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이 ‘피 토하는 심정’으로 봤다는 그 곳엔 청년들이 있다

허남설 기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11월18일 “세운지구를 보면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10년 전 계획대로만 실행했다면 서울은 지금 상전벽해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임기(2006~2011년) 중 마련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이 여전히 옳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는 종묘 앞 종로부터 충무로까지 1㎞에 이르는 주변 지역을 2015년까지 재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오 시장이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의 미래를 향한 계획을 내년 상반기까지 세우겠다”고 밝힌 대로 서울시는 현재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이다. 도심 대규모 재개발 계획을 시사한 것이나 다름 없다.

세운지구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기계, 공구, 전기, 전자 등 상가가 형성된 곳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1960년대부터 ‘도심 부적격 업체’로 낙인 찍혀 외곽 이주와 철거 대상으로 취급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비계획이 새로 수립됐다. 이명박·오세훈 시장 임기를 거치며 만든 세운재정비촉진계획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어떤 대규모 개발계획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1개 구역이 4만~5만㎡에 달하는 ‘통개발’이 밑그림이었던 세운재정비촉진계획도 개발 기대감에 부푼 투기 수요가 몰렸다 꺼지기만 반복했다.

수십년을 지속한 ‘도심 대규모 개발’ 패러다임은 박원순 시장 재임 중인 2014~2015년 전환기를 맞았다. 서울시는 통개발을 폐기하고 중·소규모 개발 계획으로 선회했다. 기계·공구 상가의 상징인 ‘세운상가’를 존치해 재생사업을 실시했다.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가 ‘노포’와 청년들의 감성을 자극한 카페·술집, 그리고 기존 기계·공구·인쇄 등 산업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 때문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때도 이쯤이다. 반면 규모가 전보다 작을지언정 재개발도 끊이지 않아 “‘산업 생태계’를 지켜달라”는 상인들의 외침도 계속됐다.

오 시장의 최근 발언은 도심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관한 논쟁을 예고한다. 세운지구 일대엔 중·소규모 개발로 이미 대기업 사옥이 일부 들어서고 있다. 강북 도심의 미래를 지금의 강남·여의도처럼 전반적으로 고층·고밀화한 중심업무지구(CBD)로 그리느냐, 아니면 일부에 이 같은 용도를 유치하되 전체적으로 기존 산업과 문화 등 역사성을 버무리는 ‘힙지로’로 그리느냐의 문제다. 경향신문은 세운지구의 현재 상황과 과거 개발·재생 정책을 진단하면서, 산업을 중심에 둔 도심 계획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제언을 싣는다.


세운상가 너머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2구역 일대와 광화문 인근 도심부가 보인다. 서울시 제공

세운상가 너머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2구역 일대와 광화문 인근 도심부가 보인다. 서울시 제공

“재개발은 해도 좋다. 모두 떠나지 않게만 해달라”

상인들이 천막을 친 건 2018년 12월7일이었다. 그때는 이 천막이 1년 넘게 갈지 몰랐다. 홍영표 한국산업용재(산업현장에 필요한 부품·장비 등 공구)협회 서울지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우리가 무지했다”고 말했다.

“그냥 하루아침에 300여명이 쫓겨났을 때였어요. 그 때 우리는 재개발이 뭔지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명절 쇠고 와보니 건물이 다 무너져 버린 거예요. 가게마다 막 2억원씩 압류가 들어와요. 압류 통지서를 집으로 보내니 가족들은 난리가 나요. 재개발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고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하는지 몰랐던 거죠.”

