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으로 살아온 노인, 70년 만에 출생신고를 하다

류인하 기자
pixabay @Sabine van E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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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줄곧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것도 모른 채 ‘유령’으로 살아온 노인이 70년만에 출생신고를 했다. 이 과정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A씨는 1952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6살 무렵 남의 집 ‘식모’로 ‘보내졌다’. 식모살이를 하던 A씨는 주인 할머니의 폭언과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왔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 탓에 자신이 살던 곳을 기억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집 주변으로 강이 흘렀던 기억을 되살린 A씨는 강을 따라가며 고향집을 찾아냈다. 고향집에서 만난 A씨의 오빠는 A씨를 1956년생으로 주민등록 신고를 했다. 출생신고 없이 주민등록신고가 가능했던 이유는 현재도 확인할 수 없다.

A씨는 정규학교를 다니지 않고 식당일, 공장일을 하며 지낸 탓에 호적이나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을 일이 없었다. 더욱이 출생신고가 안 돼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해온 A씨는 65세가 될 무렵인 2017년 신장이 나빠져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 A씨는 처음으로 자신이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은 탓에 부분적인 의료지원밖에 받을 수 없었다. 지자체가 제공하는 주거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A씨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고시원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수술을 미뤘다. 출생신고 역시 여전히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 차례 수술 연기로 상태가 악화된 A씨는 지난 2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백인변호사단’의 이영임 변호사는 A씨의 출생신고가 시급하다고 보고 A씨의 친모와의 유전자검사를 의뢰했다. 또 가정법원에 출생확인신청을 했다. 이 과정에서도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어머니 B씨가 낳지도 않은 C, D씨가 A씨의 출생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B씨의 자녀로 등록돼 있었던 것이다. 전산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60여 년 전에는 흔하게 발생하던 일이었다. 심지어 C씨는 A씨와 동명이인이었다. 유전자 검사결과로 이미 A씨가 B씨의 친자로 확인됐어도 60여년 전에 잘못 작성된 호적등본 때문에 A씨가 B씨의 자녀로 출생신고되기까지는 풀어야할 숙제가 남아있었다.

pixabay @Inactive_account_ID_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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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소송이 필요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C·D씨를 설득해 유전자검사 협조를 얻고, 어머니 B씨를 상대로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유전적 부모·자식이 아님을 확인하는 소송)’를 제기하도록 했다. 4개월만에 친생자관계가 아니라는 확인판결을 받아낸 A씨는 올해 7월 20일에야 서울가정법원을 통해 출생확인을 받았다.

모든 게 잘 마무리될 것 같았지만 어머니 B씨가 도중에 돌아가시면서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관할 구청은 “출생신고 의무자인 어머니가 사망했기 때문에 신고의무자가 없어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면서 “가족관계등록부창설절차를 새로 진행해 출생신고를 하라”고 했다. 숨진 B씨가 A씨를 낳았고, 모녀관계라는 각종 결과 및 판결을 받아냈어도 신고의무자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출생신고를 거부당한 것이었다.

이영임 변호사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신고의무자가 기간 내에 신고를 하지 않아 자녀의 복리가 위태롭게 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검사 또는 지자체장이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고 돼 있지 않느냐”며 접수를 받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 역시 거부당했다. 해당 조항은 자녀가 미성년자인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구청의 답변 역시 동일했다. 그 근거는 구청 내부 지침이라고 했다. 내부지침은 비공개였다. 변호사의 계속된 항의에 구청은 “가정법원과 법원행정처에 질의해 답변이 오면 출생신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통보했다.

언제 답변이 올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변호사는 또다른 신고의무자인 검사에게 출생신고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이만흠 부장검사)는 9월 2일 강남구청에 직권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검찰에 신청서를 제출한 지 42일 만이었다. 구청은 검사의 출생신고로부터 8일이 지난 9월 10일에야 신고를 수리했다. “가정법원과 법원행정처의 답변을 받아야 한다”며 수리를 미룬 것이다. A씨는 9월 15일, 70년만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아들었다. 70년만의 출생신고로 A씨는 이제 수술 뿐만 아니라 수술 이후 각종 돌봄지원도 받을 수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A씨는 출생신고에 대한 국가기관의 인식 부족과 경직된 태도 때문에 출생신고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갖추고도 50일 이상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면서 “A씨와 같은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지자체장과 검사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줄 것과 출생신고와 관련한 전반적인 법제정비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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