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과 ‘재난 불평등’읽음

김지원 기자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3월 16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이하 글엔 이해를 돕기 위한 엄선한 기사의 하이퍼링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링크를 참고하시기 위해선 경향신문 홈페이지 기사(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3201428001)를 통해 접속해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4일 시작된 경북 울진, 강원도 삼척 동해안 산불이 일주일 넘게 이어졌습니다. 국내 산불 가운데 역대 최장 기록이라고 합니다. 불길은 삼림 약 2만 헥타르를 태웠고 수백명의 이재민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기사] 울진·삼척 산불 마침내 진화···역대 최대 면적 숲이 탔다

산불이 최근들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커지고, 또 잦아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론 2019년 발생해 해를 넘기며 무려 6개월이나 불길이 계속된 호주의 산불이 있고요. 유엔환경연합이 올초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02~16년 새 전세계적으로 연평균 남한 면적 42배만큼의 숲이 불탔다고 합니다.

지난 4일 경북 울진 등지에서 발생한 산불이 송전탑 사이로 번지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지난 4일 경북 울진 등지에서 발생한 산불이 송전탑 사이로 번지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근래 큰 산불이 늘어난 이유는 뭘까요? KBS 다큐멘터리 <붉은 지구>(2021)를 보면 이상 기후가 전 지구적으로 가뭄, 산불, 태풍 등 대규모 재난을 낳고 있다고 합니다.

경향신문 기획 ‘기후 변화의 증인들’(2020)에선 산불을 낳는 세 요소로 불씨(인간 등 발화 원인), 연료(나무), 기상을 꼽고 있는데요. 이중 ‘기상’이 크게 변화하면서 산불이 더 커지고,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의 많은 - ‘대재난으로서의 산불’은 기후위기에서 온 문제라는 거죠.

▶[기사](기후변화의 증인들4)더 커지고, 오래가고, 연중 끊이지 않고…산불이 심상찮다

붉은 연기가 가득한 사진을 보며 생각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으로선 통상 산불이나 기후위기가 그저 반팔을 몇주 더 입는가, 전기요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정도로 밖에 체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선 우리가 만든 기후 위기로 인해 숲이 불타고,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기후위기의 영향은 가장 취약한 곳으로 온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번 레터에서는 <지구 오염의 역사>와 <재난불평등>을 지팡이 삼아 재난과 불평등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발전은 내가 할게, 공해는 누가 가질래?

오늘날 뉴욕, 런던, 서울같은 대도시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폐기물 악취 때문에 주민들이 건강을 위협받거나, 매연과 폐수가 집 근처에 대량으로 흘러나오는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러긴 어려울 겁니다. 그랬다가는 화난 주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테니까요. 대신 쓰레기와 매연은 ‘다른 곳’에 말끔하게 버려집니다.

프랑수아 자리주 등이 쓴 <지구 오염의 역사>는 17세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세계 경제 발전의 역사를 독특하게도 ‘오염’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해낸 역사책입니다. 오늘 이 책을 레터에서 함께 읽어보기 위해 가져온 이유는, 역사적으로 발전의 ‘비용’이 어떻게 불평등하게 전가돼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메시지를 간추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7세기 이후 선진국 발전의 역사는 곧 발전에 따른 리스크, 오염을 ‘다른 곳’으로 떠넘겨온 역사다”

콜레라 등 질병을 유발하는 유령같은 이미지의 ‘미아즈마’를 그린 그림입니다(왼쪽), 18세기 책에 그려진 무두장이들의 작업 과정. 무두장이들이 작업하는 과정에서 많은 폐수가 발생해 도시민들의 불만이 컸다고 합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콜레라 등 질병을 유발하는 유령같은 이미지의 ‘미아즈마’를 그린 그림입니다(왼쪽), 18세기 책에 그려진 무두장이들의 작업 과정. 무두장이들이 작업하는 과정에서 많은 폐수가 발생해 도시민들의 불만이 컸다고 합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는 통상 ‘공해’라고 하면 19세기 영국 공장의 거대한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책에서 저자는 본격적인 산업혁명 시기 이전인 17세기에 이미 ‘공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오염물질은 ‘미아즈마miasma’라고 불렸는데요. 이는 질병의 매개체로서, 공기 토양을 오염시키는 물질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아즈마를 많이 발생시키는 산업으로는 가죽, 비누, 유리, 도자기, 소다 제조업, 양조업 등이 있었다고 하네요.

