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여자가 되어라" 딸에게 전하는 순자씨의 진심

심윤지·장은교 기자

윤순자씨(68)는 고3이다. 올해의 고민 중 하나는 ‘고3답게’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수능을 볼까 말까. 대학에 갈까 말까. 올가을쯤 결정할 생각이다. ‘담양도립대가 2022년부터 신입생 전원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기사를 봐두긴 했다. ‘60대답게’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서두르지 않는다. 인생의 많은 것이 얼마나 느닷없이 결정되는지 순자씨는 안다. 순자씨는 32년 동안 운영한 식당을 2014년 정리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통과해 전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교에 들어갔다. 공부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지만. 돈 떼먹는 손님들 붙잡으러 뛰어다니는 것보단 영어, 컴퓨터 때문에 머리 아픈 게 낫다. 순자씨에겐 딸이 셋 있다. 평생의 꿈이었던 공부를 시작한 순자씨는 ‘대학생’이 되어 ‘일하는 여자’가 된 딸들의 삶이 자신의 삶과 얼마나 다른지 알고 싶었다.

2022년 ‘고3’이 된 윤순자씨가 교과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못배운 것’이 평생의 한이었다는 그는 32년간 운영한 식당을 그만둔 후 중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현재는 광주의 한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의 고민은 ‘고3’답게 대학진학이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2022년 ‘고3’이 된 윤순자씨가 교과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못배운 것’이 평생의 한이었다는 그는 32년간 운영한 식당을 그만둔 후 중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현재는 광주의 한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의 고민은 ‘고3’답게 대학진학이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함께 식당을 운영했는데 아빠는 ‘사장님’이고 엄마는 ‘사모님’이었다. 더 많은 일을 한 건 엄마였는데, 명함도 집도 아빠의 이름이었다. 왜 그랬을까. 순자씨의 셋째딸 마혜원씨(36)는 뒤늦게서야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직장을 그만둔 후였다. 엄마는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버텼을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혜원씨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감은 늘 일하던 엄마였다. 혜원씨는 늘 지쳐보였고 자주 화를 냈고 가끔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던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젠더기획 세번째는 서로의 노동을 바라보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지난해 10월부터 3번에 걸쳐 순자씨와 혜원씨를 만났다. 54년생 순자씨와 86년생 혜원씨는 여성노동자 대 여성노동자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남존여비의 시대부터 페미니즘의 시대까지, 두 여성이 그려온 노동의 궤적은 다른 듯 겹쳐졌다. 순자씨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일하는 여자가 되라”던 엄마

전라남도 화순 운곡마을에서 2남5녀 중 넷째로 태어난 순자씨는 못 배운 것이 늘 한이었다. “딸들은 학교에 안 보내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고, 동네 (여자)친구들도 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만 다녔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순자씨의 생각은 국민학교 졸업 후 50여 년간 다양한 노동을 경험하며 바뀌었다. “가게(식당)를 전남도청 앞에서 했거든요. 도지사님도 오시고…공무원들도 오고. 그런 사람들 상대하니까 주눅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는 나왔겠지 생각할 것 같았으니까.”

순자씨(가운데)의 17세 때 사진. 전남 화순 운곡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찍었다. 윤순자씨 제공

순자씨(가운데)의 17세 때 사진. 전남 화순 운곡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찍었다. 윤순자씨 제공

순자씨는 국민학교 졸업 후 돈버는 일을 시작했다. 14~15살 때 동네에서 저수지를 만드는 곳에 가서 심부름을 하고 밀가루를 받아 와 집에 와서 죽을 쒀먹었다. 큰 오빠와 함께 광주로 가 자취를 하면서, 오빠는 학교를 다니고 순자씨는 작은 공장에 다니며 오빠의 학비를 벌었다. “꿈 같은 것은 없었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때문에 오빠 뒷바라지 해야되는 줄 알았지.” 20대에 순자씨는 당시 광주에서 제법 큰 규모였던 원단공장(일신방직)에 다녔다. 3교대로 근무해서 힘들었지만 “힘들어도 그만둔다는 생각은 안 했어. 이건 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라고 순자씨는 말했다. 순자씨는 “오빠가 잘 되면 우리도 괜찮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지금 돌아보니 내가 잘 되고 봐야한다”고 말했다.

