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스트레스’로 빠르게 고사하는 전국의 침엽수들

김한솔 기자
설악산 대청봉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푸른 나무들 사이로 하얗게 고사한 나무들이 서 있다. 녹색연합 제공

설악산 대청봉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푸른 나무들 사이로 하얗게 고사한 나무들이 서 있다. 녹색연합 제공

언뜻 보면 초록으로만 뒤덮여 있는 것 같은 한여름의 설악산 대청봉 정상. 드론을 띄워 살펴봤더니 초록 나무들 사이 군데군데 길고 새하얀 막대기들이 꽂혀있다. 오대산 상왕봉, 지리산 천왕봉 등의 상황도 비슷하다. 빽빽하게 자란 초록 나무들 사이로 꽤 많은 수의 흰색과 회색 막대기들이 눈에 띈다. 이 막대기들은 ‘기후 스트레스’로 제자리에 선 채 잎이 모두 떨어지고 하얗게 색이 변해 죽은 아고산대 침엽수들이다.

녹색연합은 13일 설악산, 지리산, 소백산 등 전국 7곳 국립공원의 아고산대 침엽수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녹색연합은 올해 조사에서 백두대간과 국립공원 아고산대에 서식하는 침엽수들의 고사 속도가 예년에 비해 눈에 띄게 빨라졌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갈수록 높아지는 기온과 겨울철 적게 내리는 눈으로 인한 수분 부족 등 기후변화가 원인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집단 고사가 관찰된 구상나무들. 녹색연합 제공

지리산 천왕봉에서 집단 고사가 관찰된 구상나무들. 녹색연합 제공

■지리산 구상나무 상황 가장 심각

침엽수의 주 서식지인 아고산대는 산에서 낮은 곳인 저산대와 높은 곳인 고산대 사이로, 해발 1500~2500m 정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번 아고산대 조사에서 각종 침엽수들의 고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고사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탐방로에서부터 쉽게 관찰됐다.

녹색연합은 지리산에 집단 서식하는 구상나무의 집단 고사 상황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관찰됐다고 밝혔다. 구상나무는 한국 고유종인 침엽수로, 지리산과 한라산에 가장 넓은 서식지를 가지고 있다.

덕유산 향적봉에서 고사 중인 분비나무들. 왼쪽의 나무는 아직 갈색이 조금 남아있고, 오른쪽의 나무는 완전히 하얗게 고사했다. 녹색연합 제공

덕유산 향적봉에서 고사 중인 분비나무들. 왼쪽의 나무는 아직 갈색이 조금 남아있고, 오른쪽의 나무는 완전히 하얗게 고사했다. 녹색연합 제공

녹색연합은 지리산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중산리 코스에서부터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쉽게 관찰됐고, 천왕봉과 일대의 구상나무들은 집단적으로 고사했다고 밝혔다. 1500m 지점 뿐 아니라 그보다 높은 1700~1900m 사이에도 집단 고사가 관찰됐다. 녹색연합은 “고사목은 과거에 죽은 것과 최근 죽은 것이 구분되는데, 올해 3~8월 모니터링 과정에서 최근까지도 고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며 “2020년을 정점으로 지리산 구상나무 고사가 심각해졌다”고 했다. 조사를 진행한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지리산 천왕봉 남사면, 중봉 북서사면, 하봉 남서사면 등 해발 1600~1900m 사이 구상나무 고사율은 80~90% 가량으로 관찰됐다”고 했다.

덕유산 향적봉 일대에서도 구상나무 고사가 관찰됐다. 녹색연합은 “향적봉부터 덕유 삼거리까지의 주능선 탐방로에서 관찰되는 구상나무는 대부분 죽어있거나, 기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덕유산은 해발 1600m 이상의 아고산대에서도 구상나무의 개체 수가 다른 곳보다 적은 특징도 보였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고사가 진행 중인 침엽수들. 잎의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설악산 대청봉에서 고사가 진행 중인 침엽수들. 잎의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나뭇잎들

완전히 고사한 나무들은 새하얗게 변하지만, 그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여러 신호를 보낸다. 건강한 침엽수의 잎은 모두 푸르지만, 고사 초기에는 나뭇잎은 일부가 밝은색으로 변한다. 고사 중기에는 잎이 햇볕에 탄 것처럼 붉은색이나 갈색으로 변하다 어느 순간 모두 떨어지며 나무가 고사한다. 태백산 정상 천제단을 중심으로 한 주능선에서 관찰되는 침엽수인 분비나무 잎은 이미 이렇게 색이 변해가고 있었다. 분비나무는 구상나무와 같은 전나무속으로 생태적 특성이 비슷하다. 녹색연합은 “태백산에서도 수관부의 가지와 잎이 멀쩡하고, 녹색의 푸른 잎을 유지하는 분비나무가 거의 없었다”며 “가지 끝 잎들이 갈색이나 붉은색으로 타들어가고 있고, 어린 나무들에서 같은 현상이 관찰됐다”고 밝혔다.

오대산 두로봉부터 비로봉까지의 주능선의 분비나무들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찰됐다. 녹색연합은 “오대산 주능선 1300m 위의 분비나무에서 이같은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키가 5~6m 이상 되는 것들은 거의 모두 기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관찰됐다”고 했다.

설악산 한계령부터 정상인 대청봉까지의 분비나무에서도 같은 현상이 다수 관찰됐고, 잎 갈변 등의 현상은 어린 개체들에서도 나타났다.

태백산에서 관찰된 분비나무의 갈변 상황. 붉은색과 갈색으로 잎의 색깔이 변하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태백산에서 관찰된 분비나무의 갈변 상황. 붉은색과 갈색으로 잎의 색깔이 변하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주목, 잣나무도 위기

이번 조사에서는 그동안 고사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진 않았던 주목과 잣나무도 기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주목은 기후변화 취약종이긴 했으나, 2019년까진 구상나무와 분비나무 등 다른 침엽수에 비해 뚜렷한 고사 징후가 나타나진 않았다. 하지만 올해 조사에서는 설악산부터 덕유산까지 주목의 잎 갈변 등 스트레스 징후가 쉽게 관찰됐다.

잣나무의 상황도 비슷하다. 서 전문위원은 “가평의 잣나무는 인공적으로 증식한 것이고, 한국 토종 잣나무는 해발 1000m 위에 산다”며 “설악산에 잣나무가 가장 많은 편인데, 대청봉까지의 주요 능선에서 대부분 고사됐거나 잎이 노랗게 변하는 등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고산대 침엽수 멸종단계 진입”

녹색연합은 이번 조사결과 “아고산대 침엽수는 본격적인 멸종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며 정부의 침엽수 고사 현황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녹색연합은 “백두대간 보호구역의 아고산대에 서식하는 침엽수에 대해 전수 모니터링, 고사목과 고사가 진행중인 나무들에 대한 공간정보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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