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자씨를 담기에 '집사람'은 너무 작은 이름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장희자씨(62)는 5남매 중 맏딸이다. 한 남성의 아내, 두 아들의 엄마다. 며느리이자 시어머니다. 이것은 모두 ‘관계 속의 희자씨’에게 붙은 이름들이다. 희자씨는 운수회사의 뛰어난 경리사원이었다. 두 아들을 반듯하게 키워낸 양육전문가다. 부모를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아픈 시부모를 간호한 돌봄전문가다. 20년 넘게 자원봉사를 한 봉사전문가다. 이것은 모두 희자씨가 해온 일들이 만든 이름이다. 기쁠 희(喜). 아들 자(子). 희자씨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받쳐주는 총무 역할만 맡는 것 같은 인생이 속상할 때도 있었다. 60대가 된 희자씨는 자신의 이름을 좋아한다. 직함은 없지만 가정에서 중요한 일을 해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가족에게도 이웃들에게도 기쁨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집사람’. 희자씨처럼 결혼 후 집안일을 도맡아 온 여성들을 우리 사회는 집사람이라 불러왔다. 국립국어원과 여성정책연구원이 집사람을 성차별 용어로 지정한 것이 2008년이지만 여전히 많은 남성이 자신의 배우자를 집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가사 일이 법적 노동으로 인정받은 것은 2021년 5월.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이후 무려 68년이 지나서야 가사노동자는 노동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희자씨는 직업을 물었을 때 “집에서 놀아요”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했다. 집사람들은 정말 집에서 놀았을까. ‘K장녀’로 태어나 집사람으로 살아온 희자씨를 지난해 10월부터 여섯 번에 걸쳐 인터뷰했다. 희자씨의 이야기다.

장희자씨의 일터는 집이다. 5남매 맏딸이자, 5남매 맏며느리인 희자씨는 두 아들을 양육했고, 시부모를 간병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장희자씨의 일터는 집이다. 5남매 맏딸이자, 5남매 맏며느리인 희자씨는 두 아들을 양육했고, 시부모를 간병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장희자. 1960년생이에요. 전후 세대죠. 우리 집은 원래 강원도였어요.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 아시죠. 거기가 제 태를 묻은 곳이에요. 세 살 때쯤 충남 공주로 가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어요. 아버지가 쌀장사를, 엄마는 충남상회라는 가게를 하셨어요. 도로 옆에서 차표랑 여러 가지 것들을 파는 작은 구멍가게였어요. 비교적 풍족했던 것 같아요. 친구들은 책가방을 보자기로 했는데, 나는 진짜 가방을 메고 구두를 신고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그러다 아버지 일이 잘 안 돼서 수원으로 가셨는데, 수원에 자리를 잡는 두 달 동안 부모님이 오빠랑 나를 옆집에 맡겨두셨어요. 무서웠어요. 부모님이 정말 찾으러 올까. 다들 못 살겠다고 할 때니까 아이들을 고아원에도 보내고 입양도 보내고 할 때였거든요. 그때 철이 다 든 것 같아요. 아홉 살에.

남의 집에서 오빠랑 둘이 있었는데 세 살 많은 오빠를 내가 챙겼어요. 부모님이랑 합친 뒤에도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착한 병’이 든 것 같아요. 힘들다는 소리 하지 말고 솔선수범해야 되고. 동네 어른들이 그랬어요. 희자는 안에 구렁이가 들어앉아 있다고. 아래로 3세, 6세, 9세 차이 동생이 있어요. 5남매 맏딸로 크면서 동생들을 챙겼죠. 59세 동생이 지금도 전화하면 “네, 언니”라고 해요. 엄마 같은 언니였던 거죠. 요즘 다리에 봉침을 맞으러 다녀요. 정말 아픈데 ‘아’ 소리도 안 내요. 한의원에서 이렇게 참는 사람 처음 봤대요. 어릴 때부터 참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가 봐요.

