부와 자녀들이 생활했던 과거의 가족경제 모델이 사라지면서 기혼 여성들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맞벌이 전선에 나선다. 청년 여성들은 결혼 대신 취업을 택하지만 일자리 경쟁은 치열하다. 탈락한 이들은 기약 없는 구직활동을 이어가고, 소득 없는 예비 노동력이 돼 노동시장 외부 경계를 떠돈다. 또는 일자리를 찾아 ‘지역 엑소더스’를 꿈꾼다.

2년 빼고 매일 구직 중이었다

[기획 시리즈 ‘경계 청년’]제조업의 ‘젠더 페널티’…“짐 싸서 타 도시로 나가 봤지만 제자리”

잦은 구직·이사에 체력·통장 ‘바닥’
사무·서비스직 자리는 한정적이고
이것저것 빼고 나니 생산직만 남아

이혜림씨(27·이하 가명)는 특성화고 졸업을 6개월 앞둔 2013년 드럼세탁기 부품 제조공장에 취업했다. 대기업 소속 생산직은 성적이 높은 소수 학생에게만 선발 기회가 돌아갔고, 대다수는 이씨처럼 ‘하청의 하청’ 공장이 첫 일자리였다. 세탁기 조작 버튼 패널과 세제통을 조립하는 일에는 곧 적응했지만 6개월 만에 공장을 그만뒀다. “생산직 텃세가 있었고 고졸을 무시하는 분위기도 심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일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계획과 달리 이후 3년간 생산직을 맴돌았다. 사무직 일자리는 나이와 외모 기준을 두는 곳이 많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최저임금이나 주휴수당을 못 받고 나오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본 터라 애당초 취업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것저것 빼니 돌아갈 곳은 생산직뿐이었다. 공장은 잔업수당에 야간근무수당을 얹어 월 300만원도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정식 취업하지 않고 일일 혹은 한 달짜리 계약직으로만 일했다. “납땜 중 화상을 입고 하루 만에 그만둔 경우도 있어요. 몸이 못 버틸 만한 일은 미련 없이 빨리 그만뒀어요.”

그가 처음으로 구직 걱정 없이 ‘완전한 취업자’로 산 것은 2017년 유기농 마트에서 일하면서다. 아르바이트로 들어갔다가 점포 관리 정규직으로 전환돼 2년간 일했다. 하지만 무릎 수술로 일을 그만두고, 재활치료를 마쳤을 때는 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무릎 때문에 예전처럼 공장에서 일하기도 힘들었다.

이씨는 무작정 짐을 쌌다. 부산 명지국제신도시 쪽에 보증금 500만원에 월 45만원짜리 원룸을 구했다. 한 달 동안 매일 일을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벌이가 없는데 관리비를 포함한 생활비 지출만 계속 불어났다. 부산의 다른 지역에 일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사와 구직활동을 계속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다시 창원에 돌아온 이씨는 간간이 김해에 있는 대형 e커머스 물류센터의 신선센터에서 단기 알바로 일했다. 냉동창고에서 7시간씩 물건을 포장하는 일이었는데, 추위 때문에 생산직보다 일이 더 고된 것으로 악명 높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일을 구하다가 너무 없으면 맘이 급해지는데 그럴 때 물류센터로 뛰어갔거든요. 그런데 방학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 선착순에서 밀리면서 그마저도 못할 때가 많았어요. 그때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이씨는 지난 1월 보험설계사가 됐다. 판매 실적이 없으면 수입도 없다. 그는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하지만 잘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젊은 여성, 힘든 일 피한다는 편견

울산·창원 등 생산 일자리 많다지만
임금·고용안정 등 모든 면에서
여성 일자리 수준 남성보다 떨어져

제조업에는 ‘젠더 페널티’가 있다. 중공업 중심 지역인 울산·창원 등에 넘쳐나는 게 생산직 일자리지만 임금과 고용 안정 등 모든 면에서 여성 일자리가 남성보다 수준이 떨어진다. 육체노동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이 생산직 중 담당할 수 있는 일은 제품 검사나 납땜과 같은 단순임가공이나 부품 세척 등 부차적 업무다. 제품으로 보면 전기전자·식품 제조업이 대표적이다. 제조업 일자리가 많다지만, 자동차·조선·기계 공장이 많은 울산과 창원에서는 여성들이 취업할 수 있는 일자리는 한정적이다. 지역 제조하청회사를 다니는 유홍준씨(40)는 “현미경 들고 불량만 체크하는 검사직에 여성들이 많다. 구미 쪽에 여성이 일할 만한 기업이 많아 경남에서 경북으로 빠진다”고 말했다. 창원의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하는 이재우씨도 “지금 다니는 곳의 남녀 직원 비율은 7 대 3”이라고 했다.

임금과 복지 수준이 좋은 대기업에 여성이 생산직으로 취업하기는 더욱 어렵다. 창원산업진흥원 관계자는 “창원에서는 LG전자 등에 여성이 많은데 대부분 대기업의 1·2차 벤더로 연결된 회사”라고 말했다. 2018년 전국사업체조사를 보면 울산·창원의 제조업 300인 이상 기업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3.6%, 5.6%에 불과한데 이는 전국 평균인 16.7%에 크게 못 미친다. 관리직으로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2018년 지역별 고용조사를 보면 울산과 창원의 여성 관리직 비중은 각각 0.1%, 0%였다.

