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피아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10월 20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지난 11일까지가 노벨상 시상식 주간이었습니다. 이젠 거듭된 “혹시 어쩌면....”에 이어지는 실망으로 인해 실망도 하지 않기로 약속한 듯 조용히 흘러갑니다.

언론사에선 통상 노벨상처럼 큰 시상식을 앞두고 미리 예상 후보가 상을 받게 됐을 때를 가정해 기사의 얼개를 작성해두곤 합니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이 되면 저는 각 부서를 돌며 어떤 사람들이 유력 후보로 점쳐지는지 엿보곤 하는데요. 올해에도 역시 이변은 없을 것으로 예상됐고 그 예상은 씁쓸하게도 어김없이 적중했습니다.

케이팝이 세계를 매혹하고,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세계를 휩쓴다는데 엄연한 ‘선진국’인 우리나라에서 여태 노벨상이 평화상 한번밖에 없다는 것이 착잡하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물론 제가 “자, 지옥에서 온 한국인들이여. 이번엔 노벨상 차례다. 노오력해서 노벨상을 쟁취하자”를 외치려고 이번 키워드를 노벨상으로 잡은 것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 반대일지도요.

이번엔 이그노벨상 창시자가 쓴 <이그노벨상 이야기>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창립자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등이 쓴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 사라 루이스의 <The rise> 등을 읽으며 지식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려고 합니다.

■개구리 공중부양 프로젝트

이그노벨상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노벨상과 반대로 지상 최고의 ‘바보’들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요? 이그노벨상은 1991년 처음 시작됐는데요. 창시자인 마크 에이브러햄스에 따르면 이그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은 “다시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하니 지상 최고의 바보를 선정하는 상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그런데 이 최고의 바보에게 주는 이그노벨상과 최고의 천재에게 수여되는 노벨상을 동시에 받은 단 한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이 굉장하고도 유일한 기록은 실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인 앙드레 가임Andre Geim입니다. 그는 개구리를 공중부양시키는 매력적인 연구를 통해 2000년에 이그노벨상을 받았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0년엔 그래핀 추출 성과를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사라 루이스는 훌륭한 사람들의 다소 독특한 성공 방식을 분석한 <The rise>라는 책에서 앙드레 가임과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그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안겨 준 그래핀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면, 그래핀은 통상 ‘신의 물질’이라고도 불립니다.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하고 강도가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하면서도 구부려도 전기적 성질을 잃지 않아 엄청난 활용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요.

2000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뒤 10년 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앙드레 가임

2000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뒤 10년 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앙드레 가임

이 완벽한 물질의 단 한가지 문제라면 이걸 써먹을 수 있도록 입자를 흑연에서 떼어내는 게 엄청나게 힘들어서 사실상 ‘그림의 떡’같은 존재였다는 것이죠. 수많은 학자들이 이 상상속의 물질을 추출하기 위해 고생하던 중 가임은 함께 노벨상을 받은 그의 동료 노보셀로프와 함께 그래핀을 스카치테이프를 활용해 분리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건 이들이 그래핀 연구에 있어선 완전히 아마추어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금요일밤의 실험(FNE)’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아마추어의 지혜를 갖고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가장 큰 모험은 당신이 전문가가 아닌 분야를 탐험하는 거죠. 때로 나는 ‘re-search’하지 않고, 오직 ‘search’만 한다고 농담하곤 해요.” 가임은 말했다[...]연필에서 스카치테이프로 흑연을 떼내려고 할 때 이 물리학자들은 이전에 전혀 탄소를 다뤄본 경험이 없었다. 팀원들은 그 분야에서 사용되는 말들을 익히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가임은 “해로운 영향을 미칠” 정도로 자료를 읽고 리서치를 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잃게될 정도로, 과하게 자료를 많이 읽지 않도록 조심했다. -Sarah Lewis, <The Rise>

