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 자유의 시간, 눈치 안 봐요…한국이 닮아야 할 ‘쉼’에 대한 생각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유럽의 유명 여름 휴양지 중 하나인 니스의 지난 7월 해변 풍경. 그린패스(백신패스)로 여행 제한이 풀리자 아름다운 지중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유럽인들로 북적이는 모습이다. 사진 크게보기

유럽의 유명 여름 휴양지 중 하나인 니스의 지난 7월 해변 풍경. 그린패스(백신패스)로 여행 제한이 풀리자 아름다운 지중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유럽인들로 북적이는 모습이다.

#1. 지난해 12월8일, 현재 지도교수인 리처드가 랩 구성원들에게 ‘2020/2021년 휴가’라는 제목의 메일을 보냈다.

“올해는 휴가를 정상적으로 쓸 수 없는 해였습니다. 예외적으로 올해 사용하지 못한 휴가는 내년 7월31일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용하지 않은 휴가는 8월이 되면 소멸하오니 부디 휴가를 다녀오길 바랍니다! 참고로 고용법은 일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있도록 매년 최소 한번 2주 이상의 휴가를 사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우리가 이를 실천하여 가족을 방문하고 흥미로운 세계를 탐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리처드.”

스위스에 오기 전부터 유럽인들이 한국인이나 미국인보다 평균적으로 더 긴 휴가를 누린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내용의 메일을 받으니 문화충격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박사 후 연구를 하는 동안은 휴가를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았다. 나도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데다 지도교수 에릭까지 쉴 틈 없이 일하는 사람이었고, 동료들도 휴양지에서 긴 휴가를 보내고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미국인 동료들은 대체로 부활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전후로 다른 주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휴가를 사용했다. 가족들이 먼 타국에 있는 나는 미국 명절 연휴 동안 텅 빈 연구실에서 다른 외국인 동료들과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도 결혼기념일처럼 특별한 날을 맞아 종종 휴가를 가곤 했지만 주말을 끼고 다녀오는 짧은 일정이 대부분이었다. 출산 휴가가 없어 딸이 태어난 후 3주 동안 휴가를 쓴 때가 유일하게 연차를 다 소진한 해였을 것이다.

그랬기에 코로나19로 사용하지 못한 휴가를 여유있게 이월해준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리처드의 친절한 메일은 감동적이면서도 낯설었다. 연간 25일이라는 넉넉한 연차가 주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있도록 2주 이상의 장기휴가를 의무로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오래 휴가를 쓰려면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라 거꾸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니.

실제로 백신 접종으로 여행 규제가 완화된 올여름, 동료들 대부분이 보름에서 한 달 가까이 바캉스를 떠나면서 한동안 연구실이 썰렁했다.

유럽에선 흔한 ‘2주 이상’ 긴 휴가
쉬지 않으면 오히려 ‘써라’며 권장
‘워커홀릭’이던 나로선 낯선 풍경

#2. “나는 일이 제일 재밌어.”

몇 달 전, 20여년 동안 굴지의 기업을 키워낸 A회사의 대표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대표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궁금하여 “요즘 대표님 삶의 낙은 무엇인지요?” 하고 여쭤보았다. 대표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일이 너무 재밌어서 취미활동의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대표님의 말씀은 당시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나의 머릿속에서 며칠 동안 맴돌았다. 한때는 나 또한 일, 즉 ‘연구’가 내 삶의 가장 큰 낙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낙’이 아니라 ‘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A회사 대표님처럼 일이 곧 취미요, 취미가 곧 일인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텔라장의 ‘월요병가’ 같은 노래가 인기를 끌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분명히 얼마 전에/ 월요일이었는데 그랬는데/ 근데 왜 내일이 또/ 월요일이라는 건데/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웬수 같은 자식 /없는 병도 너만 보면 생길 것 같다/…/ 가능만 하다면 병가를 내고 싶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졸리고/ 누워있어야 할 것 같아요/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제가 월요병이 도졌어요/ 유전 질환인 것 같아요/ 우리 엄마 아빠 오빠/ 누나 동생 이모 다/ 걸려있는 병이에요/ 또 월요병이 도졌어요/ 불치병인 거 잘 알아요/ 우리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도/ 약을 아직까지 찾고/ 계신다더라고요.” (스텔라장, ‘월요병가’ 중)

스텔라장의 가족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월요병의 원인은 월요일이 다시 ‘일’을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토·일요일 대신 금·토요일에 쉬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월요병 대신 한국에서는 희귀병인 ‘일요병’을 앓고 있을 테다.

‘워라밸’이라는 말 속에 일(워크)은 삶(라이프)의 대척점에 있는 무엇이라는 인식이 들어있다. “일=삶”이어서 맞출 밸런스가 존재하지 않는 A회사 대표님의 삶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닐까.

#3. 노동은 개인과 공동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근원이다. 모든 동물은 살아가기 위해 몸을 움직여 에너지를 확보한다. 쉬는 것도 본성이지만 일하는 것도 우리의 본성이다. 분업화된 사회 구성원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자아 실현에 기여하기도 한다. ‘취업’이라는 열망의 이면에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을 넘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본성이 담겨 있다.

