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된 인권위

③인권위, 법률과 관료의 틀 깨고 나와 ‘더 짙어진 차별’을 금지하라

강은·이두리·반기웅 기자

‘혐오의 시대’에 풀어야 할 과제

국가인권위원회가 25일로 출범 20년을 맞았지만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해결해야 할 과제는 더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왼쪽 사진부터 2010년 12월6일 현병철 당시 인권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연합회의 한 회원이 인권위 방문을 저지당하고 있다. 2019년 6월1일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이들이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행진하고 있다. 2021년 7월23일 경찰이 강원 원주시 건강보험공단 앞에서 집회를 연 민주노총의 한 조합원을 끌어내고 있다. 2021년 11월18일 종이봉투를 쓴 시위 참가자들이 인권위 앞에서 외국인보호소에서 저질러진 학대를 비판하며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가인권위원회가 25일로 출범 20년을 맞았지만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해결해야 할 과제는 더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왼쪽 사진부터 2010년 12월6일 현병철 당시 인권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연합회의 한 회원이 인권위 방문을 저지당하고 있다. 2019년 6월1일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이들이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행진하고 있다. 2021년 7월23일 경찰이 강원 원주시 건강보험공단 앞에서 집회를 연 민주노총의 한 조합원을 끌어내고 있다. 2021년 11월18일 종이봉투를 쓴 시위 참가자들이 인권위 앞에서 외국인보호소에서 저질러진 학대를 비판하며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코로나19는 전례 없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를 불러냈다. 감염병이 확산할수록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의 농도는 짙어졌다. 새로운 유형의 인권침해도 생겨났다.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은 정보 인권침해를 야기했고 노년층과 같은 디지털 취약계층을 고립시켰다. 플랫폼 노동 활성화로 노동 인권 사각지대가 커지고 있다. 차별과 혐오는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혐오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책무는 전보다 무거워졌다. 군인·장애인·이주노동자·차별금지법과 같은 미완의 과제와 함께 새로운 인권 문제도 풀어내야 한다.

20년째 제자리 군(軍)

여전히 낮은 수준인 군 인권 논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건 많아
인권위가 적극적으로 해결 나서야

지난 20년간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진정 사건은 15만8790건(10월 기준)이다. 이 중 군 인권 관련 진정은 2952건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와 ‘인권’을 연결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2005년 육군훈련소 ‘인분 사건’ 이후다. 중대장이 훈련병에게 인분을 먹도록 강요한 이 사건은 취약한 군 인권의 단면을 세상에 드러냈다. 군인 인권법이라 할 수 있는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군인복무 기본법)이 시행된 것은 인분 사건 발생 11년 뒤인 2016년에 이르러서다.

최소한의 신체적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요구에서 최근에는 병사들의 외출·외박, 휴식권 보장, 휴대전화 사용 등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군인의 두발 자유 보장, 군 급식 개선과 같은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시민 인권과 비교하면 군 인권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1월 성전환 수술을 받은 육군 변희수 하사는 ‘심신장애’를 이유로 육군에서 강제 전역했다. 지난 10월 ‘남성을 기준으로 한 육군본부의 강제 전역 결정은 위법’이라는 판단이 나왔지만 변 하사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지난 5월에는 공군 제20전투비행단에서 상관의 성추행과 2차 가해에 시달리던 이예람 중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중사 사망과 비슷한 시기에 공군 제8전투비행단에서 성추행 피해 여군이 사망한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시민사회는 인권위가 보다 적극적으로 군 인권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주문한다. 군이 인권위 조사에 비협조적이다 보니 인권위는 스스로 위축되는 경향을 보인다. 조사에 착수하기도 전에 기각되는 사건도 많다.

법의 테두리에 갇힌 인권위

이주노동자·장애인 차별 문제 등
법률적 판단에 의존하는 경향 많아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 반영 미약

이주노동자 인권 문제를 보는 인권위의 시각은 여전히 실정법 테두리에 갇혀 있다. 지난 4월6일 화성 외국인보호소는 뒤 수갑을 채우고 두 발을 묶어 사지를 연결한 ‘새우꺾기’ 자세로 모로코 출신 외국인을 수시간 격리했다. 인권위는 “신체의 자유와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법무부에 제도개선을 권고했다. 결정문 공개 이후 인권단체들은 인권위가 ‘인권침해에 대한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했다. ‘새우꺾기’가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박스 테이프 등 법령에 없는 보호장비를 사용해 과도한 강제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다’는 취지의 결정문을 냈다는 것이다.

