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맹 시각장애인인 지석봉씨(47)는 지난해 6월 서울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난감한 일을 겪었다. 밖에 나온 김에 직장의 다른 시각장애인 동료들 몫까지 햄버거 단품 4개를 사려고 했는데, 점포에 키오스크만 있고 직원이 없었다. 무인화 정책 때문이었다.
그냥 갈까 생각도 했지만 할 수 없이 다른 손님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이 손님이 부탁을 잘못 이해해 단품이 아니라 세트메뉴를 4개 주문했다. 지씨는 “도와준 건 너무 감사했지만 조금 난감했다”며 “시각장애인이라 불편했다는 실감이 들어 속상했다. 장애인이라고 꼭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장애인도 접근할 수 있는 무인단말기가 절실하다”고 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주민센터·구청의 민원발급기 등 공공 키오스크 이용에 커다란 불편을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25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서울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키오스크 시각장애인 접근성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서울시내 공공 키오스크 122개 중 절반이 넘는 63대(51.6%)는 스피커와 이어폰 어느 방식으로도 음성정보를 통해 화면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공공무인단말 접근성 국가표준(KSX9211)의 시각장애인 관련 내용을 기준으로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서울시 공공 키오스크 122개, 민간 키오스크 108개를 조사한 결과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주체가 돼 공공·민간 키오스크 접근성 실태조사를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공 키오스크조차 국가표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시각장애인에게 불편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화면 빛 반사로 인해 전맹이 아닌 시각장애인이 내용 파악을 하기 어려운 기기가 86대(70.5%), 이어폰 단자가 아예 없는 기기와 단자가 있더라도 음성 크기가 너무 작거나 들리지 않아 내용 파악이 어려운 기기가 87대(71.3%)였다. 사용자가 음량을 직접 조절할 수 있는 기기는 한 대도 없었다.
점자 인식도 어려웠다. 조사 대상 공공 키오스크의 대부분인 113대(92.6%)에 점자 키패드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이 중 절반에 가까운 54대는 점자의 돌출이 선명하지 않거나 간격이 좁아 인식하기 어려웠다. 공공 키오스크에서 문서를 출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시각장애인이 평균 325.03초로 비장애인의 65.92초보다 5배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사용 시간을 연장할 수 있는 기기는 한 대도 없었다.
식당·카페 등의 민간 키오스크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공공 키오스크의 105대(86.1%)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글씨 확대 기능을 지원했지만 민간 키오스크 108대 중 이 기능을 지원하는 기기는 3대(2.8%)뿐이었다. 장애인을 위한 직원 호출 버튼이 없는 기기도 97대(89.8%)나 됐다.
시각장애인들은 키오스크 이용이 어려워 좌절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시각장애인 58명(전맹 20명·저시력 3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46.6%가 ‘키오스크 사용이 어려울 때 장애의 좌절감을 느꼈다’고 답했다. 전맹 시각장애인의 53.4%는 ‘키오스크 이용 경험이 없다’고 했다. ‘음성 기능이 없어서’ 키오스크를 이용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72.2%였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비대면 사회로 갈수록 키오스크는 더 늘 것이고 시각장애인 혼자 결제할 수 없는 가게들도 많아질 것”이라며 “공공과 민간에 맞는 키오스크 지침을 새로 제작해 모든 장애인의 키오스크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오는 27일 토론회를 열고, 키오스크 업체와 관련 기관을 대상으로 공익소송도 진행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