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난민을 생각하다(5)

“혐오는 우리를 못 만나본 사람들이나 하는 것”…지역사회 녹아든 난민들

오경민·유선희·김혜리·민서영·이홍근 기자
인천 부평구 미얀마 거리에 있는 미얀마 식당. 미얀마 난민 싼꼬끄가 운영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인천 부평구 미얀마 거리에 있는 미얀마 식당. 미얀마 난민 싼꼬끄가 운영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인천 부평역 5번 출구로 나와 서쪽을 바라보면 미얀마어로 적힌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같은 방향으로 200m만 걸으면 나오는 사거리의 네 모퉁이 중 세 모퉁이에는 미얀마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다. 나머지 한 모퉁이에는 미얀마인들에게 비자 발급을 도와주는 사무실이 있다. 거리 곳곳의 가게에 ‘미얀마 군사쿠데타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나 인쇄물이 걸려 있다. 주차된 차 위에도 ‘미얀마군부 독재타도 위원회’의 후원을 안내하는 홍보물이 붙어 있다.

인천 부평구는 미얀마인들이 먹고, 일하고, 자는 삶의 터전이다. 지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식당이 대부분 문을 닫아 한산하지만 전에는 수도권 인근에 사는 미얀마인들이 주말마다 모여 함께 고국의 음식을 나눠먹었다.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지난 7월 기준 인천 부평구에 총 528명의 미얀마인이 거주 중이다.

이 곳의 터줏대감은 20년 가량 전 한국으로 망명한 미얀마 출신 난민들이다. 이들은 정부가 2015년 ‘재정착 난민 수용 시범사업’을 추진하기 전부터 부평에 모였다. 미얀마 출신 난민 재민(63)은 일터에서 제공하는 숙소 등을 전전하다 인천 부평구에 터를 잡았다. 벌써 햇수로 10년이다. 그는 1988년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는 ‘8888 시위’에 참여한 뒤 정부의 탄압을 받다 2000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지난 25일 미얀마 출신 난민 재민(63)이 인천 부평구 주한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지난 25일 미얀마 출신 난민 재민(63)이 인천 부평구 주한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미얀마인들이 이곳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재민이 부평에 온 2011년만 해도 이 곳에는 사업자등록을 제대로 낸 미얀마 식당이 없었다. 진나 25일 만난 그는 “한국에 있는 미얀마인들에게 ‘어머니 솜씨’ 같은 맛을 보여주고, 한국인들에게도 ‘진짜 미얀마의 맛은 이런 것이구나’를 보여주기 위해 부평으로 와 미얀마 식당을 열었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뿌듯한 일은 손님으로부터 “고향에 온 것 같다” “(음식을 먹으니) 마음이 너무 따뜻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이 곳에서 먼저 자리잡은 난민들은 자신들보다 늦게 한국에 온 미얀마인들을 돕고 있다. 재민은 주한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 공동대표를 맡아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는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문제, 노동자들 개인 문제뿐 아니라 미얀마에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끔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을 세워주는 일을 하고 있다”며 “한국에 온 미얀마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1998년에 한국에 와 6년 전부터 미얀마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난민 산꼬끄(56)는 코로나19 때문에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에게 공짜로 미얀마 음식을 포장한 도시락을 배달해주고 있다. 그의 식당에는 미얀마인들도, 한국인도 찾아온다. 한국 마늘과 청양고추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이거 미얀마 음식에도 다 들어가요!”

지역사회도 이들을 더이상 낯설어 하지 않는다. 인근에서 20년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처음에는 이주민을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미얀마인들이 주말에 이곳에 모이다 보니 장사하시는 분, 여관하시는 분들이 돈이 된다. 이들이 지하상가도 이용하고 하니까 지금은 거리낌없이 대한다”며 “다들 상부상조하니까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 26일 베레켓 알레마예후가 자주 방문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한 마트 앞에 서 있다. 오경민 기자.

