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 그린피스 50주년

김태훈 기자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후위기 대응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 그린피스  제공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후위기 대응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 그린피스 제공

1985년 7월 1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에 정박해 있던 ‘레인보우 워리어’호에서 두차례 폭발이 일어났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 소속 환경감시선인 이 배는 곧 침몰했고, 승선해 있던 사진작가 페르난도 페레이라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이 배는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을 태우고 태평양을 돌며 반핵 캠페인을 벌이다 뉴질랜드까지 온 터였다. 미국의 핵실험을 피해 롱겔라프섬으로 이주해온 북태평양 마셜제도의 사람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으로,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인 키리바시와 바누아투에선 일본이 핵폐기물을 마리아나해구에 버리는 것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뉴질랜드에는 프랑스가 폴리네시아에 있는 자국령 섬에서 핵실험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이동하다 2주 동안 머물 예정이었다.

■프랑스 정보기관, 환경감시선 폭파

환경감시선이 폭파당해 가라앉아 활동가 한명이 목숨을 잃자 전 세계의 이목이 프랑스로 쏠렸다. 그린피스의 핵실험 반대 시위를 고깝게 보고 있던 프랑스 정부가 유력 용의선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프랑스 정부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결국 자국의 정보기관 공작원들이 잠수함을 통해 수중으로 레인보우 워리어호까지 접근한 뒤 선체 옆에 폭탄을 붙이고 터뜨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경운동가 한명이 목숨을 희생한 대가는 작지 않았다. 결국 그린피스와 그들의 활동에 동조한 세계 각국 시민의 지지로 태평양에서는 더 이상 핵실험이 벌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올해로 창설 50주년을 맞는 그린피스의 역사는 수시로 자행된 위협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시민의 힘으로 이어져 왔다. 1971년 미국 알래스카 서부에 있는 암치카섬에서 벌어질 예정이던 미국의 핵실험을 막기 위해 시민 18명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작은 낚싯배를 타고 출발했다. 암치카섬은 바다수달과 흰머리 독수리를 비롯한 멸종위기의 동물들의 서식지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 해군 함정에 가로막혀 밴쿠버로 되돌아와야 했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세계로 알려졌다. 결국 미국은 국제 여론의 압박을 받아 암치카섬 핵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밝힌다.

그린피스는 초기에는 핵실험 반대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점차 해안 기름 유출, 방사능 폐기물 해양 투기와 같은 환경 위협을 방지하는 쪽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특히 바다를 주활동영역으로 삼으면서 고래 포획 반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선 모습은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작살을 쏘아대는 포경선에 맞서면서도 ‘비폭력 직접행동’ 원칙을 지키며 물러서지 않은 모습 때문에 강경하고 전투적이라는 인상도 생겼다.

하지만 실제 그린피스 내부에서는 전략적인 고려를 거쳐 행동의 수위를 결정한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원칙은 지키면서도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면 일부 실정법에 저촉되는 행위도 감수한다. 장다울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정책전문위원은 “캠페인의 목적을 위해 어쩌다 불가피하게 법적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벌금 혹은 기소유예로 끝날 가벼운 위법 수준에 그치도록 법무팀 소속 변호사가 미리 전문적인 분석을 한 뒤 실행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준비와 집중력을 발휘한 캠페인 및 직접행동 전략은 그린피스가 전 세계에서 활동하면서도 단일한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서 온다. 세계적인 환경단체 3곳 중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과 세계자연기금(WWF)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연합을 통해 각국 단체의 자율적인 활동을 용인하는 점과 비교된다. 단일 단체로서 지향하는 장기적인 활동 방향은 수년에 걸쳐 그린피스의 회원과 후원자, 직원 등 내외부의 논의를 통해 결정된다. 지금은 기후위기에 대처하고 생물다양성 손실을 방지하는 데 최우선순위를 두기로 결의된 상태다. 일단 결정되고 나면 일사불란하게 추진해 효율적으로 결과를 이끌어낸다.

■합법적 로비와 협상도 활용

한국에선 2011년 서울사무소가 문을 열어 올해로 10년을 맞는다. 서울사무소 개설 이전 한국에선 1993년 러시아가 방사능 폐기물을 동해의 공해상에 무단으로 투기하던 것을 그린피스가 감시하고 나서며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당시 소련 해체 이후 국가체제가 불안정하던 상황에서 자국의 함대를 동원해 폐기물을 투기했다. 이후 2011년에는 서울사무소 개소 전 그린피스의 환경감시선이 원전 반대 캠페인으로 미운털이 박혀 국내 입국이 불허되는 등의 곡절도 겪은 바 있다. 장 전문위원은 “그린피스는 절대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지만 한국 정부와 경찰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지 모르던 당시에는 오해를 많이 받기도 했다”며 “당시 그린피스 배가 고리 원전으로 접근해 해상시위를 할 때 해경이 중화기로 무장하고 쫓아오며 위협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 그린피스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정부와 입법부, 기업들을 대상으로 합법적인 로비와 협상을 하는 것을 주요한 전술로 활용할 정도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활동에 필요한 재원을 전액 회원들의 후원으로만 충당하기 때문에 독립성이 보장돼 특정 기업이나 재단, 정치세력과 손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생물다양성과 기후참정권, 탈원전, 해양보호, 재생에너지 전환 등 환경문제가 결부된 정책과 산업 영역이 갈수록 광범위해지고 있는 현실 역시 한몫했다. 정상훈 캠페이너는 “그린피스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모토가 있어 어떤 기업집단이든 정부든 환경문제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나선다면 파트너가 될 수 있다”며 “실용적인 차원에서 어느 진영에도 열린 자세로 소통을 하려는 태도를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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