사라 루이스에 따르면 가임의 연구실은 ‘금요일밤의 실험(FNE)’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과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 연구에 그저 아마추어로서 ‘재미’로 몰두합니다. 개구리를 허공에서 빙글 돌리는 만행(?)도 이 ‘금요일’의 산물이었죠. FNE 시스템은 역대 총 세번의 성공사례를 만들어냈는데 그중 첫번째가 이그노벨상을 탄 무중력 개구리 프로젝트고 두번째가 도마뱀 발바닥을 본뜬 테이프의 발명이었으며, 세번째가 노벨상을 수상한 그래핀의 추출이었습니다.

아마추어의 발견이 노벨상을 탄 대사건은 학계에서 ‘신데렐라 스토리’로 회자되기도 했는데요. 당시 그래핀의 물리적 성질을 밝혀내 유력한 수상자로 예상되던 김필립 교수의 연구실에서 그래핀을 연구하던 홍병희 서울대 화학과 교수는 가임-노보셀로프 팀의 수상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했습니다.

보통은 원자 한층이 눈으로 보인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쉽게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사실 HOPG나 mica같은 층상 물질을 스카치테이프로 떼어내는 것은 초전도나 표면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과 같은 일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과 노보셀로프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기존의 사고에 묶이지 않는 엉뚱함, 도전정신, 그리고 끈기일 것이다. -홍병희(2010). 그래핀 노벨상의 주역들. 「물리학과 첨단기술」. 12월호

가임에게 있어 이그노벨상 수상과 노벨상 수상은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었습니다. 앙드레 가임은 2010년 노벨상을 받고 난 뒤 인터뷰에서 “제 생각엔, 만약 누군가가 유머 감각이 없다면 그 사람은 대체로 좋은 과학자이기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런던의 청중들을 향해 짐짓 진지한 조언을 해서 폭소를 터뜨리게 하기도 했죠.“난 사람들에게 말하곤 하죠. 만약 노벨상을 받고 싶다면 먼저 이그노벨상을 받으라고.”

앙드레 가임과 함께 유명인사가 된 공중부양 개구리(왼쪽)와 개구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머그컵을 들고 있는 가임 박사. 출처 HFML, 맨체스터 대학 홈페이지

앙드레 가임과 함께 유명인사가 된 공중부양 개구리(왼쪽)와 개구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머그컵을 들고 있는 가임 박사. 출처 HFML, 맨체스터 대학 홈페이지

이 과학자는 실제로 자신의 이그노벨상 수상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1997년 그는 개구리를 허공에 띄우는 실험에 성공해 개구리와 함께 일약 스타가 되었는데요[??영상링크]. 주변 동료들은 그의 ‘유명세’를 걱정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 ‘진지하지 못한’ 학자로 여겨질까 우려했던 것이죠. 그런데 가임은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긴 커녕 이그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자 뛸 듯이 기뻐하며 네덜란드에서 직접 자비를 들여 하버드까지 날아와 수상소감을 남깁니다.

참고로 이그노벨상은 따로 상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겐 외려 수상 소식이 불쾌하게 다가갈 수도 있기 때문에(‘축하합니다! 선생님은 지상 최고의 바보에게 수여되는 상을 타게 되셨습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직접 상을 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여태 주인을 못 찾아간 채 떠도는 상들도 많을 정도니까요. 시상식에 직접 참여하는 것 자체가 수상자의 ‘대인배’적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이니, 앙드레 가임이 얼마나 이그노벨상에 진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돈키호테들

이그노벨상을 단순히 바보들의 상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이그노벨상의 탄생부터 수상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이그노벨상 이야기>는 읽기만해도 어이없고 신나는 모험으로 가득합니다.

