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기준으로 21대 국회에는 8875건의 법안이 계류돼 있다. 하루에만 수십 건의 법안이 발의되고, 상당수 법안은 상임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이 법안의 운명도 위태롭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으로 규정한 현행법에 ‘동의 여부’를 추가한 형법 제32장 일부개정안. ‘비동의강간죄’(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강간)라 불리는 이 개정안은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가장 중요한 성폭력법 개정으로 꼽히지만 지난해 발의된 뒤 1년 가까이 잠들어 있다.
강간죄 개정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현행법은 강간을 정조를 빼앗는 관점으로 본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그대로다. 현실에선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강간이 더 많고(71.4%, 2019년), 복잡한 성범죄의 특성을 고려한 판결들도 나오지만 여전히 어떤 재판부는 법조문을 좁게 해석해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판단 근거로 삼는다. 90%의 성범죄는 사건화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피해자는 숨는다. 68년 된 강간죄 개정은 2020년대에도 물거품이 될까. 지난해 총선 전 강간죄 개정에 찬성했던 의원들은 당선 이후 무얼 하고 있을까. 강간죄 개정안 발의 1년을 맞아 법 개정을 둘러싼 움직임을 알아봤다.
■204 → 45 → ?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달 29일과 30일 국회 의원회관을 돌며 친전(직접 쓴 편지)을 전달했다. 강간죄 개정에 찬성하는지 묻고, 9월 정기국회 때 법안이 논의될 수 있도록 함께해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2019년 3월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들이 연합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2021년 2월 기준 223개 연합)는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 1430명에게 강간죄 개정에 찬성하는지 물었다. 후보 204명이 찬성한다고 답했고, 그중 45명이 당선됐다. 류 의원은 그 45명에게 다시 찬반 여부를 물은 것이다. 지난 9일까지 받은 답변을 집계한 결과 45명 중 류 의원 본인을 제외하고 찬성 의견을 전달한 의원은 13명, 무응답은 30명이었다. 한 의원실은 친전 수령 자체를 거부했다.
[인터랙티브]"이 법은 또 사라지는 중입니까"...법안에 찬성했던 의원들은?
류 의원은 지난해 8월12일 강간죄 개정안을 발의했다. 형법 제32장의 제목을 ‘강간과 추행의 죄’에서 ‘성적 침해의 죄’로 바꾸고, 강간·추행죄의 구성요건에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위계·위력을 추가했다. 류 의원의 발의안에 함께한 의원은 본인 포함 13명이었다. 이번 친전 응답 수와 비슷하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난해 6월 강간죄 구성요건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로 바꾸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류 의원의 안에 비하면 개정의 폭이 작지만, 동의 없는 성적 행위를 성폭력으로 봐야 한다는 개념은 같다. 백 의원 발의안엔 본인을 포함해 14명이 서명했다. 두 법안에 함께한 의원 수를 합하면(중복된 사람 제외) 26명이다. 26명엔 총선 전 강간죄 개정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밝히지 않았던 의원들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발의안에 서명만 해놓고 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 등 다른 정당은 아직 강간죄 관련 법안을 발의하지 않았다. 20대 국회에서 민주당과 정의당뿐 아니라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등 5개 정당이 강간죄 개정안 10건을 발의한 것과 비교된다. ‘미투운동’과 ‘n번방 사건’ 등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결과였다. 류 의원의 친전에 응답하지 않고, 발의안에 서명하지 않은 의원들도 강간죄 개정에 동참할 가능성은 있다. 법안이 많이 발의됐다고 통과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강간죄 개정에 대한 관심은 확실히 지난 국회에서보다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20대 국회에선 발의자 중 4명이 남성 의원이었다. 수천건의 법안이 계류 중인 상황에서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류 의원은 “직접 만나보면 많은 의원들이 개정해야 한다고 공감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는 분위기”라며 “9월 국회에선 법사위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법사위 안건 채택은 교섭단체인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사가 협의해 결정한다. 류 의원은 “여론의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며 “제가 또 ‘쇼한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가능한 여러 방법을 고민해 강간죄 개정이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법제사법위원장 직무대리 겸 간사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그동안은 제대로 검토해보지 못했는데 하반기에 논의될 수 있도록 야당 간사와 의논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도 입법운동에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오는 17일과 20일 줌을 이용한 대중강연, 24일 전문가 라운드테이블 토론회를 열 계획이고 9월 국회 토론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법 때문에 피해자가 숨는다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조건 때문에 많은 강간사건이 신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진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박아름 활동가는 “어렵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상담을 받으러 왔다가 강간죄 조항을 보고 당황한다”며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고소하면 당연히 유죄 판결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판단기준이라는 사실에 놀란다”고 말했다. 결국 피해자 스스로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 만큼의 폭행과 협박을 당했는지 검열하고, ‘가짜 피해자’로 몰리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러나 법조문 밖의 성범죄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더 큰 위험이 예상돼 강하게 저항할 수 없거나 가해자와 권력관계에 있는 경우 등 얼마만큼 폭력에 저항하는 흔적을 남겼는가만으로는 따질 수 없는 여러 유형의 피해가 있다. 2019년 1~3월 전국 66개 성폭력상담소 사례를 분석한 결과 강간 피해 사례 1030건 중 71.4%(735건)는 폭행·협박이 없는 사례로 집계됐다.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행사된 사례는 28.6%(295건)였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한국여성학회에 발표한 논문 ‘보통의 강간 :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2019)’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피해자의 격렬한 저항, 저항을 무력화할 만큼의 엄청난 폭행과 협박의 자행이라는 어쩌면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거나 드물게 발생하는 성폭력 범죄의 전형성 속에서 너무나 많은 ‘진짜’ 성폭력이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실에서도 직접적인 폭력과 협박이 없는 강간사건에서 유죄 판결이 나오고 있다. 2005년 대법원은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그럼에도 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는 어떤 재판부를 만나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2019년 채팅 앱으로 만난 여성을 남성이 차 안에서 성폭행한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성관계를 한 것은 인정된다”면서도 “피고인이 상대방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로 폭행 또는 협박하지 않았다”고 봤다. 특히 재판부는 “감자탕집에서 여성이 피고인의 접시에 고기를 덜어준 점”도 무죄의 근거로 들었다. 이 사건은 2심에서 뒤집어졌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려다 전화기를 두 번이나 뺏긴 점, 무섭다며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점 등을 인정해 유죄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좁은 차 안에서 밀치는 것 이상의 저항은 소용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안희정 성폭력 사건도 1심에선 무죄 판결이 나왔다. 이렇게 판결이 들쭉날쭉하자 가해자도 피해자도 판결을 납득하기보단 ‘재판부 운’을 따지게 되고, 피해자들은 숨게 된다.