도심 속 공해가 늘면서 18세기 무렵부터 ‘안온방해법’에 의해 이를 본격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하는데요. 도시에 매캐한 연기, 불쾌한 냄새를 일으키는 업자들을 ‘안온방해법’ 위반으로 경찰이 잡아가기도 하고, 당시에 관련해서 이웃 간에 수천건이 넘는 소송이 오가기도 할만큼 첨예한 문제였다고 합니다. 18세기 런던에서 인근 작업장 폐수 때문에 우리집 과수원을 망쳤다며 소송을 건 사례를 보며 저는 현재 층간소음 문제를 떠올리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당시에 도시 폐기물은 꽤나 일상적이면서도 첨예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미아즈마는 발전,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겠죠. 런던의 대기 속 아황산 가스는 1775년엔 무려 280밀리그램을 기록했습니다.

점점 정부 입장에서도 도시의 오염은 커다란 골칫덩이가 됩니다.

1862년 영국 프레스턴의 Moor Park 건설 현장을 그린 삽화. 배경에 매연과 굴뚝이 가득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이 지역은 19세기 찰스 디킨스 소설 <어려운 시절Hard Times> 속 Coketown의 모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Preston Digital Archive

1862년 영국 프레스턴의 Moor Park 건설 현장을 그린 삽화. 배경에 매연과 굴뚝이 가득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이 지역은 19세기 찰스 디킨스 소설 <어려운 시절Hard Times> 속 Coketown의 모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Preston Digital Archive

산업혁명 당시에는 심지어 무럭무럭 나오는 연기를 ‘발전의 상징’으로 찬미하는 글들도 많이 등장하는데요. 한 예로 1892년 한 사업가는 “매연은 산업이라는 재단에서 피어오르는 향(W.Rend)”이라고 찬양했고, 1841년 아일랜드 수필가 윌리엄 쿡테일러는 매연을 보고서 “다행이다. 그곳의 대부분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고 기뻐합니다. 왜냐면 “공장 굴뚝에 연기가 없다는 것은 많은 가정의 난로에 불이 꺼졌음을, 일할 의지가 있는 많은 노동자에게 일자리가 없음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문제는 매연을 아무리 ‘발전의 상징’으로 찬양해봤자 그게 향기가 되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당시 잠 콩다멩 교수는 엽기적이게도 “산과 타닌 물질로 포화된 이 물(지에강)이 장티푸스를 예방하고 강을 살균”한다고 하거나 “타르 원자가 대기에 가득 찰테니 그걸 흡입하면 몸에 좋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물론 진지하게 참고해서는 안되는 조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발전과 오염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였죠. 당시 사람들이 마주했던 발전과 오염의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글 일부를 소개해봅니다.

거대한 산업의 궁전들을 쳐다보라. 용광로 소리와 증기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가?[...]인류 산업에서 가장 웅대한 강이 샘솟아 세상을 비옥하게 할 곳이 바로 이 오물통 한가운데다. 이 더러운 시궁창에서 순금이 튀어나온다. 인간의 정신이 완벽한 경지에 이르러 죽기 위해 떠나는 곳이 바로 여기다.-알렉시 드 토크빌, <잉글랜드, 아일랜드로의 여행>

“못살겠다”는 외침이 높아지자 정부는 묘안을 내놓습니다. 유해물질을 내뿜는 ‘기피시설’들을 도시 바깥으로 옮기자는 것이었죠. 이로 인해 런던에 위치해있던 공장들은 바스, 옥스포드 등 교외로 옮겨가 대단지를 이루게 됩니다. 18세기 프랑스 경찰총경 니콜라 들라마르는 일찍이 “공기를 오염시킬 수 있는 직종을 도시 중심에서 제거(<경찰조약>)”해야한다고 주장해오기도 했죠.

