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영화’의 개척자이자 조상이라 불리는 영화감독 신지승씨(58)와 프로듀서 이은경씨(52) 부부가 일을 벌였다. 접경지역 산골에서 국제마을영화제의 사전행사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강원 인제군 서화면 서화2리의 ‘마을극장 DMZ’를 찾았다. 빨간 외벽이 인상적인 이곳은 부부의 살림집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마당 앞에는 한때 쌍둥이 남매 하륵·하늬(11)와 공영주차장을 전전하며 ‘노마드’ 생활을 할 때 타고 다녔던 5톤 트럭이 전시물처럼 세워져 있었다. 트럭 옆면에는 하얀 천으로 만든 야외극장용 대형 스크린이 펄럭거렸다. 2017년 겨울, 신 감독의 가족이 인제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화리는 ‘영화마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신 감독·이 PD 부부가 산파역을 한 ‘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는 예정대로라면 지난 15일 열렸어야 했다. 코로나19가 다시 유행하면서 내년 6월로 연기된 상황이다. 대신 사전행사 형식으로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주요 출품작을 상영하기로 했다. 영화제의 작명 설명에 신 감독이 덧붙였다. “끄트머리는 절벽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연결하는 문이에요. 영어로는 ‘철학적 궁지’의 뜻을 담은 ‘아포리아(Aporia)’라고 썼는데, 거기서 시작되는 가능성과 희망을 뜻합니다.” 85개국 750여편의 영화가 출품됐다.
지난 17일 영화제의 첫 사전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은 신 감독의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대피소 극장’. 접경지 마을의 영화제답게 주민대피시설을 활용한 것이다. 나이 지긋한 마을 주민들이 영하 10도의 칼바람을 뚫고 하나둘씩 입장하면서 출입구 옆에 마련된 ‘포토월’에 서서 간단한 포즈를 취했다. 이들은 이날 공개될 영화의 배우들이기도 하다. 국내외 단편영화들이 이어서 상영됐다. 서화리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PD의 마을영화 <금강산 가는 길>이 상영되자, 배우로 출연한 관객들이 객석에서 술렁였다. 암전 속에서 눈빛들이 반짝였다.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기록한 이진영 감독의 <무지개나라의 유산>이 초청작으로 이어졌다. 꽤 긴 시간 70~90대의 관객들은 영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행사는 짜인 격식 없이 소박했다. 명색이 국제영화제지만 지자체나 외부의 지원은 없었다. 신 감독 부부는 진행·촬영·사회·안내까지 도맡았다. “돈 수십억 가지고 영화제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자본으로 획일화되고 매끈해지는 건 이들의 생리에 맞지 않다. 신 감독은 “작고 가난해도 화려할 수 있는 예술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다시 ‘마을극장 DMZ’. 이번에는 앞마당에서 즉흥적으로 마을영화 촬영이 시작됐다. 이 PD가 배우들에게 연기할 상황을 설명한 뒤 카메라를 잡았다. 친구와 놀던 아들 하륵군이 슬레이트를 쳤고, 작업을 위해 마을을 찾은 이재정 사진작가가 붐 마이크를 들었다. 이웃인 이성형(75)·김경자(68)씨 부부가 연애시절 봤던 영화의 추억을 되살려 대본도 없이 대사를 주고받았다. 연기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을영화는 주민들과 협업을 하는 겁니다. 주민들은 창작적 동반자이자 향유자가 되는 거예요. 단순히 문화예술적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신 감독이 영화에서 찾는 의미다. 전국을 돌며 지난 20여년 만든 마을영화가 100편을 훌쩍 넘었다.
부부의 새해 계획을 물었다. 신 감독은 영화제 본행사가 열려 외국 감독들이 찾아오면 전국의 마을을 찾아가는 ‘노마드 영화제’를 해볼 생각이다. 이 PD는 마을영화를 이어가면서 관객과의 교류와 공감의 폭을 넓혀보겠다고 했다.
취재차량의 거울 속에서 부부는 기자를 향해 한참이나 손을 흔들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음성이 차창을 건너왔다. 마을은 간밤에 내린 함박눈에 하얗게 뒤덮였다. 마을영화에 잘 어울릴 듯한 ‘엔딩’장면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