스물다섯. 순자씨는 중매로 결혼했다. “집에서 1원도 안 받고 내가 번 돈”으로 결혼했다. 결혼 후 7개월동안 남편 고향인 곡성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순자씨는 “돈도 못 버는 것이 밥만 한 그릇씩 먹는다”고 시어머니에게 혼났다. 순자씨는 “(시어머니가) 반찬을 맛있게 만들었다”며 웃었다. 배가 고팠던 순자씨는 밥 많이 먹는다는 구박을 피하기 위해 밥을 눌러 먹었다. 장사를 시작한 남편을 따라 다시 광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첫 아이를 임신해 만삭이 된 때였다. 1982년 순자씨는 자신의 고향 화순과 남편의 고향 곡성에서 한 글자씩을 따 ‘화곡식당’이라는 고깃집을 열었다.

2014년 화곡식당 영업 마지막 날, 순자씨 가족이 식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2014년 화곡식당 영업 마지막 날, 순자씨 가족이 식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함께 식당을 했지만 “남편의 일은 고기를 가져오고 자르는 것”, 직원들 관리부터 세금 업무까지 그외 식당 운영 전반은 모두 순자씨 몫이었다. 추석과 설에 이틀씩 1년에 나흘만 쉬었다. 새벽 5시에 나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일할 때도 있었다. 주방장, 직원들에게 뒤통수를 맡기도 했고 외상값을 받으러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식당은 잘 됐다. “나는 손이 커서 반찬 쬐깐씩 주는 게 싫더라구요. 그니까 사람은 항시 많았어요.” 엄마, 아내, 며느리, 식당 주인이라는 네 겹의 역할이 충돌할수록 순자씨의 노동강도는 높아졌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오후 3시에 식당 내실에서 자는 쪽잠이 유일한 휴식일만큼 바쁘게 살았지만, 허무함이 밀려왔다. 지나고 보니 “내 것”은 없었다. 셋째 딸을 낳은 80년대 후반은 ‘여성도 교육을 받고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때다. 여성조기정년제가 폐지되고(1986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으로 혼인·임신·출산을 이유로 한 여성 퇴직이 금지되는 등(1987년) 보이는 변화가 잇따랐다. 순자씨가 학비를 대준 오빠는 교장선생님이 돼 사회적 존경을 받았지만 그건 오롯이 오빠의 것이었다. 가게 명함도 집 명의도 남편의 것이었다. 순자씨는 남편에게 인감증명서를 떼어주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포하고, 집을 공동명의로 바꿨다. 공부를 못한 게 한이 되면서 “우리 딸들 통장에 돈은 못 꽂아줘도 머리에는 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세 딸들에게 “대학생이 돼라” “일하는 여자가 돼라”고 말했다. 순자씨의 잔소리가 늘기 시작했다.

[젠더기획]"일하는 여자가 되어라" 딸에게 전하는 순자씨의 진심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라던 딸

“가족끼리도 보증 서주지 마라.” “나갈 때 가스불 잠가라.” “견과류 먹어라.” 엄마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했다. 특히 혜원씨가 고등학생일 무렵부터 “꼭 일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추가됐다. 어린 혜원씨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엄마는 평생 일하고도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잖아. 나는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다방과 사우나, 주변 인쇄소를 오가며 사람들과 어울렸던 아빠와 달리 엄마의 활동반경은 화곡식당이라는 작은 공간이 전부였다. 혜원씨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2005년 혜원씨는 광주의 한 국립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여자가 공무원 하기 좋다”는 엄마 얘기를 듣고 선택한 전공이었다. 엄마가 19살이 된 1973년 40.9%였던 대학진학률은 혜원씨가 대학에 가던 해엔 80.8%로 2배 올랐다.(교육부 교육통계연보) 엄마의 소원대로 언니들도 혜원씨도 모두 대학생이 됐다. 혜원씨는 졸업 후 공기업 기술직으로 입사했다. 급여 수준도 좋고 고용안정성도 높은 좋은 일자리였다. 두 언니처럼 유아교육을 전공해 자매들끼리 유치원을 하라던 아빠는 막내딸이 ‘남자들의 직업’을 가진 것을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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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자’가 된 혜원씨의 하루하루는 생각과는 달랐다. 남성 위주 조직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던 회사에서 혜원씨는 모난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남자 신입을 원했다”는 선배들에게 “이 회사에 들어오려고 재수까지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맥주병을 숟가락으로 따며 ‘소맥(소주와 맥주로 만든 폭탄주)’을 말았다. 성희롱으로 신고할만한 법한 상사의 농담도 ‘쿨하게’ 넘겼다. 혜원씨는 “남자들만의 문화를 불편하지 않게 넘기는 여자 직원이 되는 것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었다.

