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쑥쑥 자라는 ‘우기’, 정원 가꾸기 ‘적기’라 생각했지만…읽음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원래는 큰 비가 내리기 전에 야외 콘크리트 작업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일정이 아슬아슬하게 우기와 겹치게 되었다. 날이 습하니까 확실히 시멘트가 굳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원래는 큰 비가 내리기 전에 야외 콘크리트 작업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일정이 아슬아슬하게 우기와 겹치게 되었다. 날이 습하니까 확실히 시멘트가 굳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발리는 우기에 접어들었다. 우기에는 식물이 잘 자란다. 아무 씨앗이나 먹다가 심어놓으면 쑥쑥 큰다. 올해 우기엔 제대로 정원을 가꿔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직 나는 정원이 없다. 집 공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기는 식물에는 좋지만 공사에는 나쁘다. 큰비가 내리기 전에 테라스와 수영장의 콘크리트 작업을 완료하려던 계획은 틀어져버렸다. 날이 습하니 시멘트가 잘 마르지 않는다. 인부들은 비 때문에 싸구려 목재로 만든 비계가 무너질까 걱정한다.

야외 콘크리트 작업이 지연된 건 뜻밖의 사건 때문이다. 작업반장이 인부들의 일주일치 임금을 들고 야반도주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산. 짐작건대 공사는 늘어지고 건축가는 나 몰라라 하고 임금은 신통찮으니 관두고 싶었던 것 아닐까.

건축가는 그가 도망치던 날 낌새를 채고 부두에 사람을 보냈으나 잡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다른 인부들은 하산이 복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전기공사를 위해 최근 투입된 기술자가 새로 반장 역할을 맡았다. 일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으나 새 작업반장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하산이 들고 튄 돈이라야 100만원 남짓이다. 당장은 큰돈일 수 있지만 장래에 그가 거둘 수도 있었던 성공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고작 그것 때문에 한창 건축 붐이 이는 누사프니다를 등지고 동료들을 배신하고 평판을 망쳐버린 하산이 딱했다. 그와 2년 동안 일한 건축가도 마찬가지라서 화를 내기보다 허탈해하는 쪽이었다.

여기 살면서 이런 황당한 이별을 자주 목격했다. 피고용인이 불만을 토로하고 해결책을 찾는 대신 사람 좋게 웃기만 하다가 야반도주를 해버리는 건 비일비재하고, 미리 그럴 작정으로 주변에 돈을 꾸거나 물건을 빼돌리는 사람도 많다. 이 작은 섬의 로컬들을 위한 일자리라는 게 대개 한시적이고 임금도 낮으므로 잘 교육받고 미래를 생각하며 커리어를 일구는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섬이 많고 고향을 떠나 일하는 풍습 때문에 그러고 도망가버리면 찾기도 어렵고, 당사자 입장에서는 소문이 나서 재취업이 안 될 염려도 없다. 불편한 대화를 회피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인도네시아 문화도 한 요인이다. 그 점에서 인도네시아와 한국이 비슷하다. 여기나 저기나 미안한 일이 생기면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는 대신 상황을 회피하거나 증발해버리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잃은 관계가 한국에서도 한 트럭이었다. 그리 이해를 하면서도 이번 경우는 섭섭했다.

날 습하니 시멘트 잘 마르지 않아
야외 콘트리트 작업은 닷새 지연
비 때문이 아니라 인부 도망간 탓
발리선 이런 황당한 이별 자주 목격

어쨌거나 이번 ‘우기’가 끝나기 전
정원에 꽃 심을 수 있기를 바랄 뿐

나는 하산이 성실하고 똑똑하고 진중한 사람이라 좋아했다. 일을 따내고 설계한 것은 프랑스인 건축가였으나 실무는 하산이 도맡아 했고 영어도 곧잘 했던 만큼 이런 식으로 몇 해 더 경력을 쌓으면 그 스스로 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나는 같은 값이면 로컬들에게 좋은 기회가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곳의 이민자들이 대개 같은 마음일 것이다. 발리를 처음 여행할 때는 식당, 호텔의 고용주와 손님이 죄다 서양인이고 서비스직 직원들만 로컬인 상황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화가 나기도 했다. 이것이 경제 식민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지만 성공 의지가 없는 사람을 타인이 도울 수는 없다. 저 프랑스 건축가가 누사프니다에서 단시간에 많은 일을 따낸 것은, 공사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런 사고로 인한 손실을 건설주에게 전가하지 않고 수습해줄 것이며 그 자신 야반도주할 우려가 없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산의 야반도주로 이 동네에 집을 짓는 이민자들이 로컬과 직거래하는 일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나는 여전히 똑똑하고 호감 가는 인상을 가진 하산이 크게 성공하여 100만원을 푼돈처럼 여기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그때가 되면 그도 자신이 무슨 한심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것이다.

