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지난 1월28일 오후 3시, 인천공항 국제선 카운터. 몽골행 항공권이 든 초록색 여권과 캐리어 가방 손잡이를 쥔 몽골계 한국인 마야씨(35·가명)의 얼굴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위탁수하물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방에서 꺼내든 것은 손때가 탄 몽골어 교재와 영어 교재. 울란바토르 국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참이다. 수하물로 부칠 수 없는 케이크 상자는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임신 6개월째인 조카가 부탁한 한국의 생크림 케이크다.

마야씨(가명)가 지난 1월28일 인천공항 출국 게이트로 향하고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서 자란 마야씨는 스무 살에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했고, 귀화했다. 마야씨는 ‘못다 배운 몽골어’를 배우기 위해 다시 몽골 울란바토르 국제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한수빈 기자

마야씨(가명)가 지난 1월28일 인천공항 출국 게이트로 향하고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서 자란 마야씨는 스무 살에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했고, 귀화했다. 마야씨는 ‘못다 배운 몽골어’를 배우기 위해 다시 몽골 울란바토르 국제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한수빈 기자

마야씨는 울란바토르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스무 살에 한국 남성과 결혼해 경기도에 정착했다. 주민등록부에 올린 이름은 ‘강바트마야’. 엄마가 외국인이면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013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꾸라”는 시댁의 권유는 뿌리쳤다. “다 바꿔버리면 더 이상 몽골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마야씨는 스스로를 ‘몽골인이자 한국인’이라고 정의한다.

마야씨가 결혼한 직후 어머니 산사르씨(58·가명)도 한국에 왔다. 딸의 가사와 육아를 돕기 위해 한국인 사위의 ‘초청’을 받아 입국한 산사르씨는 2015년 마야씨의 이혼으로 ‘한국인 배우자’의 체류 연장 승인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고향인 몽골 울란바토르에는 마야씨의 두 동생과 조카 두 명이 산다. 2008년 모녀가 집을 비운 뒤로 마야씨의 큰어머니(산사르씨의 언니)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한국의 돌봄과 가사노동을 이주여성이 떠맡는 동안 본국에 남은 여성 친족들의 가사노동 부담은 배가된다. 한쪽 빈칸을 채우면 다른 한쪽에 빈칸이 생기는 ‘슬라이딩 퍼즐’과 흡사하다. 이주여성의 몸에 둘린 ‘돌봄 사슬’은 한국의 ‘결혼이주가정’을 지탱하는 동시에 본국의 가족을 해체한다.

경향신문은 지난 1월부터 한 달간 이주여성 14명을 만나 한국에서의 삶을 들었다. 왜 이들은 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누군가를 돌봐야만 할까. 한국은 왜 이주여성들을 ‘돌봄’과 ‘결혼’으로만 정의하려는 것일까.

국경을 넘는 ‘돌봄 사슬’

마야씨는 시댁에서 해마다 여섯 번 제사상을 차렸다. 시어머니는 ‘그나마 열두 번 하던 걸 반으로 줄였다’며 감내하라고 했다. 정작 마야씨에게 친엄마나 다름없던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돈이 없다며 몽골에 못 가게 했어요. 결혼할 땐 2년에 한 번씩 가게 해준다고 했는데, 그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때 한 번이라도 보내줬더라면….” 이 일은 마야씨가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예쁜 두 아이가 생겼으니까요.” 마야씨는 운동에 소질이 있는 첫째딸을 배구부가 있는 학교로 진학시키고 싶지만 그럴 권리가 없다. 두 아이의 친권은 전남편이 갖고 있다. 마야씨가 아이들과 만나는 일은 겨우 시간을 내야만 가능한 ‘이벤트’다.

마야씨는 “죽고 싶을 정도”였다고 결혼 생활을 회상했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우울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연년생 아이를 양육하면서 하루 세 끼 어김없이 시부모님 밥을 차려 드렸어요. 여자가 저녁에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면서 친구도 못 만나게 했어요. 새장에 갇힌 기분이었죠.” 둘째를 임신했을 때 시동생이 사고를 당하자 시어머니는 1년 넘게 집을 비웠다. 만삭의 몸으로 혼자 시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입덧이 심했는데, 시아버지는 계속 집 안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시댁 사람들이 입에도 안 대니 몽골 음식은 해먹을 수 없었어요.”

