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70년대에 머문 '정릉골'···이제는 사라질 성북구 달동네를 가다

류인하 기자
11일 찾은 서울 성북구 정릉3동 ‘정릉골’. 사람들이 떠나 대부분의 집이 비어있다. 류인하 기자

11일 찾은 서울 성북구 정릉3동 ‘정릉골’. 사람들이 떠나 대부분의 집이 비어있다. 류인하 기자

서울 성북구 정릉3동 일대에는 ‘정릉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정릉골은 서울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달동네’ 중 하나다.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가 거주했던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정릉골은 1960년대 초 청계천과 북아현동 일대 판자촌을 정리하면서 산기슭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형성한 무허가촌이다. 집이 먼저 지어지고, 사람이 들어온 곳이 아닌, 사람이 들어와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었다. 땅을 고르고 길을 닦아 만든 마을이 아닌 탓에 사람이 정착한 장소를 중심으로 길이 만들어지고, 골목이 생기고, 계단이 만들어졌다. 집집마다 담벼락은 있지만 집안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낮다. 주요 도시기반시설이 들어오지 못해 사람들은 지금도 연탄을 가져다 난방을 하고, 재래식 화장실을 쓴다. 그래서 정릉골 곳곳에는 타고 남은 흰 연탄재가 쌓여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정릉골을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집 한 켠에 쌓인 연탄재들. 류인하 기자

집 한 켠에 쌓인 연탄재들. 류인하 기자

11일 정릉골로 올라가는 초입. 저 멀리 슈퍼마켓이 보이지만 문을 닫았다. 류인하 기자

11일 정릉골로 올라가는 초입. 저 멀리 슈퍼마켓이 보이지만 문을 닫았다. 류인하 기자

11일 찾은 정릉골은 여전히 주민들이 머물고 있지만 곳곳이 폐허였다. 한 사람이 옆으로 걸어야 할 만한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집이 있었지만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떠난 집은 빠르게 낡는다. 빈 집 주변으로 잡초가 뒤덮혔다. 흡사 화재피해라도 입은 듯 검게 변한 집안 내부는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란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방치된 쓰레기들이 골목을 가로막기도 했다. 정릉골 초입에 있는 ‘쌍둥이슈퍼’ 주인은 손님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낮잠에 들어 있었다. 북한산 줄기 아래에 자리잡은 정릉골은 구석구석 오르막길이 아니면 내리막길이다. 마을 중턱을 넘어서자 곳곳에 주민들이 심어놓은 작물들이 눈에 띄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 마당 한켠에는 누군가 심어놓은 배추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 떠난 빈 집 앞 마당에 누군가 김장용 배추를 심었다. 류인하 기자

주인이 떠난 빈 집 앞 마당에 누군가 김장용 배추를 심었다. 류인하 기자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릉골에 들어와 터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노인이 됐다. 마을 주민 A씨(79)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이웃이었던 친구들은 여기가 살기 불편하니까 이사를 갔거나 아니면 저기로 갔지”라며 하늘을 쳐다봤다. A씨는 60년대 초 이곳으로 이주했다. 아들, 딸은 모두 독립해 나갔고, 지금은 병환으로 누워있는 부인과 단 둘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A씨는 “지금 저기 옆이랑 저기 너머 전부 빈 집”이라며 “이제 여기가 개발된다고 하니 우리도 나가라고 할 때 나갈 준비를 해야지”라고 말했다.

11일 한 노인이 정릉골로 걸어가고 있다. 류인하 기자

11일 한 노인이 정릉골로 걸어가고 있다. 류인하 기자

한때 수 많은 아이들이 뛰어놀았던 정릉골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마을이 됐다. 이 마을 교회 목사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교인들도 다 떠났다”고 말했다. 일요일마다 예배는 하지만 신도들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목사의 가족을 포함한 숫자다. 목사는 “마을을 이미 떠났는데 여기까지 찾아와 예배를 드리겠느냐”고 말했다. 목사는 골목 곳곳을 가리키며 “저기 한 집에 사람이 살고, 나머지 저기 파란 지붕부터 위로 다섯 채는 전부 빈 집이다. (대각선으로) 아랫집도 비어있고, 그 아래 우측집도 비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알기로는 여기 주변으로는 8~9가구 정도밖에 사람이 없다”고도 했다. 성북구 관계자는 12일 “정릉3동 일대 전체 주민은 1570명이며, 정릉골 일대에 주소를 두고 있는 주민은 683명으로 현재 파악된다”고 말했다.

개소리가 들려 올라가봤더니 누군가 살고 있는 집 앞마당에 개들이 모여 있었다. 류인하 기자

개소리가 들려 올라가봤더니 누군가 살고 있는 집 앞마당에 개들이 모여 있었다. 류인하 기자

벽에 개조심이라고 적혀 있지만 개는 없었다. 류인하 기자

벽에 개조심이라고 적혀 있지만 개는 없었다. 류인하 기자

원주민들이 떠난 정릉골 마을에는 최고급 타운하우스가 들어선다. 정릉골 개발논의는 오세훈 서울시장 임기 때부터 진행됐었다. 2003년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된 후 박원순 시장 시절인 2012년 정비구역 지정, 2017년 조합설립 등 작업이 진행됐다.

정릉골구역 주택재개발조합에 따르면 정릉골 20만3857㎡ 면적에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의 고급 타운하우스 1411세대가 들어선다.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릉골은 배산임수 북한산 자연경관지구에 속해 높은 집을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용적율 99.89%, 건폐율 35.98%가 적용됐다. 대신 테라스를 갖춘 친환경 고급 타운하우스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성북구청은 지난달 28일 ‘정릉골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사업시행계획인가를 위한 공람·공고’를 게시했다. 공고일은 12일까지다. 12일 조합 관계자는 “현재 정릉골에 남아있는 분들에 대한 이주계획이나 마을철거계획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차근히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릉골의 좁디 좁은 골목길. 성인남성이 옆으로 걸어가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도 곳곳에 있었다. 류인하 기자

정릉골의 좁디 좁은 골목길. 성인남성이 옆으로 걸어가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도 곳곳에 있었다. 류인하 기자

정릉골의 좁디 좁은 골목길. 성인남성이 옆으로 걸어가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도 곳곳에 있었다. 류인하 기자

정릉골의 좁디 좁은 골목길. 성인남성이 옆으로 걸어가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도 곳곳에 있었다. 류인하 기자

재개발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웃돈을 주고라도 이곳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당연히 외지인들이다. 정릉동 B공인중개사는 “조합가입 문의가 많이 오고 있다”면서 “12월 중으로 사업시행인가가 떨어지고 나면 시행사 선정부터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C공인중개사는 “가장 작은 평형인 대지 지분 84㎡기준 단독주택 호가가 7억5000만원”이라며 “단독주택은 대출이 불가능하니 현금으로 준비해야한다”고도 했다.

시행사 선정작업 등이 마무리되면 이제 이곳에 몇 남지 않은 마을 주민들도 곧 정릉골을 떠난다. 누군가는 다시 돌아오겠지만 누군가는 영원히 이곳을 떠나게 된다. A씨의 집 마당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던 단감나무와 떫감나무도 어쩌면 곧 사라질지 모르겠다.

정릉골에 들어설 최고급 타운하우스 조감도. 정릉골구역 주택재개발조합

정릉골에 들어설 최고급 타운하우스 조감도. 정릉골구역 주택재개발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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