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처분장 논의는 30년째 제자리…대선 계기 ‘핵폐기장’ 떠민 정치권읽음

권기정·백승목·강현석 기자
영구처분장 논의는 30년째 제자리…대선 계기 ‘핵폐기장’ 떠민 정치권
지난 5월 월성원전 내 고준위폐기물 임시 저장시설인 ‘맥스터’ 7기 추가 건설공사가 내년 3월 준공을 앞두고 한창 진행되고 있다(위 사진).‘고준위핵폐기물 전국회의’가 지난달 24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안’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제공

지난 5월 월성원전 내 고준위폐기물 임시 저장시설인 ‘맥스터’ 7기 추가 건설공사가 내년 3월 준공을 앞두고 한창 진행되고 있다(위 사진).‘고준위핵폐기물 전국회의’가 지난달 24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안’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제공

고준위특별법안 국회 상정에
원전 주변 주민들은 강력 반발
“핵연료 처리 문제 공론화 먼저”

원자력발전소 가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를 영구처분하는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 원자력발전소 내 부지에 저장 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고준위특별법)안’이 지난달 23일 국회에 상정됐다. 원자력발전소 주변 주민들은 크게 반발하며 법안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대선 후보들까지 가세한 ‘친원전·탈원전’ 논쟁을 접고,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대한 공론화부터 시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6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일부 원자력발전소의 사용후핵연료는 임시저장시설 저장용량의 90%를 넘었다. 월성원전은 이미 가득 찼다. 고리원전과 한빛원전은 2024년에 포화상태가 된다.

이 특별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은 “원자력발전소 내 사용후핵연료 저장용량의 포화로 10년 내 수용한계에 도달한다”며 “중간저장시설, 영구처분시설 등 관리시설 건설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입장이다.

핵분열을 일으킨 뒤 나오는 찌꺼기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다. 핵폐기물로도 불린다.

핵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이다. 핵폐기물은 땅속 500m 깊은 곳에 영구처분장을 건설해 묻으면 안전하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 보유 국가 중 스웨덴과 핀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현재까지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장을 찾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1986년 영구처분장 후보지로 영덕, 울진, 포항 등을 선정했지만 주민 반대로 무산됐다. 1990년 태안 안면도, 고성, 양양이 후보지로 발표됐다가 무산됐고 1994년 인천 굴업도도 마찬가지였다. 영구처분장 확보 문제의 해결책을 30년 넘게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최근 대선을 계기로 원전 추가 건설 논의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영구처분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없는 상태에서 원전 추가 논의가 웬 말이냐는 지적이 나온다.

원자력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은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원전 안에 저장시설을 짓는 것은 사실상 영구처분장, 핵폐기장을 만드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이해당사자인 원전 주변 주민의 의견 수렴 없이 법안을 마련, 상정한 것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만행”이라면서 “법안 폐기만이 정답”이라고 밝혔다. 특히 “탈핵에 적극적이던 민주당의 의원들이 이 같은 법안을 냈다는 점에서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부산과 울산, 경북, 전남 등 원전 소재 지역에서는 광역자치단체 차원에서 반대 의견을 내고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가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안을 찾지 못해 이번 사태가 촉발됐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법안 핵심은 영구처분시설 입지 선정인데
해당 원전 구역 내 시설 지어 보관하게 해
울산 등 “공론화 없었다” 법안 폐기 촉구

지난달 23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 고준위특별법안이 상정됐다. 법안의 핵심은 사용후핵연료 관리업무를 전담할 독립적인 행정위원회를 국무총리실 산하에 신설해 관리정책 수립, 영구처분시설 입지 선정을 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법안의 ‘제32조(원자력발전소 부지 내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의 설치·운영)’가 문제가 됐다. 제32조를 보면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장을 완공하기 전까지 사용후핵연료를 해당 원전 구역 내에 저장토록 하고 관련 시설을 짓게 했다. 부산과 울산의 원전에서 발생한 사용후핵연료는 다른 지역으로 배출할 수 없고 부산과 울산의 원전 부지에 저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법안을 대표발의하고 산자중기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한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노원구병)은 이 시설이 ‘임시 저장’ 성격을 지닌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법안에 대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원칙과 절차 및 관리시설의 부지 선정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관리의 민주성, 책임성,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과 미래세대의 안전에 이바지한다”고 설명했다. 국회는 조만간 고준위특별법에 대한 입법공청회를 열 예정이다. 그러나 주민들과 환경단체는 임시저장시설이 아닌 ‘영구처분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 고준위특별법은 이 시설의 사용후핵연료 보관 기간을 정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영구처분을 위한 해법이 없는 상황에서 보관 기간조차 명시하지 않은 것은 원전이 영구처분장이 된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원자력발전소가 밀집한 부산과 울산의 환경단체는 일제히 ‘법안 폐기’를 촉구하고 나섰다. 탈핵부산시민연대는 지난달 22일 부산시청 앞에서, 전국 탈핵·환경단체 등으로 구성된 ‘고준위 핵폐기물 전국회의’는 이틀 후 서울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안 폐기 등을 촉구했다. 월성원전과 고리원전에 둘러싸인 울산은 ‘법안 폐기 투쟁’에 나설 태세다. 55개 단체로 구성된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탈핵울산시민행동)은 법안이 상정된 지난달 23일 법안 반대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용석록 탈핵울산시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특별법은 원전산업계의 골칫거리인 핵폐기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라고 말했다. 탈핵울산시민행동은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24명에게 법안 폐기 요구서와 법안 내용의 이해도를 묻는 질의서를 보내기도 했다.한빛원전이 있는 전남 영광군에서도 반발이 커지고 있다. 영광군과 군의회,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사용후 핵연료 공동대책위원회’는 8일 전체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영광군 관계자는 “지역 주민들의 대부분은 ‘이 법은 안 된다’며 황당하다는 반응”이라면서 “원전이 있는 다른 자치단체와 연대해 공동으로 대응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월성원전과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시설이 있는 경북 경주시의 환경단체도 반발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상홍 탈핵경주시민공동행동 집행위원장은 “공론화 과정 없이 법안이 너무 성급하게 만들어졌다”며 “원전 지역 주민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전국의 각 원전 부지가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장으로 전락하게 됐다”고 말했다. 원전 소재지 인근 자치단체들도 반발하고 있다. 전국원전인근지역동맹은 고준위특별법안이 발의된 직후 “사용후핵연료를 서울·경기를 비롯한 원전이 없는 곳에 분산·배치한 뒤 영구처분장을 선정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단체는 부산 해운대구, 울산 중구, 강원 삼척시, 전북 부안군, 전남 무안군, 경북 포항시, 경남 양산시 등 전국 16개 기초단체가 2019년 결성했다.

원전이 위치한 자치단체는 아직까지는 신중한 입장이다. 부산 기장군, 울산 울주군, 전남 영광군, 경북 경주시, 울주군 등 5개 지자체로 구성된 ‘원전 소재 지자체 행정협의회’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울산 울주군 관계자는 “특별법안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며 “지자체마다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고준위특별법안을 발의한 의원 24명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24명의 의원 가운데 지역구에 원전이 있는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서울·경기·인천 10명, 대전·충청 3명, 광주 3명, 비례 3명, 경남·강원·전북·전남·제주 각 1명으로 원전과 무관했다. 한 환경단체 회원은 “고준위특별법안을 보면 원전 지역 주민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며 “법안 발의 의원 24명 중 원전 주변 출신이나 지역구를 가진 의원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이어 “해당 의원 지역구에 폐기장을 유치한다면 적극 지지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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