발리에는 데포 방구난·에이스 하드웨어 등 여러 건재상이 있지만 시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물품에 따라 직영점이나 조그만 소매상이 더 싸기도 해서 뭐 하나라도 사려면 발품을 부지런히 팔아야 한다.

발리에는 데포 방구난·에이스 하드웨어 등 여러 건재상이 있지만 시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물품에 따라 직영점이나 조그만 소매상이 더 싸기도 해서 뭐 하나라도 사려면 발품을 부지런히 팔아야 한다.

하여간 그 일로 작업에 닷새 공백이 생겼다. 그 닷새는 총 공사 일정에 닷새보다 긴 차질을 불러올 것이다. 공사 기간이 길어진다는 건 마음이 흔들릴 기회가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집은 설계 단계에서 내벽 두께가 25㎝였다가 추후 20㎝로 변경되었다. 처음엔 벽이 두꺼워서 방 두 개 사이에 욕실을 넣을 공간이 안 나왔다. 차선을 택하고 보니 손님방에서 욕실까지의 동선이 복잡해졌다. 뒤늦게 내벽이 얇아지면서 욕실 위치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콘크리트 기둥이 절묘한 위치에 세워져서 문을 낼 자리가 없었다. 결국 포기는 했지만 공사장에 갈 때마다 ‘저기에 욕실이 있었어야 해’라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발리에서 새로 정원을 가꾸려면 우기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번 우기는 그냥 보내게 될 것 같다.

발리에서 새로 정원을 가꾸려면 우기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번 우기는 그냥 보내게 될 것 같다.

바닥 타일도 기껏 골라놓았다가 기간이 늘어지자 자꾸 다른 게 보인다. 누사프니다에는 타일이나 페인트를 살 곳이 없다. 발리를 오가며 틈틈이 재료를 확인하려니 품과 시간이 많이 든다. 인터넷으로 온갖 페인트와 바닥재를 찾아내 디자인 프로그램으로 조합을 해보고, 발리에 가서 자재상을 돌며 실물을 확인하고, 실망하고,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발리에 가서 자재상을 돌고…. 그 과정이 여러 주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도 허탕이군’ 생각하며 타일가게를 나오려는데 매장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주인이 같은 물건은 없지만 비슷한 것은 있다며 보여준 게 마침 그때껏 본 타일들보다 0 하나가 덜 붙는 가격이었다. 디자인도 무난했다. 타일을 정하고 나니 벽 색깔은 1분 만에 결정되었다. 언젠가 내 집을 가지면 하려던 색 조합이었다. 가격과 편의성을 따랐을 뿐인데 뜻밖에 소망이 달성되어버린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이 타일은 나의 운명!”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후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타일 주문도 미뤄졌고, 내 안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자라났다. 인터넷 알고리즘은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타일들을 부지런히 내 눈에 들이밀었다. 결국 발리에서 다른 샘플을 공수하고 반납하는 수선을 피운 끝에 운명의 타일로 돌아왔다.

공사업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축주다. 결과적으로 처음 설계에서 나 스스로는 스위치 한 개도 변경한 바 없으니 그들은 편하겠지만 나는 변덕스러운 내 마음과 싸우느라 바쁘다. 물론 우유부단한 사람은 우유부단한 대로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 결정은 가능한 한 미루되 일단 정한 것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수용하거나 재빨리 체념하는 것이다. ‘설마 이 집에서 여생을 다 보내겠어? 더 좋은 아이디어는 다음 집에서 실행하지 뭐.’ 요즘은 이렇게 나를 설득한다. 건축가에게 농담 반, 공사 지연에 대한 책망 반으로 이런 말도 한다.

“나한테 시간을 너무 많이 주지 말란 말이야. 뭘 자꾸 바꾸고 싶어지니까.”

건축가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공사를 하니 웃음이 많아지더라고 썼다. 헛웃음이다. 건축가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세상에 자기 집에 100%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미련도 후회도 남기지 않는 공사라는 게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건축주라 도망은 칠 수 없으니까 오늘도 나 자신과, 그리고 타인들과 타협을 해본다. 이번 우기가 끝나기 전에 꽃을 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른 삶]식물 쑥쑥 자라는 ‘우기’, 정원 가꾸기 ‘적기’라 생각했지만…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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