차별과 불합리는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공사현장의 토목감독으로 일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남자 감독이 자리를 비우면 작업자들은 젊은 여성인 혜원씨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며 지시를 무시했다. 보완사항을 얘기하면 삽을 집어던지며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일들이 쌓여갔다. 혜원씨는 “내가 남자였어도 이런 일을 경험했을까 생각했지만, 이게 자격지심인지 아닌지 말해줄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혜원씨가 일하는 업계에서 여성은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이다. 입사 4년만에 혜원씨는 퇴사를 선택했다.

■엄마는 공부하고, 딸은 글을 쓴다

순자씨는 32년만에 식당문을 닫았다. 혜원씨의 친구가 와서 순자씨의 마지막 영업을 사진으로 남겨줬다. 식당을 그만두고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공황장애도 왔다. 식당을 할 때는 인생이 긴 줄 알았는데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았다. 내 인생이 가게만 하다가 이렇게 끝나는구나…서글프고 서러워서 큰 사위와 통화하며 울었다. 비슷한 시기 혜원씨도 회사를 그만뒀다. “앉아있으면 계속 눈물이 나고 숨이 막히고 화가 나.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너무 힘들어.”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혜원씨의 말을 가만히 듣던 순자씨가 조용히 입을 뗐다. “너 우울증이구나. 그래 그만둬. 엄마가 몰라줘서 미안해.” 혜원씨는 그때를 “우울이 우울을 알아봤다”고 표현한다.

2021년 12월18일 윤순자씨(오른쪽)와 셋째 딸 마혜원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1954년생 엄마와 1986년생 딸은 여성노동자 대 여성노동자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2021년 12월18일 윤순자씨(오른쪽)와 셋째 딸 마혜원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1954년생 엄마와 1986년생 딸은 여성노동자 대 여성노동자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매일의 노동에서 벗어난 순자씨는 공부를 시작했다. 큰 마음 먹고 시작했지만 “머리가 딱 닫힌 상태에서 공부할라니까 머리가 쪼개져불라고” 했다. 매일 울다가 2주만에 포기하려고 검정고시 학원 사물함에 물건을 가지러 갔는데,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이 이번 고비만 넘겨보자고 했다. 그만둔다고 하면 자식들, 남편 보기도 민망할 것 같아 다시 힘을 냈다. 순자씨는 중학교 검정고시에서 수학 100점, 국어 80점을 맞았다. 사위들이 과외선생이 되어줬다.

순자씨에게 공부는 즐겁고 어렵다. “방통고 뒷자리에 앉은 언니 이름도 순자야. 나랑 같아. 알고 보니 그 언니하고 나하고 일신방직을 같은 시기에 다녔더라고.” 순자씨는 공장에 다닌 것이 왠지 부끄러워 오래 숨겼지만 이제 달라졌다. “(순자) 언니가 (그때 우리가 다닌 곳이) 시험 봐서 들어가던 회사라고 하더라고. 광주에서 제일 큰 회사였을 거예요.” 순자씨는 공부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배운 뒤 A4용지 여러 장에 자신의 인생을 써보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만들어 애들한테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순자씨가 공부로 우울의 시간을 통과한 것처럼 혜원씨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울에 새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한 혜원씨는 여성심리와 우울증을 다루는 독서모임에 가입해 1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썼다. 자연스럽게 엄마가 글감으로 떠올랐다. ‘엄마를 쓰는’ 마음은 처음엔 원망이었다가 미안함으로 뒤엉켰다. 직장상사의 성희롱 발언에 괴로워하던 자신의 모습에서 성희롱과 폭언을 일삼는 손님을 상대하던 엄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엄마는 어떻게 맨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저는 제가 엄마보다 인내심이 좋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가 아니라 애초에 엄마처럼 사는 일이 엄두조차 나지 안 났던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불안을 물려주지 않으려 나름의 방법으로 고군분투했을 나의 어른들. 엣날로 돌아가면 나를 숨막히게 꼭 안던 엄마를 나도 함께 꼭 안아주고 싶어요.”

