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후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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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퇴근 후는 온전히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입니다. 일상에 지쳐 쉬는 방법을 잊은 당신에게, 경향신문 여성 기자들이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의 일상을 공유하는 [퇴근후, 만나요]를 연재합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영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모두모두 어서오세요.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저녁은 뭐 드셨어요?”

평일 밤 10시 즈음, 유튜브 피드에 ‘먹는 중’ 이미지가 뜨면 부리나케 클릭한다. 입짧은햇님, 그러니까 햇님 언니의 먹방 라이브가 시작됐다는 뜻이다. 늘 그렇듯 다정한 안부로 시작되는 방송. 채팅창은 불이 난다. 누구는 냉면을 먹었고, 누구는 돈까스를 먹었단다. 매번 1만명이 넘는 시청자가 접속한다. 채팅창 속 문장들은 초속으로 사라진다. 용기를 내 한 마디 적어보지만(김치볶음밥이요!), 언니의 시선이 채 닿기도 전에 무참히 떠내려간다.

'먹방같은 걸 왜 보냐'던 내가 침대에 누워 먹방을 보는 이유[플랫]

능숙하게 메뉴 소개가 이어진다. 먹방 메뉴는 그날그날 다르다. 햇님 맘대로. 떡볶이부터 곱창, 해산물이나 라면까지 대중 없지만 널찍한 상을 가득 채우는 엄청난 양이라는 점에선 늘 비슷하다. 음식을 시킨 가게는 어딘지, 메뉴별로 가격은 어떤지 꼼꼼한 소개도 잊지 않는다. 후식이 케이크인 날은 설렌다. 케이크 한판을 깔끔하게 비우다 가끔씩 ‘양치한다’고 육개장 사발면을 끓여먹을 때가 있다. 그 개운함이 좋다. 침대에 몸을 말고 누워, 나는 그렇게 먹방을 본다.

전에는 먹방 같은 걸 왜 보냐 딴지거는 사람이었다. 먹방에 홀리게 된 건, 이런저런 콘텐츠에서 남다른 의미를 찾아보겠다고 골머리를 앓던 어느 날이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소문으로만 듣던 햇님 언니가 등장했다. 배달 떡볶이 위 치즈를 죽 늘여, 핫도그와 같이 먹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먹을 수도 있구나. 도너츠와 떡볶이 브랜드가 이렇게 많은 줄도 몰랐다. 가만히 누워서 야시장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구태여 의미를 들여다 볼 필요도 없었다. 말초적 자극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아기새가 된 것 같았다.

자연히 더 센 자극을 찾게 됐다. 먹방계의 제일은 다이어터라고 했다. 실로 그랬다. 전문 먹방 유튜버처럼 근사한 셋팅이나 말주변은 없었지만 먹을 것에 대한 욕망이 남달랐다. 참다 참다 터진 식욕이 해치우는 음식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죄책감이 든 것은 그 무렵이었다. 식이장애를 전시하는 유튜버들이 알고리즘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드시고도 날씬하세요?” 먹방 영상마다 꼭 이런 댓글이 달렸다. 주머니를 털어 온갖 음식을 사먹어야 하지만 살은 찌면 안 된다. 사회의 요구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피드를 새로고침 할 때마다 그 이상한 요구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살빼조님은 다이어트로 생긴 폭식증 때문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있는 영상을 통해 솔직하게 털어놨다. 절식과 폭식을 반복하는 다이어트 대신, 건강한 운동 습관을 들여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체중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몸을 긍정하는 룩북 영상을 찍어 올렸다. 영상에서 여전히 식사를 하지만 예의 폭식은 아니다. 자극 대신 남은 것은 살가운 소통이다. 살빼조 유튜브 캡처

살빼조님은 다이어트로 생긴 폭식증 때문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있는 영상을 통해 솔직하게 털어놨다. 절식과 폭식을 반복하는 다이어트 대신, 건강한 운동 습관을 들여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체중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몸을 긍정하는 룩북 영상을 찍어 올렸다. 영상에서 여전히 식사를 하지만 예의 폭식은 아니다. 자극 대신 남은 것은 살가운 소통이다. 살빼조 유튜브 캡처

숨을 고르고, 시야를 넓혀봤다. TV가 그랬듯 유튜브도 바보상자에 그칠 리 없다. ‘먹방은 유해하다’는 주장은 틀렸다. 먹방 역시 진화하고 있다.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유튜버 살빼조님(언니라 부를 수 없어 슬프다)이다. 닉네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다이어터 브이로그로 유명해졌다. 식이 제한을 하다 ‘입이 터져’ 폭식하는 모습이 그렇게 복스럽다며 입소문이 났다.

살빼조님은 그 명성 위로 새로운 이야기를 썼다. 다이어트로 생긴 폭식증 때문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있는 영상을 통해 솔직하게 털어놨다. 절식과 폭식을 반복하는 다이어트 대신, 건강한 운동 습관을 들여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체중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몸을 긍정하는 룩북 영상을 찍어 올렸다. 영상에서 여전히 식사를 하지만 예의 폭식은 아니다. 자극 대신 남은 것은 살가운 소통이다. 밥을 함께 먹으면 친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어느덧 살빼조님과 그의 고양이 된찌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됐다.

햇님언니는 케이크 한판을 깔끔하게 비우다 가끔씩 ‘양치한다’고 육개장 사발면을 끓여먹을 때가 있다. 그 개운함이 좋다.햇님 언니는 여전히 나의 ‘최애’다. 언니의 먹방은 내게 더 이상 ‘자극의 향연’이 아니다. 언니가 무얼 먹든, 그의 채팅방에 짧은 안부를 남기는 게 좋다.  입짧은햇님 유튜브 캡처

햇님언니는 케이크 한판을 깔끔하게 비우다 가끔씩 ‘양치한다’고 육개장 사발면을 끓여먹을 때가 있다. 그 개운함이 좋다.햇님 언니는 여전히 나의 ‘최애’다. 언니의 먹방은 내게 더 이상 ‘자극의 향연’이 아니다. 언니가 무얼 먹든, 그의 채팅방에 짧은 안부를 남기는 게 좋다. 입짧은햇님 유튜브 캡처

햇님 언니는 여전히 나의 ‘최애’다. 언니의 먹방은 내게 더 이상 ‘자극의 향연’이 아니다. 언니가 무얼 먹든, 그의 채팅방에 짧은 안부를 남기는 게 좋다. 소리 없이 먹는 모습만 편집해 보여주는 유튜버들도 많지만, 언니는 거의 매일같이 라이브로 구독자 ‘햇싸리’들을 만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이 삶의 낙이라는 언니의 말을 기억한다. 언니의 낙을 한 조각 나눠 갖는 기분으로 먹방을 본다.

회사 그만두고 싶어요, 몸살이 났어요, 친구랑 싸웠어요. 늘 비슷한 고민들이 쏟아져도 매번 다르게 들어주는 언니가 고맙다. 가끔 “이렇게 먹고 80㎏ 쪄라” 같은 황당한 악플이 올라와도 “이미 84㎏”라며 파하하 웃는 언니가 좋다. 언니는 전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였던 좌우명이 바뀌었다며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지구, 동물,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불가능해~. 최소화하는 것뿐이죠, 요즘은.” 먹방을 무해한 콘텐츠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희한한 세상에서도 성장하며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서로 피해를 주고 받으면서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처럼. 그래서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먹방을 본다.

서대문구칩거인
문화부 기자. 게으른데 호기심은 많은 I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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