이런 ‘유해물질 떠넘기기’는 20세기를 지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석유, 천연가스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멕시코 탐피코에선 10만명 규모의 도시에 석유회사 56곳이 들어와 400km의 송유관을 놓기도 했죠. 삶이 파괴된 것은 석유를 소비하는 이들이 아닌, ‘우연히 이곳에 살아왔을 뿐인’ 이들이었습니다. 또한 2006년에는 네덜란드 석유회사가 실어나른 유독성 폐기물로 인해 8만명이 넘는 코트디부아르 지역 주민들이 병원에 가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진국의 폐기물이 ‘합법적 거래’를 통해 개도국으로 옮겨지는 일들은 여전하죠.

또한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압축 성장이 진행 중인 중국의 경우 난개발의 위험이 경작지의 20%, 하천의 40%가 오염되고, 약 3억명의 농촌 주민이 건강이 위험한 수준인 중금속 물을 소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암 발생률이 높은 ‘암 마을’ 450곳 모두 도시가 아닌 공업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나 수도 근처에 위치한 아그보그블로시에(Agbogbloshie) 대규모 하치장의 풍경. 선진국으로부터 대규모 폐가전이 몰려오면서 세계의 ‘디지털 하치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납, 카드뮴 등 고독성 물질이 현지인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가나 수도 근처에 위치한 아그보그블로시에(Agbogbloshie) 대규모 하치장의 풍경. 선진국으로부터 대규모 폐가전이 몰려오면서 세계의 ‘디지털 하치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납, 카드뮴 등 고독성 물질이 현지인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저자는 이 책에서 오염을 ‘발전의 부산물’로 정의하고 있는데요. 그는 에필로그에서 현대로 오면서 ‘오염’의 개념은 굉장히 모호하고 폭이 넓어졌다고 짚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넘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나노 오염 물질, 유전자 조작 식물 등도 ‘오염’에 포함이 됩니다.

이렇다고 할 때 발전의 부산물인 기후위기 역시 어쩌면 오염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염’과 마찬가지로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는 취약한 지역, 계층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재난의 ‘피해액’

위에서도 말했듯 발전의 대가인 공해와 기후위기, 이로 인한 피해는 결코 ‘공평’하게 오지 않습니다. 이는 시야를 넓혀 ‘재난’으로 확장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C.머터가 쓴 <재난 불평등>의 핵심 메시지는“지진이 아닌 건물이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재난의 피해는 불평등하게 온다”입니다. 산불로 운을 떼고서 이 책을 가져와본 이유는, 위험이 상시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산불 등의 재난을 어떻게 보고 또 이에 대처를 해가야할지의 태도에 대해 생각할거리를 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책을 쓴 저자는 꽤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 C. 머터는 사회과학자가 아니라 지구물리학자 출신인데요. 책의 주된 내용이 재난의 과학적 요소가 아니라 재난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더 괴롭게 하는지를 사회학적으로 다룬 내용이기 때문에 그의 이력은 더 눈에 띕니다. 저자는 지진학자인 자신이 몇년간 지진의 사회학을 고민한 이유로 재난의 피해를 말할 때 사회학을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카트리나로 인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대부분의 사망자가 빈민이었을까? 노인이 그렇게 많이 희생된 이유는 뭘까?[...]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자연재해는 동전의 양면처럼 파인만 경계(사회학과 자연과학의 경계)의 양쪽에 동시에 존재한다[...]자연재해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이 강력한 압박 속에서 결합하면서 발생한다.-존 C.머터, <재난 불평등>(이하 동일)

우선 “지진이 아니라 건물이 사람을 죽인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아이티 대지진,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 등 빈곤지역을 강타했던 대규모 재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가 일부러 빈곤 지역만 고른 게 아니라, 빈곤 지역에서 일어난 천재지변들이 수십만명을 죽인 ‘대재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부유한 나라에서는 시스템이 잘 돌아가기 때문에 피해가 최소화되지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선 수십만명이 죽어나갑니다. 실제로 데이비드 스트롬버그의 연구에 따르면 동일한 재난이 발생할 때 부유한 나라의 사망자 수는 가난한 나라 사망자 수의 약 3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한 예로 뉴질랜드에서 일어났던 2011년 대지진에서는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시스템에 의해 피해는 최소화되었고, 천재지변 그 자체에 대해선 누구도 책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지진으로 20만명이 죽은 아이티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는데요. 이는 “책임자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죠.