화곡식당 영업 마지막날 혜원씨 형제들은 32년간 식당을 운영한 순자씨를 위해 표창장과 꽃바구니를 전달했다.혜원씨 친구가 찍은 사진으로 기념 앨범도 제작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화곡식당 영업 마지막날 혜원씨 형제들은 32년간 식당을 운영한 순자씨를 위해 표창장과 꽃바구니를 전달했다.혜원씨 친구가 찍은 사진으로 기념 앨범도 제작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화곡식당 영업 마지막날 혜원씨 형제들은 32년간 식당을 운영한 순자씨를 위해 표창장과 꽃바구니를 전달했다.혜원씨 친구가 찍은 사진으로 기념 앨범도 제작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화곡식당 영업 마지막날 혜원씨 형제들은 32년간 식당을 운영한 순자씨를 위해 표창장과 꽃바구니를 전달했다.혜원씨 친구가 찍은 사진으로 기념 앨범도 제작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엄마와 딸은 동료가 되었다

어린이집 원장인 순자씨의 첫째 딸은 두 아이를 재우고 늦은 밤 일터로 다시 향한다. 남편의 해외 발령때문에 전업맘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둘째 딸은 10년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면서 눈물을 보였다. 엄마와는 다르지만, 쉽지 않아 보이는 언니들의 일과 육아를 보며 혜원씨는 아이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한다. 2021년 통계청이 발표한 ‘기혼여성의 고용현황’을 보면 경력단절 여성 수는 3년째 줄고 있다. 그러나 15~54세 기혼 여성 6명 중 1명은 경력단절 상태고, 사유의 압도적 1위는(43.2%)는 육아다.

딸들이 번듯한 직장을 갖고 남편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길 바랐던 순자씨는 딸들에게 “여자는 일을 해야한다”면서도 “아이 하나는 꼭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둘 이상은 너무 힘드니 하나만 낳으라”고 말한다. 순자씨는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혜원씨가 태어나고 9년 뒤에 막내아들을 낳았다.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자씨의 조언은 일과 돌봄 사이에 있는 많은 여성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혜원씨는 여전히 고민이 많지만. 이제 ‘일하는 선배’로서 엄마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순자씨는 가끔 식당을 할 때 손님들이 회식을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회식자리에 앉아있던 여성들은 힘들어보였다. “남자들은 집에 들어가면 자기 몸만 씻으면 끝나는데, 여자들은 집에 들어가면 또 시작인데……”싶기도 하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나쁜 선택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데 자식들이 괴롭힘을 당하진 않는지 걱정도 된다. 엄마는 딸들의 시간이 자신이 통과해온 날들보다는 조금 더 평안하길 기도한다. 딸들에게 잔소리는 했지만 사실 진짜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다. “재밌게 살고, 힘들게 살지마. 살아보니까 인생이…그렇게 길지가 않아.”

순자씨는 딸들의 시간이 자신이 통과해온 날들보다는 조금 더 평안하길 기도한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순자씨는 딸들의 시간이 자신이 통과해온 날들보다는 조금 더 평안하길 기도한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젠더기획 특별취재팀
장은교(젠더데스크) 이아름·심윤지(플랫) 조형국·이수민(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이하늬(정책사회부) 이준헌(사진부) 최유진(뉴콘텐츠팀) 김윤숙(교열부)


[젠더기획]딸들은 엄마의 노동에서 여성의 노동을 읽어냈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2090600011)

[젠더기획]"일하는 여자가 되어라" 딸에게 전하는 순자씨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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