산사르씨(가명)가 지난 3월15일 자택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산사르씨는 2008년 딸 마야씨의 육아와 가사를 돕기 위해 한국인 사위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왔지만, 2015년 마야씨가 이혼하자 더 이상 체류 연장 승인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권도현 기자

산사르씨(가명)가 지난 3월15일 자택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산사르씨는 2008년 딸 마야씨의 육아와 가사를 돕기 위해 한국인 사위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왔지만, 2015년 마야씨가 이혼하자 더 이상 체류 연장 승인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권도현 기자

혼자 감당하기 힘든 가사노동은 남편과 시댁 가족이 아닌 마야씨 어머니 산사르씨가 도와야 했다. 시댁은 ‘양육 지원’ 목적으로 산사르씨를 초청했지만 정작 머물 곳은 내주지 않았다. 산사르씨는 서울 친척집에 머물며 딸이 사는 경기도로 출퇴근했다.

이혼 후 7년 만에 간 울란바토르의 집은 마야씨가 떠나기 전과 많이 달라졌다. “ ‘언니, 언니’ 하며 따르던 동생들이 이젠 서먹해졌어요.” 한창 말을 배울 때인 세 살배기 조카는 아직도 ‘엄마’라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집안의 ‘여자 어른’이 모두 집을 비우니 ‘엄마’란 말을 들어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 빼고 다’ 돌본 삶

13년차 ‘베테랑 간병인’인 중국동포 태순음씨(70)는 지난해 5월 다리 수술을 한 남편을 간병하느라 5개월간 일을 쉬었다. 그는 경기 안양시의 오래된 원룸 빌라에서 남편과 둘이 살고 있다. 지난 1월10일 오후 찾은 태씨의 집 곳곳에는 큰 글씨 메모들이 붙어 있었다. 부엌 찬장에는 ‘콩기름’, 감자 포대 위에는 ‘감자’, 현관문에는 ‘수도·가스 잠그기’…. 지난해 10월 일터에 복귀한 태씨가 집에 혼자 있는 남편을 위해 써둔 메모들이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환자를 돌보는 태씨는 허리 보호대 없이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성치 않다. 넘어진 환자를 일으키다가 허리를 크게 다친 데다 지난해 말에는 87세 남성 환자의 기저귀를 갈다가 무릎이 상했다. 그러나 태씨를 간병해줄 이는 없다. 태씨의 휴대폰 갤러리는 남편과 병원 환자들의 간병 자료로 채워져 있다.

쉴 틈 없이 24시간 내내 환자 곁을 지켜야 하는 간병인들은 상해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다. 태씨의 안방 벽에는 한국에 있는 친척, 출입국관리사무소, 중국대사관, 집 근처 병원 전화번호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타국에서의 노년생활은 외로움과 불안의 연속이다. “간병인들 연락이 안 돼 집에 찾아가보면 죽어있는 일도 있다고 해요. 남편도 아프고 하니, 혹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 달라고 써붙여 놓은 거예요.”

간병노동자 김혜영씨가 지난 1월 자신이 일하는 요양병원 앞에서 사진촬영에 응했다. 이두리 기자

간병노동자 김혜영씨가 지난 1월 자신이 일하는 요양병원 앞에서 사진촬영에 응했다. 이두리 기자

중국의 여성 정년퇴직 연령은 55세다. 퇴직 후 한국행을 택한 중국동포 여성들은 식당, 공장을 전전하다 간병노동에 정착한다. “몸이 아파 식당 일도 못하고, 가정집도 (입주가사 노동자를) 젊은 사람만 고르니까. 사람들이 ‘갈 데 없을 때 맨 마지막에 오는 게 간병 일’이라고 해요.” 일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중국동포 김혜영씨(60)는 간병노동자를 “ ‘탑 준 시계’(‘태엽을 많이 감은 시계’의 함경북도 방언)”라고 빗댄다.

