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외부재자 투표를 마친 뒤,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내가 이민갈 수 있는 나라가 어디어디인지 조사해본 적이 있다. 기술 없는 인문계 전공자에 모아둔 돈도 없고 외국 회사에 취직할 만큼 영어가 능하지도 않고 영국 같은 나라에선 불법체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학업비자조차 잘 안 내주는 30대 비혼 여성. 그 조건으로 갈 곳은 많지 않았다. 유럽에선 스페인과 포르투갈 투자 이민이 저렴한 편인데 그것도 내 형편으론 어려웠다. 이민권 공동구매를 위해 위장 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포기. 캄보디아는 비자 연장이 쉬워서 관광비자로 평생 사는 사람도 있다니 그쪽을 노려볼까. 하지만 말이 안 통할 텐데?

해외 부재자 투표는 유권자에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누사프니다에서 여객선을 타고 발리로 이동했다. 해외 투표 종료 후 사퇴한 정치인에겐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해외 부재자 투표는 유권자에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누사프니다에서 여객선을 타고 발리로 이동했다. 해외 투표 종료 후 사퇴한 정치인에겐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반은 농담이지만, 그때 이민을 생각한 건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지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순간 한국 사회에 환멸을 느낀다며 미국 이민을 결심하고 착실히 준비해서 실행에 옮겼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이명박 피하려다 트럼프를 만났다”며 고통스러워했지만 그 시기도 잘 견뎌낸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나는 충분히 절박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한국 기업의 해외 지사도 있고, 이민에 도움 되는 실용적인 자격증도 많고, 그제부터 뭔가 공부를 시작해도 좋았으련만 나는 인생을 길게 내다보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키는 대로 살다 보니 당도한 곳이 여기다.

국외자란 신분·책임·한계를 생각
안철수는 재외국민 표를 무시했다

나의 의무와 권리는 무엇인가
국내 정치에 발언은 주제 넘는가
나는 한국 사회의 배신자인가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과 질문이 많아진 날이었다

발리에서 나는 단기체류비자(KITAS)로 지낸다. 끼따스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내 것은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비자다. 재작년에 호텔 지분을 사둔 것이 투자 비자 하한선(10억루피아, 약 8600만원)을 충족해서 원하면 바꿀 수 있지만 호텔리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서비스업에 눈곱만큼도 재능이 없다. 이처럼 나는 이민자도 관광객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다. 여전히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자세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다른 사업을 벌이고 싶지도 않고, 이곳에서의 내 미래가 어떨까 상상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인도네시아를 좋아하고 발리를 사랑하지만 소속감은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떠나 있으니 그곳에서 생활 혹은 생존하는 사람들과는 국가에 대한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큰 결심과 준비를 거쳐 이민을 하고 딴 나라의 시민권을 따낸 사람들과 달리 ‘한국을 떠났다’는 표현 자체가 멋쩍다. 내가 떠난 게 맞나?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데?

내 기분이나 법적 지위와 별개로, 인도네시아에서 4년을 살았으니 한국인들이 보기에 나는 다른 배를 탄 자다. 그 때문에 가끔은 죄짓지 않고도 죄지은 기분이 든다. 예컨대 의료보험 문제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재외국민들이 보험료도 안 내면서 한 번씩 의료 투어를 와서 세금을 빼먹는다고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다. 나 같은 지역 의료보험 가입자가 출국을 하면 자동으로 보험료 납부가 정지된다. 정지가 늦었을 때는 나라에서 소급해서 환불해주고, 다시 입국하면 전화 한 통으로 정지를 해제해서 보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편리하고 관대한 만큼 악용 소지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로선 억울한 면도 있다. 직장 의료보험을 11년, 그보다 비싼 지역 의료보험을 7년 동안 납부했고, 그땐 젊고 건강해 혜택을 받을 일도 없었는데 이제 해외에 산다는 이유로 그 혜택은 영영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왠지 이 문제에는 껄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지난번 출국 이후 자동 정지가 되지 않아 계속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보험료를 내버려두고 있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 사는 가족, 친구들이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라고 내게 알려줄 때마다 “외국에 사는데 내가 무슨” 하고 말았다. 아직 종합소득세를 꼬박꼬박 한국에 납부하고 있는데도 그 돈을 받아 외국에서 쓰는 건 안 될 일이라 여겼다. 유럽, 남미 쪽 친구들이 자국에서 보내준 재난지원금으로 이곳에서 월세를 내고 빵을 사는 것을 보아도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착한 국민’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게 어느 정도는 ‘국민 감정’이란 것에 주눅이 든 탓이라는 점이 씁쓸할 뿐이다.