쓰촨대지진 1주기를 앞두고 부서진 학교의 잔해 앞에서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눈물을 닦고 있다(왼쪽), 2013년 붕괴된 방글라데시 다카의 라나플라자 출처: 신화통신(연합), 위키피디아

쓰촨대지진 1주기를 앞두고 부서진 학교의 잔해 앞에서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눈물을 닦고 있다(왼쪽), 2013년 붕괴된 방글라데시 다카의 라나플라자 출처: 신화통신(연합), 위키피디아

가난한 나라에서는 건축물 법규, 예측 과학, 치안 등의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2008년 쓰촨성 지진 당시 중국에는 ‘두부 찌꺼기’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공사 비용을 줄이려고 찌꺼기같이 무른 공사자재를 썼다는 거죠. 이 두부찌꺼기로 만든 건물들이 지진에 무너지면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만들어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태풍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무능력함을 숨기기 위해” 군부가 해외 원조를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2013년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에서는 심지어 천재지변이 없었는데도 노동자 1129명이 사망했습니다.

2013년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 빌딩은 지진 없이도 저절로 붕괴해 112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희생자는 대부분 은행, 상점, 아파트 등이 들어선 하부의 네개 층 위에 무허가로 증축된 상부 네개 층에서 일하던 의류 노동자였다. 붕괴 전날 건물에 균열이 발생하자 의류 공장 노동자들만 빼고 모두가 대피했다. 의류 노동자들은 불을 지르거나 임금 지급을 미루겠다는 협박 속에서 강제로 남아 일해야 했다.

천재지변보다 중요한 것은 ‘천재지변을 재난으로’ 만드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입니다.

이 때문에 저자는 재난의 장면에서 가장 ‘안 중요한 것’이 ‘실시간 재난 장면’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쓰나미가 몰려오는 사진, 산불이 활활 타고 오는 영상 등이죠. 그것은 단지 현상을 보여줄 뿐 정작 이를 ‘재난’으로 만든 시스템을 가립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재난을 바라보는 시스템에서 사건 이전과 사건 이후를 강조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 눈길을 끌었던 흥미로운 책 속 문장을 짧게 옮겨보겠습니다. 1912년 타이타닉 침몰 당시 이 ‘마음이 찢어지는 대비극’에 슬퍼하는 이들의 천편일률적인 독자 편지가 쏟아지자 뉴욕타임즈의 독자투고란 담당자가 공지한 내용입니다.

“타이타닉에 대한 시를 투고하려는 작가는 적어도 종이와 연필, 그리고 재난이 얼마나 끔찍한가에 대한 강렬한 감정그 이상의 무언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즉, 어떤 사건이 ‘끔찍하기 때문에 끔찍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재난을 예방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타이타닉 침몰 이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타이타닉이 침몰해서 너무 슬프다라는 것보다도, 다시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예방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100년이 넘게 지난 현재도 여전히 우리가 대체로 언론에서 재난을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이런 식인 것 같습니다.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재난은 불평등하게 온다”라는 부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재난의 ‘피해’를 산출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잣대(GDP)가 갖는 한계 때문에 피해를 제대로 계산해낼 수 없다는 것이죠. 앞서 조지프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주창하기도 했는데요. 재난은 ‘손해’가 아니라, 외려 복구 과정에서 사회적 ‘이익’을 산출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재난의 문화-재난과 현대 미국의 건설>(케빈 로자리오)라는 책은 미국의 1853년 대화재 이후 어떻게 집값이 폭등했는지에 대해 쓰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 화재를 계기로 부동산 시장에서 한몫 잡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 와중에 몇명이 죽고 삶의 터전을 잃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죠.

저자는 재난 피해를 계산하는 방식으로서의 GDP의 한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은 인명 손실과 경제적 손실 사이에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재난으로 죽는 사람은 대부분 나이가 많고 허약하거나 아주 어리거나 가난한 이들로, 경제적으로그다지 생산성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총량으로 볼 때 거시경제적 성과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클라이넨버그의 기록을 보면 시카고 폭염 희생자 대부분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높은 층에 고립돼있던 독거노인이었다[...]재난에 대한 조사 결과는 거의 다 사망자 수가 많으면 경제적 충격도 큰 것으로 간주하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가 더 진실에 가깝다. 만약 사망자 대부분이 복지 혜택을 받고 있었다면, 이들의 죽음은 현실적으로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미국 공화당 10선 의원인 리처드 H 베이커는 뉴올리언스 태풍 당시 “뉴올리언스의 공공주택을 드디어 걷어냈다. 우리가 못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다”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재난을 피해액으로만 볼 때 ‘가난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죽거나 집을 잃는 것은 ‘사회적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와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재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피해액’이 아닌 그곳에 살던 이들의 ‘삶’입니다. 호주에서 반년간 이어진 산불에 대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사람들은 처참하게 까만 골조만 남은 자신의 집으로 와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이 잃은 것은 ‘몇십만달러짜리 집’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3대째 이어져와 살고 있던 집과 오리 농장, 말, 어릴 적 찍었던 가족 사진 앨범, 무엇보다도 소중한 동네 이웃들 등입니다.