알래스카 불곰과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친구’에게 얻어맞아도 안전할 수 있는 전신 갑주를 평생 개발해온 남자, 코코넛 나무 아래에서 잠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논문을 쓴 학자, 클릭 실수 몇번에 칠레 GDP의 0.5%를 날려먹은 직원, 평화적인 군사 훈련과 비용 절감을 위해 총탄 대신 ‘빵 소리’를 내게 한 영국 해군 등 다양합니다.

이그노벨상의 창시자 마크 에이브러햄스가 시상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왼쪽), 2017년 이그노벨상 시상식에서 테슬라 코일로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는 다니엘 데이비스. 황당무계 연구 연보 홈페이지

이그노벨상의 창시자 마크 에이브러햄스가 시상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왼쪽), 2017년 이그노벨상 시상식에서 테슬라 코일로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는 다니엘 데이비스. 황당무계 연구 연보 홈페이지

이그노벨상의 시초에 대한 설명부터 범상치 않았는데요. 하버드대 응용수학과를 졸업하고 컴퓨터 회사를 운영하던 에이브러햄스는 ‘재현할 수 없는 결과에 관한 저널’이란 과학 유머 잡지에 자신의 풍자 글을 실을 수 있겠냐고 문의했다가 갑자기 편집자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얼결에 편집자가 되어버립니다. 중요한 건 그가 이후 창간한 ‘황당무계 연구 연보’는 현재 매년 하버드대학에서 가장 위용넘치는 건물에서 1000여명 관객을 모셔두고 세상 최고의 바보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레터의 서두에서 이그노벨상의 수상 기준이 “다시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업적을 이룬 사람”이라고 했죠. 그런데 사실 이 상에는 숨겨진 비공식적인 수상 기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수상자가 이룬 업적은 반드시 바보같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우스워도 곰곰 생각해보면 어딘가 우리의 삶에 영감을 줄만한 연구나 시도들에게 이그노벨상이 수여된다는 것이죠.

코코넛의 위험성을 알리는 연구로 2001년 이그노벨상을 받은 피터 바스 박사(왼쪽), 자기방어를 위해 지독한 방귀를 낀 소년 환자에 대한 연구로 1998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마라 시돌리의 논문. 황당무계연구 연보 홈페이지

코코넛의 위험성을 알리는 연구로 2001년 이그노벨상을 받은 피터 바스 박사(왼쪽), 자기방어를 위해 지독한 방귀를 낀 소년 환자에 대한 연구로 1998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마라 시돌리의 논문. 황당무계연구 연보 홈페이지

한 예로 위에 언급한 ‘코코넛 나무 아래에서 잠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와 ‘자유낙하 코코넛으로 얻어맞는 것에 대한 최초의 물리적 고찰’을 실시한 캐나다 의사 피터 바스Peter Barss의 연구도 얼핏 보기엔 그냥 바보같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사실 그 지역의 사람들에 주목했기에 가능했던 연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파푸아뉴기니를 처음 방문했을 때 알로타우 지방 병원을 찾는 현지인들 가운데서 코코넛 낙하로 인한 부상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 비율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이외에도 ‘파푸아뉴기니 돼지로 인한 부상’ ‘열대 지방 콩알총으로 인한 호흡 곤란’ ‘오세아니아 바늘 고기에 의한 관통상’ 등의 그 지역만의 특수 상해 사례들에 대한 논문들을 발표합니다. 그의 연구는 일반적인 의학교과서가 싣지 않는 수많은 상해를 분석해 현지인들의 치료에 기여했습니다.

마라 시돌리 박사는 곤경에 처했다고 느낄 때마다 지독한 방귀를 뀌어 자신을 방어하는 정서장애 소년에 대한 논문으로 1998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는데요. 그는 장장 2년동안 나아질 기미 없이 심각해지기만하는 소년의 상태에 좌절하던 중 한가지 묘수를 생각해냅니다. 같이 방귀 소리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책에 인용된 그의 논문 중 한대목을 인용해봅니다.