낮은 신고율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2019년 전국 168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상담 건수는 27만6122건인데, 같은 해 대검찰청이 집계한 성폭력 범죄 건수는 3만2029건에 불과하다. 상담소에 접수된 사건 중 약 11%만이 ‘사건화’된 것이다. 모든 성폭력 사건이 상담소에 접수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범죄가 드러나는 비율은 더 낮다고 볼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실시한 ‘2019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를 보면 성폭력 피해 경험자가 수사기관의 도움을 받은 비율은 1.4%에 불과했다.
성폭력법 개정 운동을 펼쳐온 이경환 변호사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선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처벌당한다는 인식이 확립돼야 하는데 성폭력 사건은 90% 이상이 빠져나가는 범죄가 됐다”며 “법 때문에 첫 단계에서 탈락하는, 신고조차 못하는 사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수사기관이나 재판부의 실무에 맡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폭력을 정의하는 구성요건과 판단기준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강간죄 구성요건을 상대방의 동의 여부로 바꾸는 것을 두고 나오는 반대의견 중 하나는 무고가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에서 무고율은 미미하다.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대검찰청의 발표 자료를 보면 검찰의 성폭력 사건 처리 인원 8만677명 중 중복 인원을 제외한 7만1740명을 기준으로 무고로 기소된 인원은 556명(0.78%)이다. 이 중 유죄가 선고된 인원은 341명(0.42%)이다. 오히려 폭행과 협박이라는 구성요건 때문에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는 ‘2차 가해’가 더 큰 문제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경환 변호사는 “강간죄 구성요건을 바꾸는 일이 과연 1%도 안 되는 무고 때문에 못할 정도인가”라며 “그렇다면 강간죄를 개정할 경우 무고가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근거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68년 된 강간죄, 이번엔 바뀔까
강간죄 조항은 1953년 형법 제정과 함께 만들어졌다. 법 제정 초기 강간은 ‘정조’를 빼앗는 개념이었다. 형법 제32장의 제목 ‘정조에 관한 죄’는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고 1995년에야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다. 다시 26년이 흐르는 동안 범죄의 유형도 성인식도 달라졌다. 친고죄가 폐지됐고, 부부 사이의 강간죄도 인정됐다. 그러나 강간을 규정하는 법조문의 구성요건은 그대로 남아, 오락가락하는 판결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장다혜 박사는 지난 2월 출간한 공저 <미투가 있다/잇다 : 끝나지 않는 변화의 연대>에서 “우리 형법상 성폭력법 체계는 정조를 보호법익으로 설정했던 1953년 형법 제정 당시의 체계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보호법익에 부합하지 않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범죄를 다루는 세계의 법과 기준도 변하고 있다. 유엔 여성지위향상국은 2010년 각 회원국에 “형법이 폭행의 행사를 강간의 구성요건으로 요구하는 경우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7년 “성범죄는 자유로운 동의의 부재를 기준으로 정의돼야 한다”고 명시했다. 2000년대 들어 많은 나라가 강간 관련 조항을 개정했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 스웨덴, 룩셈부르크, 키프로스, 아이슬란드, 벨기에, 덴마크, 캐나다, 크로아티아 등이 비동의강간죄를 규정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도 정부에서 법 개정 절차에 착수했다. 미국은 주에 따라 법이 다른데, 연방수사국(FBI)은 2012년부터 강간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교를 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형법 제297조를 개정해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판단하라고 권고했다.
박아름 활동가는 “강간죄 개정은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란 무엇인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고 동의 없는 성행위는 성폭력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활동가는 “동의 없는 성관계를 했더라도 폭력이나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가 나오면 가해자에겐 ‘너의 행동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주게 된다”며 “과연 이런 법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맞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법은 많은 이들의 희생과 피해를 계기로 바뀌어 왔다. 강간죄 법조문을 좁게 해석한 수사와 판결들로 피해자들이 숨거나 죽음으로 억울함을 증명하는 일이 수십년 동안 반복됐다. 법의 지체는 피해의 연장을 의미한다. 더 큰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21대 국회는 응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