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의 디딤돌 판결은 '변희수 하사 전역처분 취소 판결'읽음

전현진 기자

민변·경향신문 ‘최고·최악의 판결’ 선정

‘가습기 살균제 무죄’ 걸림돌 판결 꼽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경향신문은 군 복무 중 ‘성확정수술’(성전환수술)을 받은 고 변희수 하사에 대해 강제전역 처분한 군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본 판결을 올해 최고의 디딤돌 판결로 선정했다.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는 가습기 살균제를 제작·판매한 SK·애경 등 업체에 대해 제품 사용과 폐질환 사이의 인과관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며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1심 판결을 꼽았다.

‘2021년 10대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위원회’는 민변 각 위원회 등에서 추천받은 각급 법원과 헌법재판소, 국가인권위원회의 판결·결정 72건을 심사해 10대 디딤돌·걸림돌 판결을 선정했다. 지난해 11월1일부터 올해 10월31일까지 나온 판결·결정을 대상으로 했다. 사건의 특징, 기존 판례와의 견해 차이, 사회에 미친 영향, 인권 증진 기여도를 주요 심사 기준으로 삼았다.

선정위원장은 이상희 변호사(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소장)가 맡았다. 유진아 활동가(장애여성공감), 임용현 활동가(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박은정 교수(인제대 법학과), 박정은 사무처장(참여연대), 윤애림 교수(서울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임지봉 교수(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조수진 변호사(민변 사무총장), 안지희 변호사(민변 사무차장), 강문대 변호사(민변), 전현진 기자(경향신문)가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민변은 6일 ‘한국인권보고대회’를 열고 선정된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결과를 발표하고, 주요 인권 현안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한다.

■늦었지만…‘변희수 하사 강제전역 취소’ 최고의 디딤돌 판결

변희수 하사(가운데)가 2020년 8월 11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의 전역 처분 취소를 위한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변희수 하사(가운데)가 2020년 8월 11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의 전역 처분 취소를 위한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지난 10월7일 대전지법 행정2부(재판장 오영표)는 변 하사에 대한 육군의 강제전역 처분은 부당하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 판결은 법무부가 군에 항소 포기를 지휘해 확정됐다. 수술을 통한 성별정정이 ‘심신장애’라며 강제전역 처분한 것이 부당하다는 첫 판례였다. 변 하사는 지난 3월 첫 변론 전 목숨을 끊어 판결 결과를 보지 못했다.

변 하사는 휴가 중이던 지난해 1월22일 해외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육군본부는 “남성이었던 변 하사가 성전환 수술을 통해 일부러 심신장애를 초래했다”며 전역 처분했다. 변 하사의 입대 전 성별인 ‘남성’ 관점에서 볼 때 남성의 성기 상실·결손은 장애 요소인 만큼 계속 복무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성전환수술을 통한 성별 전환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수술 후 원고 성별은 여성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여성으로서 현역 복무에 적합한지 여부나 계속 현역 복무를 허용할지 여부 등은 관련 법령의 규정에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궁극적으로는 군의 특수성 및 병력 운용, 국방 및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 성소수자 기본적 인권, 국민적 여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성전환자의 현역 복무 허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선정위원들은 이 판결을 최고 디딤돌 판결로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선정위원들은 “군인이 복무 중 성확정수술을 받고 성별정정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전역처분을 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합리적인 차별을 가장해 내려진 것을 짚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변 하사가 의학적·법적으로 여성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판결로 확인했다”고 했다.

베트남 여성과 한국 남성의 이혼·양육권 소송에서 대법원이 ‘한국어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녀의 친권과 양육권을 뺏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도 디딤돌 판결에 선정됐다. 대법원은 “부모의 한국어 능력이 자녀의 건전한 성장과 복지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고, 외국인 부모의 모국어와 모국문화에 대한 이해 역시 자녀의 자아 존중감 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선정위원회는 “한국어 소통능력에 대한 고려가 자칫 (양육자의) 출신 국가 등을 차별하는 의도에서 비롯되거나 차별하는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며 “외국인 부모의 모국어 및 모국문화가 자녀에게 가지는 의미를 설시한 첫 판결이고 다문화 가정의 미성년 자녀의 성장과 복지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란 출신 난민 김민혁군이 5년간의 행정소송 끝에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아버지와 지난 7월12일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난민인정증명서를 들고 포옹을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이란 출신 난민 김민혁군이 5년간의 행정소송 끝에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아버지와 지난 7월12일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난민인정증명서를 들고 포옹을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난민인정자인 미성년 자녀와의 가족결합권을 인정한 판결도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법원은 이란 출신 난민인 김민혁군의 아버지를 난민으로 인정하면서 ‘종교적 박해’라는 사유에 더해 ‘이미 난민으로 인정받은 김군이 부모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양육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난민의 가족결합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판단을 내린 선례로서 큰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시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씨에 대한 검찰의 보복 기소를 공소기각한 판결을 확정한 대법원 판단도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검찰의 공소권 남용을 인정한 대법원의 첫 판단이었다. 종전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는 새로운 용역업체로의 고용승계 기대권이 인정되며, 용역업체가 합리적 이유 없이 고용승계를 거부하는 건 부당해고와 마찬가지로 본다는 판결 역시 ‘고용승계기대권’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례여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노인성 질환을 앓는 65세 미만의 장애인이 노인장기요양급여를 받을 경우 장애인활동지원급여를 받을 수 없도록 한 법률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성적 수치심’은 분노, 모욕감 등 다양한 피해감정을 포함한다는 법리를 명확히 한 ‘레깅스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해 유죄를 확정한 판결 ◇일정 정부를 상대로 한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면제권을 배척하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 역시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이 위헌이라는 헌재 결정 역시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다만 선정위원들은 사법부의 판단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피해자들의 고통이 지속됐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최악의 걸림돌 판결에 “가습기 살균제 무죄”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월12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해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에 대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한 직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가 재판 결과에 대해 발언하던 중 울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월12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해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에 대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한 직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가 재판 결과에 대해 발언하던 중 울고 있다. 강윤중 기자