처음에 피터는 나의 행동에 적잖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놀란 피터는 곧 짜증을 냈고 내가 계속해서 시끄러운 방귀 소리를 내자 화를 냈다. 나를 보고 미친 거 아니냐며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피터는 나를 한동안 계속 쳐다보더니 가슴 깊은 곳에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터는 이후 완전히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이그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그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정신과 환자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들을 치료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뛰어난 필력과 유려한 문체로 풀어내는 자신을 대견해했”습니다. 세계적인 융 아동 심리학자로 유명했던 시돌리 박사는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바로 그해 미국 정신분석학협회 회장이 되었죠.

물론 때로 ‘바보같음’과 ‘의미’의 저울에서 ‘바보같음’쪽으로 기운 수상들도 많습니다. 닭을 비롯한 복숭아 등의 생물이 핵융합을 한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치밀하게 논증해낸(“생물학적 변환은 그냥 일어난다”) 연금술 추종자 루이 케르브랑과 이슬만 먹고 사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단식 실험 3일만에 병원에 실려간 야스무힌 등이 그 예죠.

미국 앨라배마주 남부 침례교회는 지옥에 가게 될 앨라배마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186만명에 이른다고 구체적으로 계산해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는데요. 수상소감은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헬(Hell)의 기차역장과 보스턴 주재 노르웨이 영사가 대신했습니다.

“저희는 위대한 앨라배마주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헬에 오실거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헬에서는 여러분 모두를 위해 특별한 장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연구를 위한 연구소

이그노벨상의 쓸모없는 열정은 삶에 어느정도 숨통을 트이게 해줍니다. 다만 이런 자유로운 상상력들을 모아 하나의 이벤트를 넘어선 ‘시스템화’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즐거운 연구들을 할 수 있게 되겠죠. 정말로 이런 시도를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쓸모없는 연구를 위한’ 연구소인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를 설립한 에이브러햄 플렉스너가 그 주인공입니다.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와 그의 철학에 대한 책입니다. ‘쓸모없는 연구를 위한’ 연구소라고 하니 어떤 곳인지 잘 감이 잡히지 않으시죠? 이그노벨상 시상식 같은 뻑적지근 한 분위기라고 상상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쓸모없는 연구를 위한 연구소라고 하기엔 이곳 출신 학자들의 면면이 너무 굉장합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쿠르트 괴델 등이 이곳 출신이고, 필즈상 수상 61명 중 42명이 이 연구소 소속이며, 역대 3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각 2014년, 2012년 기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정을 걷고 있는 쿠르트 괴델과 아인슈타인(왼쪽 사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건물 사진. ⓒLeonard Mccombe / 위키피디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정을 걷고 있는 쿠르트 괴델과 아인슈타인(왼쪽 사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건물 사진. ⓒLeonard Mccombe / 위키피디아

플렉스너가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즈는 1면에 부고 기사를 실어 “플렉스너는 그가 살던 시기의 어떤 미국인보다도 이 나라와 나아가 인류 일반의 복지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라고 그를 기릴 정도였습니다.

이 연구소는 플렉스너가 1930년에 기부자를 설득해 기초학문에 대한 연구소를 만들자고 설득해 만들어진 연구소입니다. 로버르트 데이크흐라프는 이곳에 대해 “학생도, 행정 의무도 없는 ‘학자들의 천국’으로, 학계 스타들이 일상 문제나 실용적인 응용과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채 깊은 생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장소”이자 “‘방해나 제약 없이 쓸모없는 지식 추구하기’라는 플렉스너의 상상이 구현된 장소”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군론group theory이라 알려진 이론은 추상적이며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수학 이론이다. 호기심 많은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시간을 보내다가 별난 길로 이끌린 결과, 군론이 발전했다. 군론은 오늘날 분광학 양자 이론의 기초가 되어 그것이 처음에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플렉스너는 쓸모없는 지식에 대해 굉장히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쓸모있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지식이 그저 ‘쓸모없는’ 지식의 성과를 영리하게 끌어다 쓴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한 예로 무선통신을 최초로 성공시킨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르케세 굴리엘모 마르코니를 단지 ‘영리한 발명가’로 지칭하며, 더 큰 공은 “현실과 동떨어진 난해한 계산을 한” 클러크 맥스웰과 전자기파의 검출 및 시연에 매진한 하인리히 헤르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헤르츠와 맥스웰은 “어떤 것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천재”였고, 마르코니는 “깊은 생각 없이 쓸모만 생각하는 영리한 발명가”였던 것이죠.

