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이의 있습니다

②곳곳에 구멍 숭숭…시행하기도 전에 보완 입법 논의되는 현실

고희진 기자

법안 의미와 한계

내년 1월 시행 앞두고 시행령 23일 입법예고…노동·경영계 ‘수정 의견’ 막판 줄다리기 돌입
‘재해예방에 필요한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서 재해예방 삭제돼
5인 미만 사업장 제외 등 ‘중대재해 범위 축소’ 논의 외 기업의 안전관리 의무 규정 모호해져
‘위험 작업 2인 1조 의무화’도 제외·안전 관리와 점검 민간 위탁 가능…책임 회피도 가능해져

내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정부가 오는 23일 시행령을 입법예고한 가운데 노동계와 경영계가 줄다리기에 들어갔다. 법안이 적용될 때 기초가 되는 시행령에 대한 수정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이 열흘도 채 남지 않으면서 물밑 여론전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9일 국회에선 더불어민주당 산재예방 태스크포스(TF) 주최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정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튿날인 10일 한국노총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의견수렴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노동계의 주요 지적은 시행령이 경영책임자의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 범위를 협소하게 규정해 사실상 재해예방 효과가 낮다는 것이다. 11일에는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가 ‘중대재해처벌법령 개선 토론회’를 열었다. 경영계는 시행령이 불명확한 처벌기준을 담아 경영 안정성을 해친다며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정의당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에서 기업의 책임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시행령에 대한 보완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물류센터 화재 참사, 사업장에서 안전조치 미비로 발생하는 사망재해 등 노동현장의 반복되는 중대재해를 막기 위해 제정됐다. 중대재해 발생 시 안전조치를 소홀히 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도 법적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전 문제를 노동자 개인이 아닌 기업의 책임으로 명확히 한 것이다. 21대 국회에 와서야 처리됐지만, 과거에도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3년 19대 국회 당시 김선동 통합진보당 의원은 ‘기업살인처벌법’을 발의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이후 가습기살균제 문제도 이슈가 되면서 대형 재난 사고의 발생과 원인 규명, 책임자 처벌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15년 7월 시민사회단체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를 발족한 뒤, 국회에 관련 입법 청원을 하기도 했다. 이후 2017년 4월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안’(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했다. 법안은 인명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사업주와 경영자·관리감독기관을 형사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업주와 관리감독기관의 처벌을 강화하고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로 이번에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법안은 대다수 의원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된 논의 없이 20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2018년 12월11일 한국서부발전 사업장인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20대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사건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공분을 산 중대재해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관련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제2의 이소선 여사’(고 전태일 열사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각종 산재 현장을 찾아다니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김씨는 지난해 말 국회 앞에서 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노숙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야당의 비협조를 이유로 법안 처리에 지지부진한 태도를 보이자 “여태까지는 여당이 (법안을) 다 통과시켰다. 그런데 왜 이 법은 꼭 야당이 있어야 하느냐”는 촌철살인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 1월8일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논란은 이어졌다. 통과된 법이 원안에 비해 내용적으로 크게 후퇴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법 적용 대상에 5인 미만 사업장이 제외됐고, 안전보건 조치에 있어 원청이 책임져야 하는 도급과 위탁계약의 범위도 기존 발주·임대·용역·도급에서 용역·도급으로 축소됐다. 책임자 처벌 수위도 2년 이상 유기징역 또는 5억원 이상 벌금에서 징역 1년 이상, 벌금 10억원 이하로 바뀌었다. 정의당 의원 전원은 당시 법률안 표결 과정에서 법안 내용 후퇴에 항의하며 기권했다.

노동계는 시행령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지난달 5일 입법예고된 시행령은 중대재해를 예방하겠다는 법안의 취지마저 위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행령이 법안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중대재해의 범위를 협소하게 규정했고, 기업의 안전보건조치의무 규정도 구체적이지 않아 재해예방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법안 제4조 제1항 제1호에서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의무에 대해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로 표현한 것과 달리, 시행령은 이를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로 한정한 것을 문제 삼는다. 재해예방과 단순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이 구체적인 조치는 하지 않은 채 안전보건담당자만 채용해 현장에 두면 관련 조치를 다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게 노동계의 지적이다.

이외에도 시행령에는 위험 작업 시 2인 1조 작업을 의무화하는 내용도 포함되지 않았다. 안전보건 관리점검을 민간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문제다. 시행령은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반기별로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보고받도록 했는데, 의무 이행에 대한 점검을 ‘위탁’할 수 있다고 했다.

직업성 질병에 대한 범위 설정도 논란이다. 시행령은 중대재해에 해당하는 직업성 질병의 종류를 ‘화학적 인자에 의한 급성 중독’과 ‘염산 등에 노출돼 발생하는 반응성 기도과민증후군’ 등 24가지 질환으로만 규정했다. 노동계가 과로사의 원인이 되는 뇌·심혈관계 질환이나 배송기사들에게 자주 발병하는 근골격계질환도 직업성 질병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경영계 역시 시행령이 모호해 어떤 안전관리를 해야 하는지, 경영책임자의 책임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원안에서 후퇴된 법이 모호한 시행령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시행령이 그대로 확정된다면 갈등·충돌의 소지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미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벌써부터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일각에선 나오고 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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