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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충남 당진에선 폭우로 농수로 물이 넘치면서 농부 김모씨의 허브 농장을 덮쳤다. 수확할 예정이던 허브와 꽃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김씨의 허브와 꽃을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농사펀드’의 대표가 소비자 회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올해 많은 준비를 했던 청년 농부인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적립금(포인트)을 모아 농부에게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 봤습니다. 1000원 단위로 적립금을 기부해 주시면 농부에게 전달해 피해 복구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규회원에게도 저희가 1000원씩 적립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많이 응원해주세요.” 5일 만에 338명의 회원이 적립금에 현금까지 더해 총 140여 만 원을 기부했다.

지난 4월에는 경남 합천에서 유기농 딸기 농사를 짓는 권모씨의 농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대형 유통업체가 “딸기 당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농부는 “인위적으로 당도를 높이는 당도향상제(호르몬제의 일종)를 쓰는 건 원칙에 어긋난다”며 거부했다. 딸기 수확량이 가장 많은 시기에, 상당 물량을 책임지기로 했던 유통업체가 ‘납품 중지’를 선언하면서 권씨가 큰 손해를 보게 됐다. 농부의 또다른 거래처인 농사펀드는 상황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농장과 저희가 같이 딸기 판매를 하고자 한다”며 13% 할인된 가격으로 팔았다. 농사펀드는 홈페이지에 ‘농가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 공지를 띄우기도 한다. 작은 유통업체와 소비자 회원들이 그렇게 십시일반으로 농가를 응원한다.

농사펀드 박종범 대표 | 농사펀드 제공

농사펀드 박종범 대표 | 농사펀드 제공

농사펀드는 농산물 유통회사에서 일했던 박종범 대표(41)가 2014년 설립한 ‘농산물 온라인 쇼핑몰’이다. 당일 주문해서 다음 날 받아보는 일반적인 쇼핑몰과 달리, 농사펀드의 소비자 회원들은 농사 전이나 수확 전 단계에서 미리 농산물을 구매하고, 수확기에 자신이 구매한 농산물을 받는다. 농부들은 수확기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수입이 생기고, 가격 폭락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창업 전에 농산물 유통 일을 하면서 농부들을 만났는데 규모가 작은 농가들은 영농자금이 부족해 힘들어하고,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도 현금이 수중에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수확하고 나서 농산물을 팔려고 해도 보관하기 어려운 농산물의 경우, 가격 협상력에 있어 농부가 항상 을의 위치에 있게 되더라고요. 돈이 흐르는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제품이 만들어지기 전에 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 펀딩’ 방식을 농사에 적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업 7년 차인 올해 소비자 회원은 3만1700명, 매달 한 차례 이상 농산물을 구입하는 이들이 30%에 달한다.

농사펀드에서 진행한 모내기 체험 | 농사펀드 제공

농사펀드에서 진행한 모내기 체험 | 농사펀드 제공

현재 농사펀드와 거래 중인 생산자 회원(농가)은 100여 가구다. 농사펀드가 지역 농부들의추천을 받아 선별한 농가들이다. ①농가가 선택한 농산물의 품종, ②농장의 자연조건과 환경, ③농부의 재배 기술 등을 평가한단다. 예컨대 유기농 딸기를 생산하는 합천 농부 권씨는 단단한 과육과 진한 향, 새콤달콤한 맛이 특징인 ‘레드펄(육보)’ 딸기로 농사를 짓는다. 많은 농가들이 딸기를 땅에 심지 않고 양액(식물 생육에 필요한 필수 원소가 들어간 배양액)을 이용해 수경 재배를 하는데, 권씨네 농장은 ‘땅속 유기물과 미량 원소가 중요하다’는 신념에 따라 땅에서 딸기를 키운다. 또 진딧물을 잡기 위해 진딧물의 천적 진디벌을 이용한다.