이한재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인권위는 매년 외국인보호소 실태조사를 하면서도 피상적이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피해 당사자들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는 데까지는 힘을 못 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일부 이주민을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자 ‘차별’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인권위는 서울시·경기도에 대해 ‘평등권 침해’라며 개선을 권고하면서도 중앙정부에 대한 진정은 기각했다. 지방자치단체는 외국인 주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규율이 있으나 중앙정부에는 관련 규정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정영섭 이주노동자운동후원회 사무국장은 “인권위는 국제인권 규범에 따라 인권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판정하면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가지 인권위로 가져갈 이유가 없지 않냐”고 말했다.

인권위가 법률적 판단에 의존하는 경향은 장애인 차별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장애인 인권 단체들은 피해 당사자를 배제하는 인권위의 내부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법률적 해석에 주로 의존하는 판사·변호사 출신들은 많은데 (장애인 문제를) 직접 느끼고 (권리를) 주장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미약하다”며 “인권위는 여전히 공무원들의 상상력 부족과 비장애인 중심의 구조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권위의 사유별 차별행위 진정접수 현황을 보면, 인권위 설립 이후부터 지난해까지 ‘장애로 인한 차별’ 진정 건수가 1만5830건으로 가장 많았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이듬해인 2008년에는 ‘장애로 인한 차별’ 진정이 2배 이상 늘기도 했다. 장애인 인권 단체는 최초의 인권·독립 기구인 인권위에 거는 기대가 컸다.

기대만큼 아쉬움이 컸다. 지난 8월 정부는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목과 달리 문서에는 ‘탈시설 권리’ 대신 ‘주거 결정권’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탈시설이란 장애인 이용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시설중심의 복지 패러다임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된 용어”라며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기피하는 것은 이런 맥락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직장 내 괴롭힘

직장 내 갑질 등 새 유형의 차별과
점점 음성화되어가는 인권침해에
주류 중심 인권위는 대응이 늦어

2006년 4월 전남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A씨가 목숨을 끊었다. 같은 수술장에서 일하던 후배 간호사 B씨가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지 6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직장 내 괴롭힘의 대표적인 형태인 ‘태움’이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진 사건이었다. A씨의 언니는 당시 “동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적인 직장환경에 의해 억압받고 살해됐다”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보건의료노조 전남대병원지부는 “A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라”고 요구했으나 병원 관계자는 “본인이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간호사의 ‘태움’ 사건을 계기로 직장 내 괴롭힘이 ‘인권 침해’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직장 내 괴롭힘이 법적 ‘차별’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7년 인권위에서 실시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은 해고나 산재신청에 이른 뒤에야 노동법적 대응을 할 뿐 인권위 제소에 대해서는 실효성을 느끼지 못했다.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 조항이 신설된 건 2019년이다. 이듬해 인권위는 이 개정안이 제3자에 의한 괴롭힘이나 4인 이하 사업장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등 사각지대가 있고, 괴롭힘 행위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어 그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개선을 권고했다. 고용노동부는 인권위 권고를 일부 수용해 올해 4월 근로기준법에 비밀유지의무 조항, 과태료 부과 규정 등을 신설했다. 오진호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장은 “개인이 참아야 하는 ‘업계의 관행’으로 여겨지던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음성화된 인권침해