서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4·5구역 내 기계공구 상인들이 재개발에 반대하며 청계천 관수교 앞에 천막을 쳤을 때 이야기다. 세운지구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기계·공구 점포들이 밀집한 곳이다. 상인들의 천막 농성은 412일 이어졌다. 하지만 재개발을 막지는 못했다. 3-1·4·5구역엔 현재 주상복합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홍 지회장은 천막 농성을 하면서 “용산참사로 바뀐 거라고는 영업 보상비가 3개월치에서 4개월치로 늘어난 것밖에 없더라”는 ‘교훈’을 얻었다. 세운지구 건너편 홍 지회장의 공구가게와 산업용재협회 사무실이 있는 수표구역에도 재개발이 추진 중이었다. 3-1·4·5구역과 같은 블럭 안에 있는 3-2·3, 3-6~10 등 구역도 마찬가지였다. 천막 농성 이후 기자회견, 토론회, 집회를 한달에 한번꼴로 열고 서울시는 물론 청와대에도 호소했지만, 모든 재개발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상인들)은 여기 계속 남아야 돼요. 차라리 집이라면 그냥 떠나겠어요. 먹고 살기 위해 여기서 벌어야 하는 입장에서 쉽게 떠날 수가 없는 거잖아요. 재개발 때문에 문래동, 성수동, 파주로 떠난 사람들, 나중에 보면 거기서 폐업하고 다시 와요. 그런데 돌아와도 여긴 이제 자리가 없어요.”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2019년 1월8일 청계천 관수교 건너편 천막농성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페이스북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2019년 1월8일 청계천 관수교 건너편 천막농성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페이스북

대안이 필요했다. 홍 지회장은 재개발 시행사를 찾아가 제안했다. “우리는 법적인 건 잘 모른다. 서로 변호사 쓰면서 흙탕물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재개발을 할 거라면 인정하겠다. 다만 어떻게 하는지 얘기해 달라. 그리고 여기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달라.”

시행사는 수긍했다. 수차례 협의한 끝에 재개발 공사를 하는 동안 구역 주변을 빙 둘러 3층 높이 컨테이너 218개를 쌓아 임시점포를 제공하기로 했다. 서울시도 움직였다. 기부채납 받은 재개발 구역 일부에 16층 높이 공공임대상가를 지어 공구점포들을 입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산업용재협회는 상인들을 달래야 했다. 장사의 터전을 허무는 재개발에 우호적인 상인들이 있을리 없다. 또 지금은 대부분 1층에서 장사를 하지만 컨테이너나 공공상가에서는 상당수 상인들이 2층 이상으로 올라가게 된다. 무거운 공구를 취급하기에 보다 어려운 조건에 놓인다. 손님들의 접근성도 떨어진다. 홍 지회장은 수평에서 수직으로 바뀌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온라인 유통 확대, 공구상가 지도 제작, 체험·교육 프로그램 등이 필요하다고 상인들을 설득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홍 지회장은 “시행사, 서울시와 함께 좋은 사례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청계천변 ‘수표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구역 정비구역’ 내 한 점포 앞에 ‘청계천 산업생태계 살려내라’란 구호가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서울 청계천변 ‘수표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구역 정비구역’ 내 한 점포 앞에 ‘청계천 산업생태계 살려내라’란 구호가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기계·공구 상인들이 마지못해 재개발과 타협하면서 지켜내고 싶은 건 결국 이들이 ‘산업 생태계’라고 부르는 생존 방식이다. 같은 업종이 모여 내는 집적 효과는 물론 일대에서 발주, 부품·공구 수급, 가공이 이어지는 사슬을 무시할 수 없다.

서울시 ‘세운일대 산업 특성 조사 보고서’(2020)를 보면, 제조업체의 60.3%와 인쇄업체의 83.3%가 세운일대서 자재를 조달한다. 홍 지회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가든파이브의 상처”도 같은 맥락을 강조한다. 2003~2005년 청계천 복원 공사 당시 송파구 가든파이브로 이주한 수많은 상인들이 이 사슬의 단절과 고립 때문에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최도인 세운협업지원센터 공동센터장은 “세운지구 내 이주 궤적을 조사해 보니 60% 정도는 근방에 재정착했다. 세운상가로도 많이 들어와서 공실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산업용재협회-시행사-서울시가 만든 ‘재개발 절충안’은 도심과 산업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과연 이게 최선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세운지구의 기계·공구뿐만 아니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까지 청계천을 따라 펼쳐져 있는 인쇄·귀금속·의류 산업은 대개 퇴출 혹은 쇠퇴 대상으로만 취급 받는 상황이다. 하지만 세운상가 창업공간 ‘메이커스 큐브’나 공유오피스인 동대문 무신사 스튜디오에서 보듯 산업의 새 세대 역시 청계천변에 출현하고 있다.