“세 가지 기준을 조합해 보면 ‘이런 농부라면, 농사가 잘 안되는 해가 있더라도 꾸준히 발전할 수 있겠다’ 확신이 들어요. 이후에는 현장을 방문해 ‘농부의 습관’을 살피죠. 저는 농가에 가면 꼭 농장의 화장실을 사용해요. 창고가 어떤 식으로 정리돼 있는지도 살펴보고요. 농부가 말로 하는 설명보다 더 많은 것들이 그 안에 있거든요. 습관이나 행동들이 그 공간에 쌓여 있죠.”

충남 부여의 다랑논에서 삼광벼를 키우는 조관희 농부(오른쪽)와 농사펀드 박종범 대표. 조관희 농부는 농사펀드의 시작부터 함께 한 '1호 농부'다. | 농사펀드 제공

충남 부여의 다랑논에서 삼광벼를 키우는 조관희 농부(오른쪽)와 농사펀드 박종범 대표. 조관희 농부는 농사펀드의 시작부터 함께 한 '1호 농부'다. | 농사펀드 제공

농산물 가격을 결정하는 방법도 독특하다. 그는 “시장 가격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농부가 이 농사를 내년에도 지으려면 평당 얼마의 매출이 생겨야 하는지 농부와 상의해서, 농부가 희망하는 가격에 농사펀드 운영 수수료를 붙여 그해 농산물의 최종 소비자 가격을 결정한다”고 했다. 결정된 가격은 그해 농사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농산물 가격이 산지에서 폭등 하더라도 농부는 저희와 약속한 가격만 받으시고, 폭락 하더라도 저희는 약속한 가격을 그대로 드려요. 시장에 맡기면 예측이 불가능하잖아요. 하지만 저희와 함께 하는 농부님들은 올해 얼마의 수익이 생길지, 내년 수익은 어떨지 예측이 가능하죠.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서로 간에 신뢰가 쌓이게 되고요.”

제주의 농부가 재배한 유기농 풋귤로 담근 풋귤청 | 농사펀드 제공

제주의 농부가 재배한 유기농 풋귤로 담근 풋귤청 | 농사펀드 제공

올해 농사펀드는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고 있다. 충남 당진에서는 지자체와 함께 ‘로컬 에디터 육성 사업’을 벌인다. 로컬 에디터란 지역의 농민들과 이들의 농산물을 소개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분야 창업을 준비 중인 세 명의 청년들이 당진에 머물며 로컬 에디터 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이 전하는 지역 농부들의 이야기는 농사펀드 홈페이지 등에 실린다. 이외에도 경남 거창의 젤라또 가게와 협업해 농가가 생산한 제철 농산물로 매달 다른 젤라또를 만드는 ‘월간 젤라또’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는 청년 농부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도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시작했다.

창업 7년 차 대표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농사펀드는 수익적인 측면에서 안정적이에요. 조직 규모를 좀 줄였고 내실 있게 운영하면서 매달 수익도 나고 재투자도 하고 있어요. 아이와 함께 놀아줄 여유도 있고요. 지금의 행복을 깨고 싶진 않거든요. 그런데 처음에 제가 구상했던 농사펀드의 규모나 사회적인 임팩트(영향)은 이것보다 더 컸어요. 농협이 경쟁상대로 느낄 정도의 서비스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규모를 좀 키우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이대로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계속 갈등하고 있어요.”

그에게 ‘침수 피해를 입은 농가를 돕는 일에 왜 작은 유통업체가 나서냐’고도 물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이 일이 좋거든요. 나이들 때까지 농사펀드 일을 계속 하고 싶은데 그럴려면 농부님들이 잘 살아야 하니까…. 농부님이 어려움을 이겨내는데는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나도 당신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있어요. 당신이 힘을 좀 냈으면 좋겠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농사펀드의 소비자 회원들은 그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마음들을 모아 전달하는 거예요. 별다른 건 없어요.”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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