일과 관련하여 나는 특별히 더 운이 좋은 경우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밥벌이로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활동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 길을 택한 이유의 팔할 이상은 과학이 ‘즐겁기’ 때문이다. 연구는 내가 해본 모든 게임들보다 더 재밌고, 어떤 영화나 스포츠 경기보다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연구도 밥벌이가 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취미는 즐기면 그만이지만, 일은 잘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박사를 졸업하고 전문 연구자로 성장해 나갈수록 연구의 즐거움보다 연구의 무거움이 더 많이 늘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과 뮤지션이 되는 것이 차원이 다른 것처럼 연구도 마찬가지다. 프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피 튀기는 ‘경쟁’이 시작된다. 녹초가 될 때까지 훈련을 이어가는 운동선수처럼, 과학자들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아도 문제를 풀고 실험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연구의 무거움이 즐거움을 압도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번아웃이 찾아왔다.

우린 노예 아닌데 자기 억압 익숙
이유는 일에 몰입해야 먹고 살아
그래서 휴일·휴가가 ‘달콤’한 것

#4.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해야 할 일’을 잘 끝내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돈과 시간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기만 하고 쓸 수는 없는 그런 부자의 삶이 있다면, 과연 그런 삶을 누가 부러워하거나 갖고 싶어할까.

‘월요일만 보면 없던 병도 생길 것만 같은’ 이유, 일하는 시간이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이유는 끊임없이 자신을 억압해야 하기 때문일 테다. 일하는 동안 우리는 배고파도 먹지 않고, 쉬고 싶어도 움직이고, 졸려도 자지 않으며, 혼자 있고 싶어도 누군가를 만나야 하며, 입을 닫고 싶어도 말을 섞어야 한다.

본능적인 욕망에 대한 끊임없는 억압이 있어야만 우리는 성공적으로 조직의 일부가 되거나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이윤을 창출한다. 주인이 노예를 통제하는 신분제의 억압이 사라진 자리는 오늘날 상당 부분 자본주의적인 ‘자기 억압’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노예가 아님에도 일하는 동안 스스로 억압의 규칙을 따른다. 그래야만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휴일 혹은 휴가가 달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인에게 휴가는 예속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될 수 있는 해방의 시간이다. 쉬는 시간 동안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상당 부분 회복한다. 말하자면 휴가라는 시공간에서 우리는 다시 삶의 ‘주인’이 된다.

일터에선 어디에서 무얼 할지가 대체로 결정되어 있다. 나의 기분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나의 역할이 있고 임무가 있다. 반면 휴가 동안 우리는 삶의 장소와 형태에 나의 상태와 욕망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 물론 휴가에도 개인마다 여러 제약이 있겠지만, 일터에서보다는 눕고 싶을 때 눕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며, 가고 싶은 곳에 가볼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아진다.

ILO 협약에 나온 ‘넉넉한 휴가제’
한국은 아직 비준하지 않은 국가
우리도 일과 쉼의 균형 고민할 때

#5. 스위스인들은 2012년 국민투표에서 연간 법정휴가 일수를 20일(4주)에서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인 30일(6주)로 올리는 안건을 부결시켰다. 반대 득표가 무려 66.5%에 달했다. 근면성실하기로 유명한 스위스인들다운 결정이었다. 이 이야기를 연구실 동료들과의 점심 식사 시간에 들었는데, 긴 바캉스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출신 동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암브라는 휴가가 너무 많아서 단 한 번도 다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얼마의 휴가가 적정할까? 이 질문은 마치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는 게 좋을까?’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참고할 만한 기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지구상에서 아마 가장 많이 고민했을 집단 중 하나인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1970년대에 휴가제도에 관한 협약 제132호를 마련했다. 핵심 세 가지 조항은 다음과 같다. ‘연간 최소 3주의 휴가가 주어져야 한다(3조)’ ‘이 중 최소 2주는 연속으로 사용해야 한다(8조)’ ‘미사용 휴가에 대한 보상은 인정되지 않아야 한다(12조)’.

스위스는 이 협약을 1992년에 비준했다. 한국은 아직까지 비준하지 않은 나라에 속한다. 연간 최소 3주의 휴가(주 5일제 기준 15일)는 간신히 충족했지만, 나머지 두 핵심 조항은 일부 기업이나 단체에서만 적용되고 있다. (코로나19 고통분담으로 예산이 전액 삭감된 지난해를 제외하곤) 우선 정부가 국가공무원들이 사용하지 않은 연가에 대한 보상으로 수천억원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ILO 132호 최저기준보다 훨씬 넉넉한 쉼이 있는 휴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여러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여전히 ‘쉼’이 부족한 나라처럼 느껴진다.

휴가가 길어지면 개인의 삶은 풍요롭고 사회는 여유로워지지만, 노동시간은 짧아지고 인건 비용은 상승한다. 스위스인들에게 ‘6주’는 전자의 이득보다 후자의 손해가 더 크다고 느껴지는 숫자였다. 한국은 어떨까? 우리는 얼마나 일하고 얼마나 쉬어야 할까? 마침 옆동네 제네바에 본부를 둔 ILO 사무총장 선거에 강경화 전 장관이 출사표를 던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를 계기로 개인적인 차원의 워라밸을 넘어 제도적 차원의 ‘일’과 ‘쉼’의 적정 균형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다른 삶] 휴가는 자유의 시간, 눈치 안 봐요…한국이 닮아야 할 ‘쉼’에 대한 생각

▶이대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3년 동안의 연구를 마친 후, 대서양 건너 스위스 로잔대학에서 초파리를 해부하며 뇌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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