인권침해와 차별은 점차 보이지 않는 ‘사적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다. 2020년 인권위에 접수된 ‘성별에 따른 차별행위’ 진정 건수는 89건이다. 전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2020년 ‘성희롱 차별행위’ 진정 건수는 220건으로 2018년 성차별시정팀이 신설된 이래 가장 적다. 수치만 보면 성별 관련 차별이 감소한 듯 보이지만 노동현장에서 정말로 차별이 줄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수영 서울여성노동자회 고용평등상담실장은 “고용 환경이 불안정해지면서 퇴사나 정리해고에 대한 우려 때문에 여성들이 직장 내 성희롱을 참고 견뎠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인권위가 다루는 성희롱 사건의 범위가 협소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인권위는 행위자가 ‘업무·고용에 관계된 사용자·근로자일 경우’ 혹은 ‘공공기관 종사자일 경우’에 해당하는 성희롱만 조사한다. 개인 사이에서 발생한 성희롱이나 고객에 의한 성희롱은 조사 대상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아동학대 신고 접수는 늘어나는 데 반해 교사가 신고한 아동학대 건수가 감소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8월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20년 아동학대 주요통계’를 보면 연도별 아동학대 신고접수 건수는 2019년 4만1389건에서 2020년 4만2251건으로 증가했다.

반면 초·중·고교 직원이 아동학대를 신고한 사례는 2019년 5901건에서 2020년 3805건으로 대폭 줄었다. 비대면 수업 활성화로 ‘아동학대 신고의무자’인 교사가 아동·청소년의 학대 정황을 포착할 기회도 덩달아 줄어든 것이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코로나로 교육기관, 보육시설이 폐쇄돼 학대아동이 발견될 기회가 줄었다”며 “등교수업의 축소 자체가 취약계층 아동에게는 인권침해일 수 있다”고 말했다.

독립된 인권위는 언제쯤

관료화된 조직, 역동성 찾으려면
여전히 외압에 취약한 구조 바꿔
진정한 독립기관 지위 확립해야

인권위가 새로운 유형의 차별에 대응하려면 독립기관의 지위를 확립해야 한다. 다수와 주류를 중심으로 설계된 정부 정책은 소수의 인권침해를 놓치기 십상이다. 정부에 종속된 인권위는 국가기관의 인권침해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현재 인권위원장과 인권위원 선출 과정만 놓고 보면 인권위의 독립성은 보장된 듯 보인다. 그러나 절차적 독립성이 마련됐을 뿐 인권위는 여전히 외압에 취약한 구조다.

지난 20년간 인권위의 역할은 정권에 따라 축소되거나 흔들렸다. 보수정권은 인권위를 독립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인수위 시절 인권위의 직속기구화를 시도했다. 인권위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시각은 정부 부처로 확산했다. 국회도 인권위의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보수정권의 인권위 독립성 훼손은 낮은 권고 수용률로 이어졌다. 참여정부 때 90% 안팎을 오르내리던 인권위 권고 수용률은 2009년 67%까지 하락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인권위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권위의 독립성 확보는 핵심 국정과제가 됐다. 문재인 정부 초대 인권위원장인 최영애 위원장은 ‘인권위의 독립성 강화’를 가장 중요한 임기 내 과제로 꼽았고 지난 9월 취임한 송두환 인권위원장도 취임사를 통해 ‘인권위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권위의 완전한 독립은 여전히 요원하다. 후보추천위원회를 거쳐 인권위원장·인권위원을 선출하는 등 절차적 독립성을 갖췄지만 예산·조직·인사 등 실무 분야는 여전히 정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권위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추진 중인 인권위법 개정도 진전이 없다.

지난 7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헌법상 중대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가 침해됐다”며 인권위에 긴급구제를 신청하자 인권위는 “과도한 집회의 자유 제한을 하지 말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긴급구제 조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며 적극적인 대응에는 선을 그었다. 이를 두고 인권단체들은 ‘문재인 정부 인권위’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비판한다.

정권 내내 침묵하다 대통령 임기 말인 지난해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의견 표명을 한 것도 정무적 판단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로 현 정권에 부담이 갈까봐 눈치를 본 게 아니냐는 것이다.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관료화된 조직 개혁도 남은 과제다. 문재인 정부 초기 인권위 혁신위원회에 참여했던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은 “인권위에서 혁신을 한다면 조직의 관료적 행태를 개선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권 친화적인 정부의 출범을 기회로 삼아 조직 확대에만 힘을 썼다”며 “그 결과 인권위 사무처는 관료적 모습에서 탈피하지 못했고 인권위 고유의 역동성은 소멸됐다. 여러 정부 부처 가운데 하나로 전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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