“이제는 사람 손등 쳐다보는 게 버릇이 됐어요. 혈관 찾아보려고.” 중국동포 돌봄노동자인 김선숙씨는 옌볜에서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하다가 어머니 간병을 위해 정년보다 이른 51세에 퇴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한국에 와서 다른 일을 하자니 F-4 비자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김씨는 2018년 환자 기저귀를 교체하다 발길질을 당해 오른손이 골절됐다. “일을 쉬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냥 깁스한 채로 간병일을 계속했어요. 저 같은 일대일 간병은 환자가 간병인이 바뀌는 걸 꺼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주로 여성들인 간병노동자는 ‘대안 가족’으로 여겨진다. ‘감정노동’의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환자에게 예속돼 ‘모성’을 강제당한다. 환자에게 해가 갈까 태업을 하며 근로개선 요구를 할 수도 없다.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가 돌봄노동자를 ‘사랑의 포로’라고 일컫는 이유다. 환자를 돌보는 틈틈이 ‘급하게 쏟아넣듯이’ 식사를 하기 때문에 위장병에 걸리기도 쉽다. 김씨는 위장이 나빠져 2019년 중국으로 돌아가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간병인이 바뀌니 환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환자 가족들의 끈질긴 요청을 이기지 못해 40일 만에 되돌아왔다.

돌봄의 주체이자 혐오의 타깃

이 고된 노동의 절반을 이주여성들이 감당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돌봄 서비스의 이주노동자 실태분석’에 따르면 2020년 3월 기준 외국인 간병인 수는 전체 46%에 달했다. 하지만 이주여성은 주로 ‘개인간병’에 몰려 있다. 장기요양기관에 종사하는 ‘요양보호사’ 중 외국인은 0.6%(2020년 2월 기준)에 불과하다. 요양기관과 고용계약을 맺고 4대 보험을 적용받는 요양보호사와 달리 간병인은 ‘1인 사업자’ 형태로 요양병원에 파견된다.

이주 여성의 '돌봄 돌려막기'가 한국의 절반을 지탱하고 있다[플랫]

일하다 다쳐도 이들을 책임질 ‘사용자’는 없다. 전향표 조은간병협회 대표는 “환자를 다치게 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은 강제적으로 가입하게 하지만, 본인용 상해보험은 개인이 각자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 협회 간병인들의 개인상해보험 가입률은 10%에 못미친다.

여성·이주민·간병노동자라는 삼중의 정체성으로 인해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부각되지 않는다. 반면 이들은 혐오에는 쉽게 노출된다. ‘돌봄 돌려막기’로 부담을 덜게 된 한국 사회가 정작 그 종사자들을 혐오하는 부조리다.

김선숙씨는 “일부 간병인들이 환자를 학대하거나 질타받을 행동을 하면, 곧바로 ‘조선족 짱깨들 중국 가버려라’라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조선족들이 떠나면 요양병원이 운영될 수 없다”고 했다.

김기태 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사드 갈등 등 여파로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영화 등에서 ‘범죄자’로 다뤄지면서 중국동포 개개인에 대한 혐오가 재생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간병인 46%가 외국인…‘필요’로 하면서도 쉽게 혐오 대상 삼아

코로나19 사태로 중국동포들의 출입국에 제동이 걸리자 간병 공백은 더욱 심해졌다. 몸이 아파 휴직 중인 태씨에게도 ‘간병 대타’를 부탁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다친 몸을 생각하라’는 남편의 만류에도 태씨는 대타 출근을 약속했다.

사회학자 혼다뉴 소텔로는 본국에 자녀들을 남겨둔 채 타국에서 이주국 가정의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을 ‘초국가적 모성(transnational motherhood)’으로 정의했다. 이들은 이주국 국민의 ‘대안적 어머니’가 되어 돌봄노동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본국의 자녀들을 양육한다. 본국과 이주국에서 중첩된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집과 일터의 경계가 붕괴되고, 돌봄노동은 ‘여성이 응당 수행해야 할 어머니 역할’이라는 인식이 강화된다.