기계·공구 상인들의 처지를 보면 세운지구에서는 개발이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최근 세운지구를 두고 “지나치게 보존주의적인 도시계획의 성적표”라고 했지만, ‘보존주의’로는 재개발에 밀려 세운지구를 떠도는 이주 행렬을 설명할 수 없다.

서울 세운재정비촉진구역과 수표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구역 정비구역(대상지 표시) 위치도. 서울시 제공

서울 세운재정비촉진구역과 수표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구역 정비구역(대상지 표시) 위치도. 서울시 제공

계속되는 개발은 산업용재협회에 난제를 자꾸 얹는다. 세운지구는 물론 수표구역 근처로도 계속 개발 압력이 커지는데, 수백개 점포 이주 수요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표구역 공공상가 규모 확대나 추가 건설, 인근 시립서울청소년센터의 용도 전환 등을 담은 제안서를 지난 10월 초 서울시에 보냈지만 아직까지 답은 없었다.

홍 지회장은 “오 시장님을 뵐 수만 있다면 작지만 꽤 괜찮은 ‘도심 산업 클러스터’를 만들 방안을 함께 고민해 달라고 권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재생’은 보존? 세운지구는 늘 개발 중이었다

“저희가 ‘이제 세운상가를 존치하고 살리겠습니다’라며 주민들을 만나러 다닐 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야, 됐다. 좀 있으면 또 바꿀 것 아니냐’고.”

길현기 전 서울시 역사도심재생과 주무관이 2014~2015년 서울시가 세운상가 존치를 결정할 당시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길 전 주무관은 2012~2021년 도시계획 관련 민간회사와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며 줄곧 세운상가 일대 도시재생 사업을 맡았다.

“신뢰가 많이 깨진 상태였어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비계획이 계속 바뀐 탓이죠. 상인과 토지주 의지와 상관 없이 언제는 철거한다고 했다가 언제는 또 살린다고 해왔으니까요.”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계획은 1980년대부터 꾸준히 나왔다. 각 계획의 수명은 짧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 직후부터 존재한 기계·공구 산업체들을 비중 있게 다룬 계획안은 보이지 않았다. 길 전 주무관은 “산업체는 ‘도심 부적격 시설’이라며 교외로 이전하는 게 서울시의 기본 방향이었다”고 말했다. 지속성 없고 ‘산업 생태계’에 대한 고민 없는 계획이 반복되면서 세운상가 일대는 방치됐다.

서울시가 2008년 작성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마스터플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그 과정의 기록> 98쪽

서울시가 2008년 작성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마스터플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그 과정의 기록> 98쪽

세운상가 일대 정비계획은 세운상가 2·3구역 재개발계획(1988), 도심재개발 기본계획(1994·1996·2001), 도심형 재개발사업 모델 개발(2003), 세운재정비촉진계획(2009) 등에 담겼다. 2015년엔 세운상가 일대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2015)이 수립됐다. 하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11월18일 “10년 전 계획대로만 실행했다면 서울은 상전벽해로 바뀌었을 것”이라며 자신이 완성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불러냈다. 세운지구에선 다시 불신이 들끓고 있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또다른 계획이 나온 역사가 반복될 조짐이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다른 개발계획과도 차원을 달리한다. 많은 현실적 제약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도로와 필지 형태가 반듯하지 않은 강북지역의 해법으로 이른바 ‘통개발’을 추진하는 ‘뉴타운’ 방식을 따랐다. 대형 블록으로 구획한 개발을 통해 도로 등 기반시설을 효율적으로 공급하고 도시 경관에 통일감을 입힌다는 논리다. 이에 따라 세운지구를 3만~6만㎡ 규모의 8개 구역으로 나눴고, 2015년까지 재개발한다는 ‘과감한 계획’이 나왔다.