투표하러 먼 길을 갔으니 그냥 돌아오기 아까워 며칠 휴가를 보냈다

투표하러 먼 길을 갔으니 그냥 돌아오기 아까워 며칠 휴가를 보냈다

인도네시아라고 내 신분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그레이’라는 미국 여성이 인도네시아에서 추방당한 일이 있다. 그는 록다운 기간 중 발리에서 프라이빗 파티를 열고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다. 발리에서 디지털 노마드로 사는 법을 전자책으로 써서 출간, 홍보하고 외국인들에게 비자 에이전시를 소개하며 발리에 오라고 권장하는 등 정부 방역 시책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었다. 인도네시아가 무슬림 국가라 혼외 섹스나 동성애 등에 보수적임에도 ‘발리는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곳’이라 포스팅한 것 역시 문제가 되었다. 불씨는 예의 사방으로 꼼꼼히 튀었다. 디지털 노마드가 발리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정당한 주장은 점점 변형이 되더니 ‘그레이가 영어로 글을 써서 외국에 팔고 해당 국가에서 세금을 냈더라도 발리에서 일을 했으면 발리에 소득세를 내야 하며, 관광비자로 체류하면서 경제활동을 했으니 비자법 위반’이라는 억지를 낳았다. 세금과 비자에 무지한 소리기도 하거니와 외국인에 대한 뚜렷한 혐오가 담긴 주장들이었다. 성난 시민들의 고발로 이민국에 소환된 그레이는 비자법이나 세금 문제가 아닌 방역과 시민 정서에 반한다는 명목으로 추방당했다.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가 세금 안 내고 불법 경제활동을 한 혐의로 쫓겨났다는 헛소문은 한동안 정정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써서 한국에 팔아 돈을 벌고 한국에 소득세를 낸다. 이것을 인도네시아에서 경제활동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외국인들은 비자를 발급하고 갱신할 때 체류에 대한 대가를 이미 치르고 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런 라이프스타일 자체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확인한 후론 누가 직업을 물으면 작가라고 답할 수가 없게 되었다. 법대로 살고도 미움 받는 일은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다.

최근 처음으로 해외 부재자 투표를 하면서, 나는 국외자라는 어정쩡한 신분, 내 나라를 바라보는 자세, 그에 따른 책임과 한계를 다시 생각했다. 알다시피 원내 정당 후보 안철수가 해외 부재자 투표 이후 사퇴를 했다. 재외국민의 표를 무시했다, 부재자 투표 개시 이후에는 사퇴를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등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한편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평소 좋은 글을 자주 올려 구독하던 분이 ‘재외국민은 한국 실정을 잘 모르고 국내 정세의 영향을 덜 받아 절박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도덕성 과시를 위해 본국 투표에 말을 얹는다’는 요지의 글을 쓴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 역시 과거 이민자들의 정치 발언에 황당한 적 많았다. 국내 정세에 대한 판단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북한이 미사일만 쏘면 당장 전쟁 나는 줄 알고 호들갑을 떨 정도로 시선이 서구화된 이민자들에게 코웃음 쳤다. 그러면서도 하루 종일 카톡으로 한국어 수다를 떨고 유튜브로 한국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시대의 이민자는 과거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착각일 수 있다는 반성이 들기 시작했다.

재작년 겨울 서울에서 버스정류장마다 난방시설이 설치된 것을 보고 ‘서울은 세금 쓰는 게 눈에 보이는 도시군’ 실감하지 않았던가. 정책과 사회 문화의 소소한 변화까지 현장에서 겪는 사람들의 감각은 국외자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국외자가 다른 시민들과 똑같은 투표권을 갖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의문도 생긴다. 물론 임시로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투표에 참여하는 건 막아선 안 된다. 그 표가 소수라고 무시해도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요즘 이곳 러시아 이민자들의 표정에 깃든 죄책감을 볼 때면 외국에 살아도 내 나라의 일에 책임을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적어도 한국법이 내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한 나는 국내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나라를 위해 옳은 선택을 하려 노력하는 것으로 국외자의 채무를 갚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남는다.

나는 과연 대한민국에 얼마만큼의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는가. 내가 힘든 한국 사회를 등져놓고 혜택은 빼먹으려는 배신자인가. 국내 정치에 대한 발언은 내 주제를 넘는 일인가. 인도네시아에서 나의 의무와 권리는 또 무엇인가. 좋은 시민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 해외 부재자 투표를 마치고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삶]첫 해외부재자 투표를 마친 뒤,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Today`s HOT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황폐해진 칸 유니스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