손인서 아세안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외국인 간병노동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해 4대 보험 등의 제도 안에 편입하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면서 “근본적으로는 임금수준 향상, 전문직화를 통해 간병노동이 하나의 ‘커리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의 어머니’가 되어라

지난 2월3일 서울의 한 연립주택. 중국 동포인 하선이씨(48·가명)가 서류철에 끼워진 종이들을 하나둘 꺼내자 2평 남짓한 방바닥이 금세 메워졌다. “모든 게 다 서류예요. 아이를 중국 호적에 올릴 때도, 한국 국적으로 바꿀 때도 서류를 갖춰야 하고 그때마다 제 처지를 설명하는 글을 써야 해요.” 방 곳곳에 걸린 가족사진에는 하씨와 아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하씨는 2010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지 않은 채 아들을 낳았다. 중국도, 한국도 아이를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한국은 혼인관계가 아닌 외국인 여성과 한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어머니의 국적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비혼모의 출산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씨의 아이가 국적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다.

중국 동포 하선이씨(가명)는 한국 국적의 아들과 함께 산다. 김영민 기자

중국 동포 하선이씨(가명)는 한국 국적의 아들과 함께 산다. 김영민 기자

출산 직후부터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다시 포기하고, 최종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싸움이 이어졌다. 2년간 분투한 끝에 2012년 아들은 ‘한국 국민’이 됐지만 하씨는 여전히 ‘외국인 엄마’다. 9년 전 귀화적격시험에 합격했지만 자산 요건인 ‘3000만원 이상의 예금 잔액’은 하씨에게 불가능한 숙제다.

아이가 자신의 친아들임을 증명하는 인지소송, 친부를 상대로 양육권과 친권을 찾아오는 소송은 아이 아빠가 종적을 감춘 탓에 배로 힘들었다. 친부의 유전자분석감정서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해야 하는 단계에서 포기할 뻔했으나 친부의 부모와 어렵게 연락이 닿은 끝에 해결했다. 아이의 국적 취득과 친권 확인을 위한 서류만으로 40장짜리 파일 한 권이 꽉 찼다. 소송들을 진행하며 받은 판결문만 파일 한 권 분량이다. 하씨는 틈틈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 아이를 키웠다.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요즘도 팔다리가 시리다.

양육비 소송에서 이겼지만 하씨는 아이 아빠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 외국인 특례도 ‘한국 국민과의 혼인’이 기본 조건이어서 적용 대상이 아니다.

동주민센터 직원은 아이의 수급신청을 하려는 하씨에게 “외국인인데 어떻게 자녀가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내가 외국 국적인 이유와 아들이 수급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직원들 앞에서 설명하는데, 죄인이 된 기분이었어요.”

혈연관계에 기반한 ‘국민’이라는 체는 미혼모 이주여성을 걸러낸다. 아이를 돌볼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인 친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민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면 ‘국민의 어머니’로 존재해야 한다.

어머니도, 아내도 아닌 ‘나, 이주여성’

여성들은 계속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 한국은 ‘국민을 돌볼 가족’으로서의 여성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이주여성은 틀을 허물고 벗어난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일 수도, 노동자일 수도, 홀로서기를 원하는 독립가구일 수도 혹은 그 전부이거나 일부일 수도 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나고 자란 응우옌 티엔 한씨(26)는 비전문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온 지 4년 만에 ‘렌즈 연마 기술자’가 됐다. 충북 음성군 터미널에서 차로 20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생극면. 밭과 숲을 끼고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가면 한씨의 일터이자 거처인 광학용품 공장이 나온다. 공장에 바투 붙은 기숙사까지 스무 걸음 남짓이 그의 ‘퇴근길’이다. “내시경에 들어가는 렌즈를 만들려면, ‘연마 사라’(연마 접시)에 유리를 넣고 양쪽을 다 연마해야 해요. 요동·회전을 시키면서….” 전문 용어와 은어를 섞어가며 공정을 설명하는 한씨의 손허리는 아세톤과 연마제에 오래 노출된 탓에 빨갛게 벗겨져 있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나고 자란 응우옌 티엔 한씨(26)는 비전문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온 지 4년 만에 ‘렌즈 연마 기술자’가 됐다.우철훈 기자

