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인문학적 성찰이 나를 풍요롭게 했고 법도 되돌아보게 했다”읽음

전현진 기자
평소 90% 이상 시간 앉아있는다는 사무실 책상. 두대의 모니터로 각종 사건 기록과 판결문, 논문을 찾아 읽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전현진 기자

평소 90% 이상 시간 앉아있는다는 사무실 책상. 두대의 모니터로 각종 사건 기록과 판결문, 논문을 찾아 읽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전현진 기자

지난 17일 오전 만난 박형남(61)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판사실 안 커다란 책상을 가리키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낸다고 했다. 모니터 2대 앞에 앉아 전자문서로 된 사건기록을 읽거나 판례와 논문을 찾아 보는 게 주된 일이다. 그가 속한 민사항고25부에서 현재 다루는 사건만 166건이다. 다른 재판부보다 많지 않은 편인데도 부지런히 읽어야 재판을 할 수 있다.

박 부장판사는 그 시간을 쪼개 최근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휴머니스트)를 펴냈다. 지난해 8월부터 <주간경향>에 연재한 글 23편을 모았다. 왜 판사는 시민들과 다르게 생각하는지, 전문가도 아니고 세상 물정도 어두운 판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을 어떻게 하는지 등의 주제를 인문학적 성찰로 풀었다. 마감에 맞춰 바쁜 중에도 틈틈이 썼다.

집필하며 참고한 책을 의자 뒷쪽에 따로 꽂아두었다. 대부분 인문학 교양서들이다. 박 부장판사는 “판사가 법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바쁘겠지만 인문학이나 사회학 관련된 책도 읽어야 법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박 부장판사는 2013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사망에 대해 사법사상 처음으로 ‘심리부검’을 도입해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의 심리 상태를 재구성해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심리적 부검이다. 우연히 관련 글을 읽고 해외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적용할 수 있는 사건을 맡게되자 부검을 맡길 전문가를 직접 찾았다.

재판에 관여된 이들이 모두 납득하는 판결을 하고 싶었다. 그는 “법리를 그냥 따랐다면 입증책임 때문에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판사가 그렇게 ‘일 다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타성에 젖어 ‘어쩔 수 없다’고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박 부장판사가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쓰게 된 것도 결국 시민과 판사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는 “승패가 나뉘는 재판제도의 숙명도 있어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고 당사자의 운명이 걸리 사건을 다루는 사법부에 대해 신뢰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시민들이 사법을 불신하는 건 판사들의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은 일반시민은 물론 판사들을 대상을 쓴 것이기도 하다”면서 “이제 판사들도 차가운 머리와 따듯한 가슴을 판결문에 함께 드러내야만 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상급법원에 깨지지 않게 양식만 갖춘 판결을 쓰면 안 되고 사회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줘야 한다. 판사들이 사법제도와 재판 운영에 대해 시민의 시각에서 되돌아 봤으면 하는 마음도 책에 담았다”고 했다.

박 부장판사의 컴퓨터 위에는 그가 추구하는 바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장식품들이 놓여 있다. 가톨릭 십자가와 지혜를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형평을 따지는 ‘디케의 저울’. 여기에 옛 교복을 입은 소년의 인형도 있었다. 그는 “친구들이 소년 같은 마음 잃지 말라고 만들어 준 것”이라며 웃었다.

박 부장판사는 인문학적인 성찰을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10년 전부터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가서 인문학 공부를 했다. 역사와 철학, 문학을 들여다보면서 판사로서의 자신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자신을 나누어 보게 됐다고 했다. “인문학적 성찰이 나를 풍요롭게 했고 법도 되돌아보게 했다”고 그는 말했다.

박형남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소년처럼 살라고 친구들이 만들어준 인형을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박형남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소년처럼 살라고 친구들이 만들어준 인형을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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