2일 희자씨가 경기 안산 집에서 어머니 석향옥씨(88)와 이야기를 나눈 뒤 웃으며 나오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2일 희자씨가 경기 안산 집에서 어머니 석향옥씨(88)와 이야기를 나눈 뒤 웃으며 나오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학교요…….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어요. 등록금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낮엔 대학교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어요. 야간고 다니는 애들은 다 그렇게 일했어요. 밤에 학교 나왔단 얘길 하는 게 오랫동안 부끄러웠어요.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내공이 쌓인 거죠. 졸업하고 운수회사로 갔어요. 교수님들이 다 말렸어요. 운수회사가 얼마나 험한데 거길 가냐고요. 학교에 있으라고요. 학교에 있으면 편한데… 맨날 꼬맹이일 것 같았어요. 언제까지나 ‘장양’일 것 같았어요. 성장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운수회사에서 전표랑 돈 세는 것부터 시작해서 경리과까지 갔죠. 성실하게 일했어요. 몇 년 지난 것도 물어보면 술술 얘기하니까 윗분들이 나만 찾았어요. 월급 받으면 꼭 책을 사서 봤어요. 알뜰히 모아서 엄마한테 드렸지만, 남은 돈으로 아껴 쓰며 재밌게 살았어요. 퇴근하고 지역 YWCA에서 하는 수화강좌도 들었어요. 직장 다닐 때 만난 언니들이랑은 지금도 자주 만나요. 그때 우리 참 많이 참고 살았다고 얘기해요. 남존여비 사상이 심할 때니까요. 요즘 ‘미투’라고들 하잖아요. 그때는 “여자니까…” 이런 말도 많이 들었고, 지나가면서 엉덩이를 툭툭 치거나 어깨를 주무르는 일도 많았죠. 너무 싫지만 항의하거나 그런 걸 못했어요.

작은아버지가 중매를 서서 선을 봤어요. 그때 내가 스물일곱. 오빠가 서른이었는데 엄마가 길에 나가질 못했대요. 아들, 딸이 시집 장가 못 간 게 부끄러워서. (남편이) 한 달 동안 매일 찾아와서 결혼하자고 했어요. 인천 직장에서 수원까지 2시간 반 거리를 온 거죠. 선본 지 한 달 20일 만에 결혼했어요. 잘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한 거예요(웃음). 그땐 도피였던 것도 같아요. 집에서 독립하려면 결혼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난 그래도 한 달 동안 매일 봐서 성실한 사람이구나 정도는 알고 했지만, 그땐 몇 번 안 만나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직장은 결혼하면 안 나오는 게 당연했어요. 옷 자체가 달라졌어요. 홈드레스로. 살림하고 애 키우고. 자연스럽게 현모양처 코스로 들어간 거죠. 엄마, 며느리… 처음엔 다 어려웠죠.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 누가 가르쳐주지 않잖아요. 우리 땐 <여성대백과>가 혼수였어요. 갓난아기 먹이는 음식부터 살림, 관혼상제까지 세트로 나와 있었어요. 임신했을 때 인천 시민회관 가서 부모교육 강좌 듣기도 했고, 신문 보면서 정보를 많이 얻었어요. 출산하자마자 프뢰벨, 몬테소리 전집을 샀어요. 남편 월급이 30만원이었는데, 전집은 65만원이었어요. 내 것은 안 사도 아이들 교육에는 욕심을 낸 거죠. 그땐 책에 의존해서 많은 걸 배웠던 것 같아요. 요리는 (궁중요리 무형문화재) ‘황혜성 요리백과사전’으로(웃음).

남편이랑 살림이나 육아를 나눠서 한다는 생각은 못해봤어요. 매일 오전 5시30분이면 일어나서 밥을 준비했어요. 두 아들 학교 보내고 청소하고. 낮잠 잘 시간도 없이 바빴던 것 같아요. 밤에 일찍 잔 것도 아니에요.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땐 밤 12시까지 공부하다 오니까 내가 운전해서 데리러 갔어요. 집안일도 일이지만,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내 생활도 아이들 학교에서 오는 시간,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이 기준이었던 것 같아요. 시댁이 경기 화성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주말엔 가서 농삿일을 도왔어요. 그때 농삿일 도우려고 운전면허를 땄어요.

희자씨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뒤편엔 희자씨와 가족들의 추억이 담긴 그릇들이 차곡차곡 놓여있다.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희자씨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뒤편엔 희자씨와 가족들의 추억이 담긴 그릇들이 차곡차곡 놓여있다.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돈 버는 일을 안 한 건 아니에요. 동네에서 엄마들끼리 수공예 부업도 많이 했고… 여동생이 사진현상소를 했는데 사진관을 돌며 영업을 했어요. 10년 정도 했죠. 집안일 하면서 낮에 틈틈이. 한 달에 120만원씩 받았는데 그 돈 모아서 집도 늘려갔어요. 그런데도 인정을 못 받았어요. 남편은 전화하면 ‘애들은?’ 하고 물었어요. 일이라기보다 그냥 동생 일 도와준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다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게 됐거든요. 내가 수입이 있으니까 남편한테 걱정하지 말라며 여행을 보냈어요. 돌아와선 나 일하는 걸 보더니 남편이 ‘운전해줄까?’ 그러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남편이 내가 일을 한다고 인정해줬던 것 같아요. 금모으기 운동할 때 주부들이 정말 열심히 했잖아요. 나도 아끼던 반지를 내놨어요. 막내 올케가 스페인 사람인데 “어떻게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고 자기가 가진 금을 내놓느냐”고 놀라워해요.