그러면서 대형 블록 내 복잡한 이해관계 등은 간과했다. 2·3구역이 1987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뒤 소유주끼리 갈등만 겪다 2003년 실효된 역사가 다시 반복됐다. 또 당시 세운상가 내 주택엔 방 하나씩을 점유해 지분을 주장하는 사례도 득실했다. 이런 상가 소유주들과 이웃한 정비구역 토지주들을 엮어 개발을 시도하면서 지분 다툼이 극심했다. 애초 사업을 잘못 설계한 것이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스스로 엎어졌다.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주택건축국장을 지낸 진희선 전 부시장(현 연세대 도시공학과 특임교수)은 “사람들은 ‘박원순 전 시장이 잘 가고 있는 것(세운재정비촉진계획)의 목을 잡아챘다’면서 ‘그냥 놔두면 잘 됐을 것’이라고 한다. ‘천만에, 아니올시다’이다”며 “민간이 잘하고 있는 사업을 공공이 못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진 전 부시장은 “공공이 끌고 온 4구역이 지금 17년을 해도 안 됐는데 나머지가 가능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서울주택도시공사가 맡은 4구역은 통개발을 유지해 현재 상인 이주가 진행 중인 곳으로, 2004년 재개발에 착수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구역현황도(2020년 3월 기준). 서울시 제공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구역현황도(2020년 3월 기준). 서울시 제공

결국 서울시는 2014년 통개발 계획을 폐기하고 세운지구 정비구역을 8개에서 171개 중·소규모 구역으로 나눴다. 2015년엔 세운상가 재생사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세운지구는 여전히 ‘재정비촉진지구’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세운상가 재생사업 총괄계획가를 맡았던 이충기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는 “박 전 시장이 ‘재생’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재생이 아니었다. 전체 단위로 개발이 안되니 수백개 단위로 쪼개서 개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세운지구에선 산발적으로 재개발이 이어졌다. 2019년 초 6-3-1·2구역에 들어선 ‘을지트윈타워’는 중·소규모 개발 전략이 통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진 전 부시장은 대우건설·BC카드 등이 입주한 이 건물을 두고 “근처 레트로·빈티지풍 카페·음식점이 활성화되면서 일대가 확 바뀌었다”며 “재개발과 보존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말했다. 3-1·4·5, 3-6·7, 5-1·3 등 구역에서도 현재 건설사업이 진행 중이다.

문제는 통개발이든 중·소개발이든 세운지구 내 기계·공구 상인들에겐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을지트윈타워가 문을 열던 시기, 3-1·4·5구역 상인들은 청계천 관수교 앞에 천막을 치고 재개발 반대 농성을 시작했다. 세운상가에선 ‘메이커 시티(Maker City)’를 내걸고 ‘장인(기술자)’과 ‘도심제조업’의 역할을 논하는 재생사업이 활발했지만, 그 안에서만 맴도는 형국이었다. 일대는 여전히 ‘재정비촉진지구’였고 상인들은 밀려나고 있었다. ‘한번에 쫓아내면 재개발, 서서히 몰아내면 도시재생’이란 냉소가 퍼졌다. 일각에선 ‘재생=보존’이라고 주장했지만, 세운지구에선 개발이 멈춘 적이 없다.

세운지구 기계·공구 업체에 대한 대책은 2020년 들어서야 나왔다. 일대 6~7곳에 산업거점공간(공공임대상가)을 조성해 재개발구역 내 상인들이 입주하게 한다는 계획이다. 당시 박 전 시장은 “기존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이 지역 산업생태계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에 대한 조사·분석이 다소 미흡했다”고 밝혔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에서 처음 ‘도심 부적격 업체’로 낙인 찍힌 지 약 반세기 만에, 세운상가 일대 재생사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산업 생태계’가 겨우 도시계획 논의의 한 축에 든 셈이다.

세운상가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을지트윈타워(왼쪽 건물)와 청계상가(지난 4월30일 촬영).

세운상가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을지트윈타워(왼쪽 건물)와 청계상가(지난 4월30일 촬영).