제조업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청년 여성들에게도 미래를 책임질 대안이 되지 못한다. 진해에서 마트 생산직으로 6년간 일한 박서영씨(26)는 “임금이 최저임금 수준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절약해 살았다. 그나마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가능했는데 앞으로도 평생 ‘캥거루족’으로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서비스업에도 일자리는 없다

지난해 경남 소재 대학을 졸업한 김연희씨(25)는 창원에서 사무직 취업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일자리가 있는 곳은 보험설계사 아니면 학습지 교사뿐”이라고 말했다.

중공업이 특화된 창원 등에서 고용의 질이 일정 수준 보장되는 사무직은 경쟁이 치열하다. 하청회사 1곳당 10명 이내 여성들이 경리·총무·회계 업무를 보거나 자재 주문 등을 맡는다. 김건우씨는 “나이가 많으면 계속 다닐 수 없기 때문에 공단 사무직 여성들이 일하면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대기업 이직을 시도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무직 하청 자리를 맴돈다”고 말했다. 부당한 일도 감내해야 한다. 강지윤 경남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임금이 3개월씩 밀려도 그냥 참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울산·경남 지역의 2018년 연구·광고·회계·금융 등 생산자서비스업 비중은 울산(14.8%)과 창원(11.7%)이 전국 평균(18.8%)보다 각각 4%포인트, 7.1%포인트 낮았다. 서비스업종 중에서도 임금이 높은 업종 비중이 작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전체 서비스업 임금 수준은 전국에 비해 낮다. 울산과 창원의 서비스업 여성 노동자 월평균 임금은 각각 175만9000원과 181만8000원으로 모두 전국 평균(192만3000원)에 못 미친다. 허은 창원대 연구원은 지난해 ‘지역사회연구’에 게재한 논문에서 “청년 여성은 제조업 부문 양질의 일자리에서 거의 전적으로 배제됐을 뿐 아니라 서비스업 중 고부가가치 부문에서 구할 일자리 규모는 더 작다”며 “그나마 여성에게 진입 기회가 열려 있는 (서비스업) 일자리도 임금이 전국에 비해 낮다. 결국 이 지역 여성들에 더 큰 불이익이 돌아간다”고 말했다.

경계청년 여성들, 소득이 없다

청년 여성들은 서비스업과 제조업 모두에서 정착할 만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며 단기 일자리를 전전한다. 주 18시간 미만의 초단기 취업자로 사는 것이다.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도 코로나19 이후 여의치 않다. 지난해 도소매·음식숙박업 등에서 일자리가 크게 줄며 2020년 4분기 경남 15~29세 실업자는 전년 동분기 대비 17.6% 늘어난 1만8000명을 기록했다. 진형익 경남청년네트워크 대표는 “과거엔 공장에서 박스접기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코로나19 이후에는 일자리 자체가 많이 줄었다”며 “그나마 남성들은 배달이라도 하지만, 여성은 그런 일자리도 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면서비스업 위주였던 청년 여성 일자리에 타격이 집중되면서 여성들의 생계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2020년 경남사회조사에 따르면 청년 중 사회적 계층을 ‘하’로 보는 응답은 여성(18.4%)이 남성(16.3%)보다 높고, 소득이 불평등하다고 보는 비율도 여성이 42.2%로 남성보다 10.6%포인트 많았다.

일자리 찾아 지역을 떠나지만

[기획 시리즈 ‘경계 청년’]제조업의 ‘젠더 페널티’…“짐 싸서 타 도시로 나가 봤지만 제자리”

청년 인구 계속 줄어드는 경남 지역
여성 유출 더 많아 성비불균형 심각
주거비용 등 부담에 수도권 회귀도

미스매치 노동시장에서 오래 버텨온 청년 여성들에게 ‘지역 이동’은 현실적 대안일지도 모른다. 최근 5년간 청년들의 지역 엑소더스가 본격화했다. 경남 소재 청년복지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는 “지자체에서는 청년들의 지역 유출을 막으려 하지만, 청년들은 대부분 서울 또는 수도권 취업을 원한다. 지자체의 목표와 현장 대응이 충돌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 국내인구이동통계를 보면, 지난해 경남은 청년(19~34세) 순이동(전입-전출 인구)이 1만8919명까지 늘었다. 2013년(3321명) 이래 순유출 규모는 계속 늘고 있다. 이 중 여성들의 지역 유출이 남성보다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창원대 사회학과에서 국내인구이동통계를 분석한 데 따르면 중공업 도시 창원을 중심으로 지난해 청년 순유출은 5180명인데 이 중 청년 여성이 2858명에 달했다. 청년 여성의 순유출은 2014년 1000명을 처음 돌파한 뒤 계속 증가 추세다. 여성이 계속 빠져나가면서 2020년 12월 창원의 청년층 남녀 성비는 1.22 대 1로 전국(1.09 대 1)보다 불균형이 크다.

청년 여성의 지역 이동은 주로 경남 내 도시→부산→수도권 순으로 진행된다. 김은영 경상남도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남성은 장기적으로 볼 때 제조업 일자리가 안정적이라고 보고 경남에 들어오는 인구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반면 청년 여성의 유출이 심각한데 이들은 주로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일자리를 찾기 위해 부산에 먼저 갔다가 그곳에서 일을 못 구하면 수도권으로 다시 튕겨 올라간다”고 말했다.

지역을 떠난 청년들이 외지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중공업 도시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강지윤 위원장은 “수도권에 나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심리적 부담감을 동반하는 것인데 이를 이겨낼 만큼 소득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월 주거비용을 빼면 거기서 버는 것이나 여기나 큰 차이가 없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혜림씨는 “주변 친구들이 모두 창원을 떠났다. 문화생활도 좋고 일자리도 많다는 김해나 부산에서 자리를 잡았다. 무릎이 괜찮고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면 나도 어떻게든 부산에서 버텼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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