지난 26일 베레켓 알레마예후가 자주 방문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한 마트 앞에 서 있다. 오경민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사는 에티오피아 난민 베레켓 알레마예후(42)도 동네마트 직원, 부동산 사장과 인사하며 지낸다. 지난 26일 한 부동산 앞을 지나면서 서툰 한국말로 “잘 지내셨어요?”라고 말을 건네는 알레마예후에게 부동산 사장 A씨는 “방 필요하면 말해!”라고 인사했다. 알레마예후는 “노량진동에 사는 모든 에티오피아인들이 이 부동산을 통해 방을 구했다”며 “사장님이 작년에 갑자기 사라지셔서 모두가 걱정했는데, 사고를 겪으셨다고 했다. 얼마 후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셔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노량진동에 모여 사는 건 얼마 전까지 근처 상도동에 난민지원단체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레마예후도 6개월간 피난처의 임시 숙소에 살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그처럼 피난처의 도움을 받던 이들이 교통이 편리하고 임대료가 저렴한 노량진에 자리잡았다. 이 곳에는 500명 가량의 에티오피아인들이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레마예후에게 가장 적응이 어려운 것은 한국의 날씨였다. 그가 살던 곳에는 겨울이 없었다. 그는 “살면서 한번도 영하의 날씨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겨울이 너무나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 마주한 겨울을 사진으로 남겼다. 2018년과 2020년에는 ‘망명 패턴(Exile Pattern)’이라는 사진전까지 열었다.

그는 난민을 혐오하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차별은 보통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한다”며 “외국인이나 난민을 전혀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차별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내가 여기 산 지 7년이지만 누구도 나를 죽이려 하거나 나를 때리려 하지 않았다. 난민 혐오는 정치적인 전략으로 부추겨진 면이 있다”며 “이 곳만 해도 많은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한국 사람들과 섞여 산다. 나는 한번도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직접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지역시민단체인 ‘동작FM’을 통해 학생들에게 난민을 설명하는 강연도 하고, 에티오피아 음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한다. 한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는 “우리는 단지 불쌍한 난민인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를 배우고 낯선 문화를 가져오는 문화적 가교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28일 에티오피아 난민 다윗 네구수 자택에서 자녀 키두스와 마피 남매를 만났다. 김혜리 기자

28일 에티오피아 난민 다윗 네구수 자택에서 자녀 키두스와 마피 남매를 만났다. 김혜리 기자

아이들은 한국 문화를 더 빠르게 흡수한다. 2018년 한국에 온 다윗 네구수(40)의 자녀들은 한국말이 능숙하다. 키두스(12)는 에티오피아말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다. 마피(9)는 에티오피아말을 아예 쓸 줄 모른다. 키두스는 28일 “학교에서 일대 일 수업을 통해 한국말을 배웠다”며 “그런데 한국말을 잘한다고 생각할 때쯤 한자가 나타났다”며 웃었다. 이들은 유튜버 중 한국인 게임 유튜버 밍모를 제일 좋아한다. 만화도 좋아한다. 키두스는 학습만화인 ‘살아남기 시리즈’를 즐겨 읽고, 마피는 ‘명탐정 코난’과 ‘짱구’를 한국어로 읽는다.

노량진에서 20년째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최영호씨는 “이들을 보고 놀라거나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며 “이들이 여기 자리잡은 지 10년 정도 됐다. 몇명이 사는 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만나면 간단하게 영어로 인사하고 지낸다. 저 사람들하고 나하고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2018년 제주도를 통해 입국한 예멘 난민 B씨가 일하는 모습. B씨 제공.

2018년 제주도를 통해 입국한 예멘 난민 B씨가 일하는 모습. B씨 제공.

이들과 달리 비교적 최근 한국에 도착한 예멘 난민신청자들은 대부분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2018년 제주도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B씨(26)는 경기 시흥 한 공장에서 기계조립과 설치 등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하루 8시간 일하면서 최저임금을 받는다. 그는 지난 25일 “인도적체류자 신분 갱신이나 새로 일할 때마다 내야 하는 재취업 허가 수수료가 가장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B씨보다 한 해 일찍 한국에 도착한 나세르(35)도 매번 출입국사무소를 오가는 게 고역이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다. 대학 다닐 때 반정부 시위를 하다 감옥에 갔고 이후 예멘으로 송환됐다. 예멘에서는 후티 반군 휘하에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도주해 한국에 왔다.

그는 “법원에서는 제대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통역관도 없었다”며 “난민 신청이 불허됐고 이후 재신청도 떨어져 행정소송을 했지만 변호사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항소 기회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일거리를 찾아 전국을 전전하고 있다. 나세르는 전까지는 3개월마다 출입국사무소를 방문해 체류 기간 연장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지난 25일 수원 출입국·외국인청은 체류 기간 연장에 대해 묻는 그에게 “난민 재신청밖에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 그는 다음날 다시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 난민 심사를 재신청했다. 다시 ‘난민신청자’ 신분이 된 그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향후 6개월 간 취업이 제한된다.

지난 25일 예멘 난민 나세르가 수원출입국·외국인청을 방문했다. 이홍근 기자.

지난 25일 예멘 난민 나세르가 수원출입국·외국인청을 방문했다. 이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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