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 미만 사업장에는 ‘우산’이 없다

김태훈 기자

갑질·괴롭힘 더 빈번하지만 노동법 적용 배제… 사각지대 악용 ‘위장 5인 미만’도 등장

5개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등으로 구성된 ‘5인미만 차별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10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계단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5개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등으로 구성된 ‘5인미만 차별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10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계단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직장인 A씨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한다. A씨가 다니는 사업장 본사의 고용 규모는 5인을 훌쩍 넘는다. 하지만 회사는 굳이 5인 미만의 사업장을 따로 만들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상당 부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용이 제외된 근로기준법은 지난 10월 14일부터 또 하나 늘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에 들어갔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역시 예외다.

A씨가 상사로부터 받는 괴롭힘은 정도가 심각하다. 그에게 “새벽에 죽여버리겠다는 전화를 하고, 나에 대한 왕따를 주도하면서 같이 식사를 할 때 인격 모독적 발언을 하는” 상사는 다름 아닌 사장의 배우자다. 이번에 바뀐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괴롭힘을 일삼은 A씨의 상사는 과태료 1000만원이 부과되는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A씨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한다. 다른 법규를 들어 그 상사에 대한 법적 대응을 할 수는 있지만, 남들처럼 직장 내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해 개정된 법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B씨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의 대표가 사적인 만남을 요구해 거절했더니 보복으로 다른 법인으로 전보되고 말았다. 본래 맡았던 업무와 관계없는 일을 담당하는데다 처음 해보는 일을 B씨 혼자 도맡게 됐다. 그는 “새로 온 사업장의 직원들도 나를 깎아내리고 매일같이 긁어대면서 본사에 안 좋게 얘기할 수도 있다고 협박까지 한다”며 “이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3개월 넘게 아무 말 하지 않고 근무 중인데 그중 한달 정도는 업무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근로기준법 제23조 1항에 따라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전보를 시킬 수 있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이 역시 예외다. 부당전보 구제신청도 막혀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도 열외

‘5인 미만’이라는 꼬리표가 치외법권에서 일하는 낙인처럼 돼버린 현실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다. 노동단체 직장갑질119는 지난해 9월부터 1년 동안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갑질 민원을 접수받아 최근 ‘5인 미만 갑질 보고서’를 펴냈다. 그간 지속적으로 5인 미만 사업장도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도록 법 개정에 온힘을 쏟아왔지만 새롭게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방지 조항조차도 또 다른 ‘그림의 떡’이 되고 만 것이다. 오진호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장은 “원칙적으로는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로기준법의 차별 조항을 없애려면 여야 합의를 거쳐 법 자체를 개정하는 게 좋지만, 현실적으로 야당의 반대가 우려됐다면 국무회의에서 시행령만 개정했어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며 “정부 역시 여전히 5인 미만 사업장 차별에 대한 개선 의지가 없다는 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5인 미만 사업장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남은 역사는 길다. 최근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뿐 아니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역시 적용되지 않는다.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상황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앞두고도 차별을 받는 것이다. 제한없이 아무런 사유도 없이 해고 가능하고, 주 근로시간(40시간) 및 연장근로시간 상한(12시간)을 정한 ‘주 52시간 상한제’와 무관하게 밤낮없이 부려먹을 수 있다는 점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렇게 길게 일해도 연장·야간·휴일근로 시 50% 가산되는 수당도 받지 못하며, 코로나19 핑계를 대며 회사가 일방적인 휴업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데도 휴업수당은 받지 못한다. 1954년 근로기준법 시행령이 제정될 당시 15인 미만 사업장을 예외로 하던 기준은 1975년 5인 미만으로 바뀌었다. 이후 5인 미만에 적용되는 예외규정이 일부 줄어들긴 했으나 1998년 이후 23년이 넘는 동안 5인 미만 사업장 차별을 보장하는 법의 골격은 바뀌지 않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전체 규모는 455만명(2018년 기준)으로 전체 노동자 중 28%를 차지한다. 4명 중 1명가량은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지만 임금수준도 낮다. 고용노동부의 ‘사업체노동력조사’(2020년 기준)를 보면 5인 미만 사업체 노동자의 전체 임금총액은 전체 노동자 임금총액의 66.3%에 그쳤다.

■“규모 따른 차별 세계적 추세 반해”

해외에서는 사업장의 규모에 따라 노동자의 처우와 권리 보장에 차별을 두는 제도를 찾기 힘들다. 독일에서 예외적으로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 유연성을 확보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상시 10인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에서만 ‘해고제한법’의 적용을 제한하지만 그밖의 다른 노동법에서는 사업장 규모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직장갑질119에서 활동하는 심준형 노무사는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시간과 휴일, 해고 등 모든 조항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고, 프랑스, 미국, 일본 등 해외 각국에서도 노동자 수를 기준으로 노동법 적용을 배제하는 입법례는 찾아볼 수 없다”며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동법 대부분의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근로기준법은 세계적 추세에 반하는 반인권법”이라고 말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거꾸로 보면 이들 사업장 사용자들에게는 특혜일 수 있다. 법의 사각지대는 법을 악용하는 형태로 이어진다. 실제로는 영세한 규모의 사업장이 아닌 ‘위장 5인 미만 사업장’이 만들어지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권리찾기유니온은 위장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가짜 사업장에 대한 고발을 계속해왔다. 이 결과 100여건의 고발 중 현재까지 60여곳의 진위가 드러났는데 단 2곳만이 관계당국으로부터 ‘혐의없음’으로 처리됐다. 나머지는 모두 사측이 5인 미만을 위장했음을 인정했거나 노동당국의 근로감독을 통해 사건이 종결됐다. 정진우 권리찾기유니온 사무총장은 “혐의없음으로 처리된 2곳 또한 해당 사업장 내 다른 직원들이 노동자임을 입증하기 어려웠던 현실적 한계 때문에 그런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5명을 넘지 않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 사업장에서 갑질과 괴롭힘 피해가 더욱 빈번하고, 그래서 오히려 이들 사업장에 대한 대책이 더욱 요구된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를 통해 확보한 ‘직장 내 괴롭힘 사건 연도별 처리현황’을 보면 전체 신고 건수 중 5인 미만 사업장 등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건수의 비율이 지난해는 41.2%, 올해는 8월까지 37.7%에 달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더욱 많이 벌어지지만 정작 감독 대상에선 제외돼 있다. 조미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이번 개정법은 5인 미만 사업장과 특수고용 노동자 등은 여전히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며 “정작 직장 내 괴롭힘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거나 심각한 사업장에선 관련 법이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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