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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한국사회에서 난민은 ‘성인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성 난민이 겪는 고통은 좀처럼 조명받지 못한다. 여성 난민은 난민 인정 절차에서, 한국 사회 정착 과정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데서 남성 난민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차별을 겪는다. 임신을 한 경우 의료보험을 적용받지 못해 건강권을 침해받고, 자녀는 학교 교육에서 소외돼 아이 돌봄에도 어려움이 크다.

30일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연보’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20년까지 1만6806명의 여성이 난민 신청을 했지만 453명만 난민 인정을 받았다. 여성이 처음 난민 인정을 받은 건 첫 남성 인정자가 나온 지 2년 뒤인 2003년이었다.

이집트 출신 난민인 모나 무하마드와 그의 가족이 26일 경기 동두천시 자택에서 난민 여성으로서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인터뷰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이집트 출신 난민인 모나 무하마드와 그의 가족이 26일 경기 동두천시 자택에서 난민 여성으로서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인터뷰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여성 난민’에게 더 험난한 생존



여성 난민은 여성 인권, 종교의 자유, 반정부 운동 등 활동을 하다가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다. 아랍 국가 출신인 피비(27·가명)는 고국에서 여성 해방을 위해 싸웠다. 전통을 중시하는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나 14살에 조혼을 강요받은 그는 이혼을 당한 뒤 여성 운동에 투신했다. 피비는 갖은 폭력을 피해 도망친 여성들을 위해 보호소도 만들었다. 두 차례 감옥에 다녀온 피비는 22살이 된 2016년 홀로 한국에 왔다. 피비가 입국해 난민을 인정받는 데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모나 무하마드(33)는 이집트에서 반정부 운동을 하다 난민이 됐다. 그는 가족과 함께 현지에서 기독교 옹호 활동을 벌였다. 시민단체 ‘이집트의 빛’ 활동을 한 것도 정부의 눈밖에 난 이유 중 하나였다. 이 단체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2016년 구금된 모나는 이듬해 한국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오빠가 살해당했고, 아버지와 언니는 체포됐다. 그럼에도 모나는 아직 국내에서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한국은 (이집트에 비해) 남성과 여성의 지위에 대해 ‘오픈 마인드’이고,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다고 들었지만 내겐 적용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역시 이집트에서 온 사라 무삽(27)은 미디어 활동가였다. 사라는 페미니스트 단체에서 활동하며 각종 여성 관련 영상물을 제작했다. 그는 법무부의 난민 심사 인터뷰 조작 사건의 피해자였다. 당시 아랍권 국가 출신 난민들 진술이 대거 조작된 사실을 국내 난민단체들이 폭로했고, 사라도 재심사를 받게 됐다. 그는 “첫 심사는 20분 만에 끝났는데, 두 번째 심사는 9시간이 걸렸다. 사건이 논란이 되니 괜찮은 통역사가 붙는 등 절차가 조심스럽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성폭력이나 할례, 강제결혼 등 여성 고유의 인권침해 문제로 난민 신청을 한 경우 인정 가능성이 더 희박해진다. 송효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심층면접 후 작성한 ‘한국에서의 난민 여성의 삶과 인권’ 논문에 따르면 면접 대상자 21명 중 ‘젠더 박해’를 주장한 이들은 모두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다. 김영아 아시아평화를향한이주(MAP) 대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입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가정폭력이나 할례 등의 위험에 노출됐지만 가족, 지역사회, 경찰, 국가 등이 여성을 보호해주지 않아 경찰 신고 기록조차 없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 출신 난민 사라가 25일 서울 문래동 이주민방송 사무실에서 난민 여성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이집트 출신 난민 사라가 25일 서울 문래동 이주민방송 사무실에서 난민 여성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직장 내 성폭력 당해도 구조 어려워



외국인에게는 주로 육체노동을 소개하다보니 남성에게 일감이 몰린다. 피비는 “남자들은 택배, 나무, 철강, 유리 공장 같은 곳으로 간다. 고된 일이지만 여자들은 이마저도 구하기 어렵다”며 “외국인에게 직업을 소개해주는 브로커가 있는데, 남자에게 10개의 직업을 연결해줄 때 여자에게는 1개를 연결해준다”고 말했다. 같은 일을 해도 다른 임금이 쥐어진다. 사라의 남편 다위시 무삽(28)은 ”외국인 남성과 여성 사이에도 임금격차가 존재한다”며 “사라와 함께 택배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나는 일당 10만원을 받았고 사라는 8만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피비 역시 택배 회사, 배추 농장 등에서 남성 난민과 같은 일을 하고도 1~2만원씩 일당을 적게 받았다. 11명의 남성과 함께 일한 닭고기 가공 공장에서도 혼자만 월급 봉투 두께가 달랐다.