UNEP에 따르면 2100년에는 현재 기준 산불이 50%나 더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처럼 산불 등 기후위기로 인해 자신의 삶의 터전을 깡그리 잃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기사] “2100년엔 전 세계 산불 건수 지금보다 50% 증가”

그렇다면 ‘안전한 곳’으로 이들이 사는 곳을 옮기면 되는 걸까요?

문제는 대체 안전한 곳이 어딘지 점점 더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기후위기가 심화되면서 ‘위험지역’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효율에 따라 누군가를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는 것은 역사상 약자들에게 수없이 반복돼왔던‘간편한 해결책’입니다.

뉴욕 시민 대부분은 비교적 부유한 재정 상태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도시 설비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뉴올리언스의 로워 나인스 워드 주민들과 이라와디 삼각주에서 쌀농사 짓던 농부들은 잘난 척하며 위험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그곳에 산 것이 아니었다. 그곳이 생계를 감당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지금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위험’과 비슷한 일을 이전에는 겪은 적이 없어 대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그들은 위험지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거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서, 또는 두가지 사정 모두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위험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이 모든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부와 가난의 사회적, 지리적 질서가 계급 사이의 물리적 경제적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재난은 항상 저소득층에게는 피해를, 상류층에게는 단순한 불편만을 끼침으로써 그 차이를 더욱더 벌인다는 사실이다.

■맺음말

오늘 재난과 불평등에 대해서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염, 기후위기에 대한 내용이 주가 되었지만 대체로 모든 종류의 재난에 해당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발전이든 그림자처럼 ‘부산물’이 생겨납니다. 공업단지에선 매연이 피어오르고, 공장식 축산농가에선 감당하기 어려울만큼의 오물이 생깁니다. 20세기 들어 대규모 개발과 인구 급증으로 인해 인수공통감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고, 코로나가 전세계를 강타했습니다.

▶[레터]코로나와 동물과 인간 : 인수공통감염병

역사적으로 어떤 이들에게 재난은 되레 썩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재난 불평등>의 영어 제목은 ‘재난으로 이득보는 이들(The Disaster Profiteers)’이기도 합니다.

‘큰 배’를 탄 사람들은 적은 피해를 입거나 외려 재난을 기회 삼아 큰 돈을 법니다. 많은 이들이 허리띠를 조여야만 했던 코로나 기간에도 상위 부자는 재산을 늘렸습니다. 반면 큰 배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삶의 토대가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일처럼 주기적으로 몰려오는 재난들 앞에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이때 ‘왜 재난을 피하기 위해 더 노오력하지 않았지!’라고 개인을 다그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기후위기 등으로 인해 점차 재난은 상시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위험은 모두에게 똑같이 오는 것이 아니며, 취약한 곳으로 찾아들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재난의 장면을 보며 흥분하는 것보다도 이를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제법 급진적인 결론입니다. 일단 산불의 3요소-불씨(사람), 연료(나무), 대기(기후변화) 중 앞의 두개를 해치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돈만 셈하는 세계를 정복하고 상업화를 주도한 ‘일부’ 인간이 자연 절반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뤘는가 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일부’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기후 변화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배를 탔지만 우리 대부분은3등실에 있기 때문이다.” -라즈 파텔 외,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3월 16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한 컷에 담긴 화산 분출과 오로라 바이든 자금모금행사에 등장한 오바마 미국 묻지마 칼부림 희생자 추모 행사 황사로 뿌옇게 변한 네이멍구 거리
이강인·손흥민 합작골로 태국 3-0 완승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