시부모님이 편찮아지시면서 아파트 옆 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아버님이 투석을 받아야 해서 내가 운전하고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어요. 처음 10년은 한 달에 2~3번씩 안산에서 서울로, 1주일에 3번씩 투석하신 2년 동안은 안산 병원으로. 가까이 사니까 가서 반찬도 넣어놓고 청소도 하고 그랬죠. 두 집 살림을 오래 했어요(웃음). 아버님 돌아가시고는 어머님을 집으로 모셨어요. 담도암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셨어요. 병원에 가면 딸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렇게 15년을 했네요. 지난해 7월부턴 친정엄마가 와 계세요. 원래 정정하셨는데 노환이 왔어요. 돌봄이 끝이 없어요(웃음). 어른들 하루 세끼 차리는 게 참 어려워요. 사실 나이 들면 부모님을 간호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놓기도 했어요. 그렇게 다 받아들이며 산 것 같아요. 힘들다고도 억울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남편도 내가 시부모님께 하는 걸 봐서 그런지 장모한테 잘해요. 자식들에겐 기대하지 않아요. 아프면 요양병원 가야지 생각해요. 우리 세대가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아들이랑 며느리가 같이 일하고 살림하고 그런 거 보면 참 좋고 이뻐요.

먼지를 털어내고 정리하는 희자씨 뒤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먼지를 털어내고 정리하는 희자씨 뒤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높은 수납장에서 그릇을 꺼내는 희자씨.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높은 수납장에서 그릇을 꺼내는 희자씨.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봉사활동을 한 지는 오래됐어요. (1990년대 정부가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사할린에 강제징용됐던 분들이 안산 (임대아파트단지) 고향마을로 이주할 때 그 가족들의 정착을 돕는 일을 했어요. 우리 집에 모셔오기도 하고… 10년쯤 하다 내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됐어요. 2011년부터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난해에 홍보모델로 선정이 돼서 전국에서 오신 봉사자분들이랑 사진을 찍었는데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그때 홍보모델 명함을 만들어주셨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내 인생 처음으로 명함을 받은 건데 어디 줄 곳이 없더라고요. 조금 서글펐어요.

삶을 돌아보면 가족들에게 늘 미안해했던 것 같아요. 보통 일하는 것을 경제적으로 가정에 보탬이 되느냐로 보잖아요. 돈을 벌기도 했지만 내가 주로 한 일은 일이라기보다 일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가 할머니가 됐는데 (일하는 친구 딸을 대신해) 손녀를 5년 동안 같이 돌봤어요. 친구 딸이 “희짜 할머니(친구의 손녀가 희자씨를 부르는 애칭)는 1등 이모님이에요. 서울 가면 한 달에 300만~500만원이에요”라고 했을 때도 정말 그럴까 했어요. 내 이름도 잘 얘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엄마들 모임 가면 20년 가까이 만나도 본명을 모를 때가 많아요. 누구 엄마라고만 부르니까.

희자씨가 많은 시간을 보낸 주방 앞에 섰다. 요리 솜씨가 좋은 희자씨는 지난해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이준헌 기자heon@kyunghyang.com

희자씨가 많은 시간을 보낸 주방 앞에 섰다. 요리 솜씨가 좋은 희자씨는 지난해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이준헌 기자heon@kyunghyang.com

명함을 만든다면요? 글쎄… 맏딸, 맏며느리, 총무, 요양보호사, 한식조리사, 베스트 드라이버? (웃음) 그냥 자원활동가요. 봉사는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거든요. 아들이 저한테 상담공부를 해보라고 해요. 엄마는 정말 잘할 수 있을 거라고요. 저랑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가진 아픔을 들어주고 싶어요. 늘 내 인생은 뭐였을까 생각하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밖에 없지 않나 생각했는데요. 이렇게 얘기해보니까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지금까지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내가 해 온 일에 대해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엄마 저녁 봐드리러 이만 가야 돼요. ‘집사람’ 친구들, 우리 멋있어요. 우리 모두 수고했어요.

희자씨는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다. 희자씨의 웃음과 눈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았다. 희자씨의 꿈은 마음이 춥고 아픈 사람들을 보듬는 것. 희자씨가 평생 해왔고 가장 잘 하는 일이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희자씨는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다. 희자씨의 웃음과 눈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았다. 희자씨의 꿈은 마음이 춥고 아픈 사람들을 보듬는 것. 희자씨가 평생 해왔고 가장 잘 하는 일이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젠더기획 특별취재팀
장은교(젠더데스크) 이아름·심윤지(플랫) 조형국·이수민(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이하늬(정책사회부) 이준헌(사진부) 최유진(뉴콘텐츠팀) 김윤숙(교열부)


[젠더기획]어느날 그들의 노동이 사라진다면
(https://www.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22020406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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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기획]희자씨를 담기에 '집사람'은 너무 작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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