‘힙지로’란 정체성…다 밀었다면 이 청년들이 있겠나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1960년대 세운상가를 설계하면서 종묘부터 남산까지 걷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세운·청계·대림·삼풍·풍전·신성·진양상가 양쪽에 날개처럼 달린 3층 높이 공중보행로를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구간을 짓지 못하면서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50여년 뒤 서울시 세운상가 일대 재생사업이 ‘김수근의 꿈’을 되살렸다. 2017년 청계천 위로 세운상가와 청계·대림상가를 잇는 것부터 시작한 공중보행로 연결 사업은 현재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금 세운·청계·대림상가를 잇는 350m 보행로에선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음향기기 수리업체와 철학전문 책방, 고무·실리콘 패킹업체와 카페·술집, 조명·전자기기 판매업체와 갤러리가 교차된다. 맞은편 컨테이너 창업공간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선 제품·인쇄 디자이너들이 일한다. 새 것과 오랜 것, 먹고살기 위한 것과 즐기기 위한 것이 뒤섞인 ‘힙지로’의 축소판이다. 2009년 세운재정비촉진계획대로 세운상가나 을지로 일대를 일소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모습이다.

지난 11월27일 세운상가 공중보행로에서 열린 ‘도시기술장’에서 시민들이 세운상가 내 기술자·청년창업가들이 제작한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세운협업지원센터 제공

지난 11월27일 세운상가 공중보행로에서 열린 ‘도시기술장’에서 시민들이 세운상가 내 기술자·청년창업가들이 제작한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세운협업지원센터 제공

세운상가 보행로와 을지로의 현재는 도심의 형태와 내용 모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진희선 전 서울시 부시장은 “다양한 생태계와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도시를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공무원이 됐을 때만 해도 ‘저기를 한번에 밀어버리고 깔끔하게 바꿀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게 도시의 매력이 되더라”며 “큰 건물 뒤에 자글자글한 골목이 있는 도시, 관광객들도 그런 매력에 빠져든다”고 했다. 진 전 부시장은 1988년부터 건축·도시 분야 공무원으로 일했다.

도시의 역사성을 존중하는 계획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기조는 서울시가 과거 한양도성 안쪽을 ‘역사도심’으로 규정한 ‘2030도시기본계획(2014)’과 ‘역사도심 기본계획(2015)’에 담겼다. “도심부 상업지역 3분의 1에서 철거형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래된 건축물 등 역사 자원과 공존하는 ‘점진적 정비’를 지침으로 삼았다. 그 방법으로 길과 필지 형태를 유지하면서 개발하는 ‘소(小)단위 맞춤형 정비’를 제시했다. 서울시가 2009년 8개 대형구역으로 구성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를 2014년 171개 중·소구역으로 잘게 나눈 것이 그 예다.

서울시 <역사도심 기본계획>에서 ‘역사도심’으로 규정한 과거 한양도성 안쪽 도심부 건축물 용도를 표현한 그래픽. <역사도심 기본계획> 25쪽 중 일부 발췌

서울시 <역사도심 기본계획>에서 ‘역사도심’으로 규정한 과거 한양도성 안쪽 도심부 건축물 용도를 표현한 그래픽. <역사도심 기본계획> 25쪽 중 일부 발췌

건물과 길, 필지 등 오래된 물리적 환경의 보전은 의외로 도시에 새로운 내용을 촉진하는 조건이 된다. 무엇보다 아직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청년 세대가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서울도시연구>에 게재된 길현기 전 서울시 역사도심재생과 주무관의 논문 ‘도시재생사업의 신규입주업체 유형별 특성 및 거점시설 만족도의 영향요인에 대한 연구’를 보면, 세운·청계·대림상가에 자발적으로 입주한 업체는 2016년 8개에서 2020년 94개로 계속 늘었다. 디자인·문화예술·식음료 등 청년 창업자·종사자가 주류인 업종이 절반을 넘는다. 길 전 주무관은 “입지는 좋은데 임대료는 다른 도심부에 비해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세운상가의 낙후된 환경이 되레 새로운 세대를 불렀다.

이들이 도심에 유입된 배경으로는 기존 ‘산업 생태계’를 빼놓을 수 없다. 길 전 주무관은 “초기엔 문화·예술, 식음료 등 새로운 업종이 입주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 산업과 유사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디자인, 도소매 업종이 입주했다”며 “새 업종과 기존 업종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고 했다. ‘역사도심 기본계획’에서도 을지로부터 동대문까지 펼쳐진 기계·금속, 귀금속, 의류·봉제, 종이·인쇄 등 산업을 도심에 다양성과 활력을 주는 요소로 봤다.

