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NL-PDR’ 이론 정립
전두환 정권 고문에 평생 후유증
“이 사회의 억압 구조에 분노하는 청춘.” “37년간 투병 중 끝없이 공부하고 썼던 비운의 천재.”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이을호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의 빈소에서 동지들은 고인을 이렇게 회고했다. 민청련 창립 멤버였던 장신환씨(66)는 “통일, 민족, 민주화, 사회계층 문제 등 사회 전반에 관심이 깊었다”며 “고문 피해로 양극성 장애가 생겼는데 오롯이 본인과 가족이 감당해야 해 친구들이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1984년부터 민청련 활동을 한 김희택씨(72)도 “민주화 운동을 어떤 방법과 방향으로 추진해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연구해 토론을 이끌었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67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인은 1980년대 재야 운동권의 핵심 논제였던 ‘NL-PDR 이론’을 정립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겪은 모진 고문으로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린 고문 피해자이기도 했다. 유족은 이 전 부위원장이 전날 오전 10시41분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달 18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서울 경희의료원에 입원했다. 이후 코로나19는 완치했으나, 기저질환에 따른 후유증으로 상태가 악화돼 1월 초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영면했다.
고인은 1955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를 수석 졸업한 뒤 1974년 서울대 사회계열로 입학했다가 철학과로 전과했다. 4학년이던 1977년 소설가 김영현, 시인 김사인 등과 함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처음 구속됐다. 전주고·서울대 동창인 전재주씨(67)는 이날 추모식 때 낭독한 편지에서 “옛날 민청련 활동 때의 열정으로 요즘 상황에 대한 명징한 해결책을 알려준다면 좀 좋겠는가”라고 했다.
고인은 1983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단체 민청년 창립에 참여한 뒤 기획실장, 정책실장, 상임위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당시 운동권의 운동론을 CDR(시민민주혁명론), NDR(민족민주혁명론), PDR(민중민주혁명론) 등 세 가지로 정리해 ‘C-N-P 논쟁’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1985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검거된 후 김 전 의장과 더불어 남영동 대공분실과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 증세가 나타나 정신병원에 유치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고인은 훗날 “무차별 구타를 당한 후 스스로가 올빼미로 생각되고,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6년 6월 구속집행 정지 결정으로 풀려났지만 2011년까지 25년간 1년에 3개월 정도는 정신질환 증세로 인해 입원할 만큼 고문후유증이 지속됐다.
고인은 대학 졸업 뒤 출판사 지학사와 중원문화 등에서 일했으며, <세계철학사>(전 12권, 중원문화)를 번역했다. 2018년에는 우석대 김근태연구소 부소장으로 취임했다.
유족으로는 고인의 민청련 동지이기도 했던 부인 최정순 서울시의원, 자녀 준의·준아, 사위 정병훈씨가 있다. 딸 준아씨는 “아버지는 끝내 순수하고 아름다운 분이었다”고 추억했다. 그는 “아버지는 평생을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던 청년시기 속에 사셨다”며 “고문후유증 때문에 가족 모두가 고통스러웠지만 아버지의 그 순수한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이어 “항상 나라를 걱정하셨고, 류마티스 등으로 건강이 악화하는데도 본인이 가진 철학과 사상을 지인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하셨다”고 덧붙였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다. ☎ 02-2072-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