최악의 걸림돌 판결에는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업체 관계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이 꼽혔다. 지난 1월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유영근)는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인 ‘가습기 메이트’를 제조·판매해 사용자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이사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이사 등에게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이 사건의 폐질환 및 천식 발생 혹은 악화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성분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판매한 신현우 전 옥시레빗벤키져 대표이사는 2018년 징역 6년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한 사회적 참사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심정이 안타깝고 착잡하기 그지 없다”면서도 “2년여동안 심리한 결과 PHMG 성분 가습기 살균제와는 위해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향후 추가 연구결과가 나오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 재판부 입장에서는 현재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형사 사법의 근본 원칙의 범위 내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선정위원들은 “법원은 인과관계 입증에 있어 동물실험 결과의 제한적 신뢰성과 한계가 있음에도 이에 대해 지나친 증거가치를 부여하였으며, 추론을 통한 사실인정과 과학적 해석방법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 전문가 증인의 증언이 단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함으로써 사법적 구제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올해 최고의 디딤돌 판결은 '변희수 하사 전역처분 취소 판결'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며 각하한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의 판결도 걸림돌 판결로 선정됐다. 재판부는 각하 이유 중 하나로 이 사건이 향후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게 될 경우를 상정하면서 국가와 사법부가 입게 될 여러 손해를 언급해 논란이 됐다.

재판부는 또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을 고려했다며 선고기일을 기습적으로 앞당기거나 기존의 대법원 소수의견을 따르면서 구체적 법리를 제시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선정위원들은 “법원이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고유의 지위를 이용해 여전히 자의적·독단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보여준 최악의 걸림돌 판결”이라는 의견을 냈다. 다만 1표 차이로 ‘최악의 걸림돌 판결’에는 선정되지 않았다.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의 혐오·차별 발언과 관련된 인권침해와 차별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린 각하결정도 걸림돌 판결로 꼽혔다. 이루다는 사람처럼 사용자들과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여성·장애인·인종·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내용이 담긴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인권위는 “이루다가 인격체가 아니므로 혐오표현을 이유로 이루다를 조사대상으로 할 수 없다”며 진정을 각하했다. 선정위원회는 “알고리즘에 따르는‘이루다’로 발생하는 차별 및 혐오 표현의 책임은 개발자·서비스 제공자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며 “인공지능과 책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는 부당한 판단”이라고 했다.

올해 최고의 디딤돌 판결은 '변희수 하사 전역처분 취소 판결'

헌재의 ‘임성근 전 부장판사 탄핵소추 각하 결정’도 걸림돌 판결에 선정됐다. 헌재는 헌정 사상 최초의 법관 탄핵소추 심판 청구에 대해 임 전 부장판사가 이미 퇴직해 탄핵심판의 실익이 없다며 각하했다. 선정위원회는 헌재가 형식 논리에 매몰돼 중대한 헌법적 사안을 공적으로 확인하지 않고 헌법질서 수호의 책임을 방기했다고 비판했다.

이밖에도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책임자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 ◇업무상 재해의 인과관계 증명책임은 근로자 측에게 있다는 기존의 법리를 유지한 대법원 판결 ◇‘무지개 퍼포먼스’를 벌인 학생들을 부당징계한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손해배상 의무를 인정하지 않은 판결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허가처분 취소 청구를 기각한 판결 ◇제주영리병원 허가 취소 처분이 정당하다고 본 원심판결을 뒤짚은 항소심 판결 ◇미비한 통역에도 난민신청자에 대한 출국명령이 적법하다고 본 2심 판결 등이 걸림돌 판결로 꼽혔다.

사법농단 관여 의혹을 받은 법관들에 대한 연이은 무죄 판결 등에 대해서도 문제가 많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는 등 유의미한 부분이 혼재돼 있다는 의견 또한 제시돼 걸림돌 판결에는 선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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