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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생식능력 제거’ 없는 성별 정정 첫 허가···“신체 손상 강제 요구 지나쳐”

오경민 기자
성소수자 부모 모임 회원이 지난 3월27일 ‘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성소수자 부모 모임 회원이 지난 3월27일 ‘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자궁적출술 등 ‘비가역적 생식능력 제거’가 성별 정정의 필수요건이 아니라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신체를 손상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인격권을 지나치게 제약한다는 취지다.

21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수원가정법원 가사항고2부(재판장 문홍주)는 지난 13일 트랜스젠더남성(출생시 여성으로 지정됐으나 스스로 남성으로 인식하는 사람) 박모씨(21)가 낸 성별 정정 신청을 허가했다. 재판부는 “자궁적출술과 같이 생식능력의 비가역적인 제거를 요구하는 것은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신체의 온전성을 손상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자기결정권과 인격권,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지나치게 제약한다”고 결정했다.

박씨는 중학교 3학년이던 2014년 무렵 스스로를 남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해 2018년부터 호르몬 요법을 시작했다. 이듬해 ‘성전환증’을 진단받고 유방절제술을 받았지만 생식능력을 제거하는 수술이나 남성 성기를 만드는 외부성기 형성 수술은 받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여성의 신체적 일부 요소를 지니고 있다며 박씨의 신청을 기각했다. 성전환을 위한 의료적 조치 중 남성화 호르몬 요법 치료, 양측 유방절제술을 받았으나 자궁·난소적출술은 받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항고심은 박씨가 다시 여성으로 성별을 정정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신청인은 지속적인 호르몬 치료로 인해 남성 수준의 성호르몬 수치와 2차 성징을 보이며 장기간 무월경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면서 “외모나 목소리 등이 남성화된 현재 모습에 대한 만족도가 과거 여성으로 지냈을 때보다 분명해 여성으로 재전환을 희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남성 성기를 갖추지 않아도 성별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정정할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은 2013년 나온 적이 있지만, 자궁·난소적출술을 통해 생식능력을 비가역적으로 제거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조건이 충족되면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정정할 수 있다고 법원이 결정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결정은 대법원의 ‘성전환자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사무처리지침)’ 개정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초 지침은 영구적인 생식능력 상실과 외부성기의 형성 수술을 성별 정정의 ‘허가기준 및 조사사항’으로 규정했는데, 이 부분이 지난해 2월부터 ‘참고사항’으로 바뀐 것이다. 법원에 의견서를 낸 이은실 순천향대 산부인과 교수는 “호르몬 투약만으로도 월경이 중지되고 여성호르몬이 남성 수준으로 억제돼 신체적·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궁적출술 등 수술을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경우가 있다”며 “트랜스젠더 의학 전공자 입장에서도 자궁적출술이 모든 트랜스젠더남성에게 필요한 수술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생식능력 제거 없이 성별 정정이 가능해져야 한다고 생각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자궁적출술 없이) 정정을 신청했다”면서 “최근까지도 병원에 가거나 은행을 방문하면 원치 않게 ‘커밍아웃’을 해야 했는데 더 이상 필요 없는 질문을 받지 않게 돼서 좋다”고 말했다. 대입 시험을 준비 중인 박씨는 “수능 이후까지 정정이 안 될 줄 알고 방송통신대학교나 사이버대학 진학을 준비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고 했다.

박씨를 대리한 백소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이번 결정은 트랜스젠더의 자기결정권, 인격권, 신체를 훼손당하지 아니할 권리를 인정하며, 현행 대법원의 지침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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