그는 책에서 연구소에서 1년을 보낸 수학자와의 대화 일부를 옮깁니다.

“수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당장 읽어야 할 논문만 해도 산더미죠. 제가 박사학위를 딴지 이제 10년이 지났습니다. 한동안은 제 연구 분야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고 모든 게 불확실해지더군요. 하지만 여기서 1년을 보내고 나니 마치 창문의 블라인드가 올라간 기분입니다. 방은 밝아졌고 창문은 열려있죠. 곧장 쓸 수 있는 논문 두편이 머릿속에 있습니다.” “그런 기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아마 5년이나 10년정도가 되겠지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여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쓸모없는’ 연구의 시간은 마치 자신의 안에 깊은 샘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구체적인 쓸모를 요구하는 정부 프로젝트 등에 시달리다보면 학자들은 자신을 잃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창의력을 소진하고 맙니다. 플렉스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결국 예상치 못한 쓸모로 바뀔 것이라거나 마침내 생겨난 실용적인 쓸모야말로 사실상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쓸모’라는 단어를 폐기하고 인간 정신이 자유를 누리게 하자고 간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분명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괴짜들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물론 귀중한 돈을 조금 낭비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들 마음속의 족쇄를 부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맺음말

존 트로이는 경악할 만하면서도 엄청나게 웃기는 방법으로 갑옷과 용기를 시험한다. 이 현대판 돈키호테,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도넛 가게에서부터 폭주족 술집과 신비로운 로키 산맥까지 이어진다. 운명적 만남을 위해서.-다큐멘터리 영화, <알래스카 불곰 프로젝트Project Grizzly> 소개 중

돈키호테는 행동이 앞서는 바보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그의 용감무쌍함과 호기심, 자신이 사랑하는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 등은 오랜 세월 동안 전세계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었죠.

다큐멘터리 영화 <알래스카 불곰 프로젝트>에서 트로이 허튜비스가 불곰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는 모습. 그는 알래스카불곰과 친구가 되기 위해 67kg짜리 갑옷 ‘우르수스 6호’를 제작하는데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98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 화면 갈무리

다큐멘터리 영화 <알래스카 불곰 프로젝트>에서 트로이 허튜비스가 불곰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는 모습. 그는 알래스카불곰과 친구가 되기 위해 67kg짜리 갑옷 ‘우르수스 6호’를 제작하는데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98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 화면 갈무리

한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사람들이라고들 하죠. 효율, 쓸모를 극단적으로 찾는 사람들입니다 -저 역시도 사실 쓸모없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은 덕질마저도 효율적으로 하기위해 예능도 1.5배속으로 보는 지옥의 코리안입니다. ‘선진국’이지만 매번 노벨상 수상식때마다 희망고문을 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인류를 한걸음 내딛게 하는 지식이란 내신 시험 준비하듯 벼락치기로 공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우리도 쓸모없는 것들에 조금 더 즐겁게 남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한껏 몰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저도 이를 위해 노벨상보다는 이그노벨상을 주제로 한 글을 써보았습니다.

“내가 무척 심오한 사상가였다거나 조숙한 사람으로 두각을 드러냈다고 여기지 말라. 나는 무척 활력 넘치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아라비안 나이트 속 이야기를 백과사전과 마찬가지로 쉽게 믿었다.” -패러데이 서간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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