새 세대와 기존 산업의 네트워크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우선 서울시가 세운상가에 조성한 창업공간 ‘메이커스 큐브’엔 청년이 주축인 제품·인쇄 디자인 스튜디오 등 17개 업체가 활동 중이다. 세운상가 일대 산업과 연계한 사업 계획이 주요한 입주 조건이다. 이들의 디자인과 일대 기술력이 합쳐 블루투스 스피커 등 제품을 출시했다. 최도인 세운협업지원센터 공동센터장은 “입주 경쟁률이 매번 10 대 1을 넘는다”고 말했다.

을지로 조명 유통업체와 디자이너들의 협업 체계를 구축한 브랜드도 있다. 이 브랜드는 ‘을지로에서 오랜 세월 숙련된 장인들과 협력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매장에 필요한 ‘키네틱(스스로 움직이는)’ 설치품을 제작하기 위해 찾은 곳이 세운상가와 을지로다. 의류·원단 도·소매 점포가 밀집한 동대문엔 패션 브랜드 ‘무신사’가 2018년 6월부터 중·소 브랜드 육성과 창업을 지원하는 ‘무신사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다.

세운상가 창업공간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 입주한 ‘어보브 스튜디오(ABOVE studio)’가 세운상가 내 기술자 류재용씨와 협력해 만든 블루투스 스피커 ‘KNOT, SOUND ABOVE’(왼쪽).  오른쪽은 어보브 스튜디오가 세운상가·세운지구 기술자들과 함께 제작하고, 최근 강남 파이낸스센터에 설치한 ‘The FACADE OF The SNOW PAVILION’. 세운협업지원센터·어보브 스튜디오 제공

세운상가 창업공간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 입주한 ‘어보브 스튜디오(ABOVE studio)’가 세운상가 내 기술자 류재용씨와 협력해 만든 블루투스 스피커 ‘KNOT, SOUND ABOVE’(왼쪽). 오른쪽은 어보브 스튜디오가 세운상가·세운지구 기술자들과 함께 제작하고, 최근 강남 파이낸스센터에 설치한 ‘The FACADE OF The SNOW PAVILION’. 세운협업지원센터·어보브 스튜디오 제공

세운지구의 경우, 새 세대가 진입하면서 금속·인쇄·전자 등으로 업종 밀집지역을 구분하는 게 점점 더 무의미해지고 있다. 옛 산업 생태계는 새 세대의 아이디어와 융합하거나, 마치 세운상가 보행로처럼 다양한 업종이 공존하는 생태계로 진화 중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힙지로’란 말에서 보듯, 을지로와 세운지구 일대에서 일하거나 노는 게 어떤 세대에겐 하나의 정체성이 됐다.

진 전 부시장은 “미국 보스턴에선 기술 발달로 공해 문제가 해결되자 제조공장을 다시 시내로 끌어들이며 한 지역 안에서 일하고 먹고 놀고 자는 ‘네이버후드(neighborhood)’가 형성됐다. 세운의 미래도 그런 방향으로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에 인재들이 모여들고, 도시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실제 재개발구역 기계·공구 상인들에 제공할 공공임대상가와 청년주택을 복합하는 계획이 추진된 바 있다.

서울시는 현재 을지로와 동대문, 청계천 등 도심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준비 중이다. 전임 시장 정책이 보존 일변도였다며 전반적으로 재검토되는 분위기인 만큼 적잖은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논의 구도는 ‘개발이냐 보존이냐’며 도시의 경관·형태 측면에만 집중된다. 건설업계는 이윤이 많이 남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공급하려 눈독을 들인다.

최도인 센터장은 “물리적 계획뿐만 아니라 그 안에 실재하는 도심 산업의 잠재력과 지향점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심 산업은 변화에 적응하며 여전히 살아있는 거대한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로부터 정보공개청구로 받은 ‘역사도심 특화산업 발전방안 연구 보고서 자료집(2020)’에 따르면, 종로구·중구에 있는 귀금속·제작인프라·인쇄·의류 등 업체는 1만9000여개로 약 4만5000명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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