여성 난민은 직장 내 성폭력에 자주 노출되지만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피비는 경기 안산시에 있는 한 철강 공장 사장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피비는 “당시 ‘난민신청자(G1) 비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향후 난민 비자 취득에 문제가 생길까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청소 일을 할 때 매니저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남편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다.

의료보험 없어 임신·육아 사각지대


여성 난민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생명을 위협받는다. 그나마 난민 인정자와 인도적 체류자는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난민 신청자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난민 신청자인 모나는 2년 전 둘째를 임신했을 때 비용이 부담돼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다.

이집트 출신 난민인 모나 무하마드와 가족의 외국인 등록증 , 여성 난민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생명을 위협받는다. 그나마 난민 인정자와 인도적 체류자는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난민 신청자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권도현 기자

이집트 출신 난민인 모나 무하마드와 가족의 외국인 등록증 , 여성 난민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생명을 위협받는다. 그나마 난민 인정자와 인도적 체류자는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난민 신청자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권도현 기자

임신 7개월차에 교회에 다니는 지인들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갔지만 결국 아이를 유산했다. 한국에 왔을 때 이미 아이를 가진 상태였던 사라 역시 병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지 못했다. G1 비자로는 출산할 병원을 찾을 수 없다는 안내를 받기도 했다. 시민단체 도움으로 출산을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공포감은 가시지 않았다. 자신과 아이의 건강 상태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출산 후에도 걱정은 이어진다. 모나는 혹시라도 아이가 병에 걸릴까봐 마음을 졸인다. 아이 역시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상태다. 아이의 외국인등록증은 출생 후 4개월가량 지나서 발급돼 아직 이렇다할 필수 예방접종도 받지 못했다. 그는 “진찰만 받아도 2만~2만5000원 정도 병원비가 나오는데 치료는 꿈도 꾸기 어렵다”고 했다.

매 단계마다 높은 ‘돌봄 지원’ 문턱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정부의 돌봄 지원도 전무하다. 난민 신청자인 모나는 시민단체 지원을 받아 첫째를 유치원에 보냈지만 둘째까지 도움을 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난민 인정을 받더라도 교육비를 지원받기가 수월치 않다. 사라는 딸을 유치원에 보냈지만 난민 인정자 자녀의 유치원 등록비를 정부가 지원한다는 사실을 보육기관이 몰라 어려움을을 겪었다. 남편 다위시는 “처음에는 유치원비를 내야한다고 해서 난민 아이들은 안 내도 된다고 설명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매 단계마다 변호사를 대동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라의 딸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무국적자다. 한국인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위시는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믿고 있고 친구들과 선생님도 (다른 한국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주는데, 나중에 자신이 국적이 없는 사람이고 한국이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걸 알게되면 어떨지…”라고 말했다. 사라 역시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나중에 취업을 할 때 이력서에 무국적자임이 드러나면 안 좋게 보일 것 같다”고 말했다.

난민 인정 못 받으면 전무한 교육 혜택


난민 신청을 거부당한 아이들은 미등록체류자가 된다. 각각 2살과 4살 때 반정부 운동을 한 부모를 따라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에 온 달리아(20·가명)와 카림(22·가명) 남매의 경우가 그렇다. 부모가 반정부 인사여도 자녀들까지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는 증거가 없다며 신청을 거부당했다. 두 사람은 휴대전화는 지인 명의로 된 것을 쓰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가입도 못한다. 신분증이 필요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다. 카림은 건설현장에서 일당을 받아 생계를 꾸리고 있다. 겨울에는 일이 적어 여름과 가을에 쉴 새 없이 일한다. 포크레인 운전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자격시험조차 칠 수 없어 일용직으로만 일한다.

카림은 학창 시절 역사와 국어에 흥미가 많았다. 친구들은 그에게 역사 선생님이 되라고 권했다. 한때는 작가가 되고 싶어 국어를 전공하려고도 했다. ‘요즘도 글을 쓰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일을 하다 밤에 오니까 피곤해서 자느라 글도 쓰지 못한다. 이번달에는 이틀 쉬었다”고 했다. 달리아도 공부를 잘했다. 그는 “역사는 맨날 1등급이었고 국어도 학교 1등이었다. 선생님들이 ‘너는 외국인인데도 1등이네’ 이러셨다”며 “시인 중에 백석을 가장 좋아하고, 글쓰기 대회에 항상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학업에 흥미가 떨어졌다. 미등록체류자 신분으로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올해 스무살이 된 달리아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지 못했다. 친구들은 달리아가 미등록체류자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달리아는 “동네가 좁아서 오빠가 대학에 안 간 걸 사람들이 다 안다. 저까지 안 갔다고 하면 이상하게 볼 것 같다”며 “아무리 친구들이지만 내가 ‘불법’이라는 걸 알면 부정적으로 보고 다르게 생각할까봐 차마 말을 못했다”고 말했다.


김혜리 기자harry@khan.kr
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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