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트럭’이 편의점…“학원·영화관 원정, 교통비부터 따져요”읽음

박채영 기자

생활필수시설 없어 ‘일상’도 버거운 농어촌 지역

[절반의 한국④]‘만물트럭’이 편의점…“학원·영화관 원정, 교통비부터 따져요”

경남 거창군 남상면의 임불리는 ‘6·25도 몰랐던’ 외진 산골이다. 지난달 1일 이곳에서 만난 김형도씨(58·가명)는 벌써 10년 넘게 1t짜리 ‘만물트럭(사진)’을 몰고 거창 산골 곳곳을 누비며 생필품 장사를 해왔다. 적재함에는 어묵, 계란, 간장, 식초, 건전지, 막걸리 등으로 빼곡하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에게는 두부 한 모도 마다않고 배달해준다. 다리가 불편해 시장은커녕 마을회관에도 걸음하기 힘든 임불마을 이씨 할머니(87)에겐 이틀에 한 번꼴로 다니는 만물트럭이 편의점이자 ‘로켓배송’이다.

주민들의 얼굴과 사는 곳을 훤히 꿰고 있다는 김씨는 ‘지방소멸’을 현장에서 지켜본 증인이다. 자식들은 마을을 떠나고, 남은 노인들도 세상을 떠나면서 빈집도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갑작스러운 부고로 못 받은 외상값은 부조한 셈 친다.

고령화가 심각한 농어촌 지역에서는 장을 보거나 미용실에 가는 정도의 일상도 버거운 일이다. 상점들은 읍이나 면 소재지에 몰려있고 문화 생활을 하려면 큰맘 먹고 도회지까지 가야 한다. 인구 감소로 교통편도 줄어드니 불편이 가중된다. 아이들은 뭘 하든 먼저 교통비부터 따져보는 게 습관이 됐다.

■놀러, 공부하러 ‘밖’으로 가는 10대들

매년 열리는 산삼축제가 좋다는 함양초 4학년 은규(10)는 영화관이 없는 게 아쉽다. 영화를 보려면 승용차로 30~40분 걸리는 거창까지 가야 한다. 함양은 극장이 없는 71개 시·군·구(2020년 조사) 중 하나다. 함양문화예술회관이 대구CGV와 협약을 맺어 매주 토요일 영화를 상영하지만 “팝콘도 콜라도 없어” 영 기분이 안 난다고 한다.

함양서 자라 거창서 고등학교를 유학 중인 김모양(16)과 최모양(16)은 학교 시험만 끝나면 진주나 대구로 놀러 간다. 거창(인구 6만1399명)은 함양보다는 크지만 대형서점이나 방탈출카페가 없기 때문이다.

김양은 평소엔 느끼지 못하다가도 공연을 보러 서울이나 부산에 다녀오면 격차를 실감한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지만 학원이 없어 독학 중이다. 문제는 교통비다.

버스비가 함양에서 진주까지는 왕복 1만2400원, 대구는 1만3600원이다. 용돈을 타 쓰는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최양은 “뭘 하든 교통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싫어서” 성인이 되면 도시로 나가고 싶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도시와 농어촌 주민 간의 정주여건 만족도를 조사(2020년)한 결과, 보건복지(-1.6)에 이어 만족도 편차(농어촌-도시)가 큰 것은 교육문화(-1.3)였다. 이어 정주기반(-1.0), 일자리(-0.9) 순이었다. 함양사회혁신가네트워크가 지난 4월 온라인 투표로 지역의제에 관한 의견을 물은 결과 청소년 문화공간 조성(26.5%)이 가장 많았다. 김찬두 대표는 인구쏠림 못지않게 ‘문화 쏠림’도 심각하다고 했다. “문화는 대표적인 시장 실패 분야입니다. 수도권에 주요 기업의 80%가 쏠려있다고 하지만 문화는 그 이상이에요. 함양에선 청소년들이 시간을 보낼 공간 자체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통·생활 인프라 부족의 만성화

“지겨워 죽겠어. 버스가 안 와서 우리도 짜증나. 택시를 타면 4만원이야. 늙은 할매가 4만원 주고 가겠어?”

거창과 덕유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경남 함양군. 함양 읍내에 5일장이 열린 9월7일 한씨 할머니(78)와 이씨 할머니(73)는 대합실에 앉아 오후 5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4시10분부터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이 몇분 간격으로 오가는 서울 도심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만 할머니들에게는 일상이다. 할머니들이 사는 서상면 상남리는 농어촌버스가 하루 6차례 다닌다. 큰 장이나 병원에 갈 때면 버스를 타야 하니 시간표를 줄줄 외우는 건 당연하다.

지겹다면서도 ‘버스가 부족하지 않냐’는 물음에 이씨 할머니는 “그만하면 됐지. 하루 6번 다녀도 손님이 없잖아”라고 답했다.

함양의 2019년 출생자는 163명으로 하루 평균 0.4명, 사망자는 477명으로 하루 평균 1.4명이었다. 하루에 한 명꼴로 인구가 줄어든 셈이다. 인구가 줄어 수지가 맞지 않으니 버스도, 시장도 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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