베트남 하노이에서 나고 자란 응우옌 티엔 한씨(26)는 비전문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온 지 4년 만에 ‘렌즈 연마 기술자’가 됐다.우철훈 기자

13명이 일하는 연마 작업장의 여성 노동자는 한씨까지 3명. 모두 베트남 국적의 이주여성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를 더 많이 뽑으니까, 여자들은 시집으로 한국 가는 게 더 쉬워요. 한국에서 알게 된 베트남 언니들은 다 결혼해서 왔거나, 유학하러 온 여자들이에요.”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E-9 비자 소지자 23만6950명 중 여성은 2만47명(8.4%)에 불과하다. 결혼이민자의 81.7%가 여성인 것과 대조된다.

한국의 이주여성 정책은 ‘가정’의 틀에 맞춰져 있고, 행정을 통해 재생산된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11곳의 이주여성 담당 부서이름에 ‘출산’이 포함돼 있다. “서울시 저출산대책담당관 산하에 다문화가족팀이 있었던 전례를 따른 것.”(도봉구) “팀을 만들 당시에 국제결혼 붐이 일었고, 그래서 출산과 다문화를 하나로 묶은 것 같다.”(마포구)

이해응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여성을 지칭할 때 기혼·비혼을 특정하지 않는데, 이주여성에게만 ‘결혼이주여성’이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라며 “이런 호명은 유학생, 노동자, 투자자, 자영업자 등 ‘가족 형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주여성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했다.

한국 여성이 그렇듯이 가정을 꾸리며 일을 하는 결혼이주여성도 적지 않다. 이민정책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결혼이민비자를 가진 이주여성 중 경제활동 인구는 41.7%(2019년 기준)였다. 귀화여성을 포함하면 비율은 더 높아진다. 2005년 한국인 남편을 만나 충북 음성에 정착한 필리핀 국적의 로웨나씨(49)는 출산 이듬해인 2007년부터 일을 쉰 적이 없다. “슈퍼마켓도 하고, 옷가게도 하다가 2014년부터 식품 공장에 다니고 있어요.” 하청업체 파견직원으로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로웨나씨의 급여는 8년 동안 그대로다. 로웨나씨는 “그래도 E-9 비자를 받아 오는 것보다는 결혼으로 와서 공장에 취직하는 게 더 편하다”고 했다.

여성가족부는 가족센터(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일자리를 이주여성들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처우는 열악하다.

여가부가 2020년 권인숙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중언어코치의 평균 임금은 2632만원, 통·번역사는 2561만원으로, 센터 행정직원 평균 임금(3428만원)에 크게 못미쳤다. 이중언어코치와 통·번역사는 결혼이민자만 지원할 수 있는 직종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결혼이민으로 한국에 온 왕지연 한국이주여성연합회 회장은 한국의 다문화정책이 ‘보여주기식’이라고 지적했다. “통·번역사라고 하지만 이름만 그렇고 이것저것 잡일 하면서 최저임금을 받아요. 불안정한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게 아니라 자립할 수 있도록 정규직 일자리를 만들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주여성은 계속 떠나고, 계속 온다. 한씨는 체류비자가 만료되는 내년 5월 하노이로 돌아가야 하지만, 한씨의 여동생 마이씨(23)가 뒤이어 한국에 오기 위해 E-9 서류를 준비 중이다. 한씨의 꿈은 베트남에서 한국 유학 전문 사업체를 꾸리는 것이다. 한국 패션에 관심이 많은 마이씨는 한국에서 옷가게를 열고 싶다. 한씨의 베트남과 마이씨의 한국은 이들에게 각각 어떤 내일이 될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결혼해 한국에 왔으니까, 오히려 한국어보다 몽골어가 달려요. 통역에 필요한 전문용어도 더 배우고 대학생활도 경험하고 싶어요.” 마야씨가 어머니를 한국에 남겨두고 몽골로 ‘어색한’ 유학을 떠나는 이유다. ‘결혼이주여성’으로 한정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출발선에 선 셈이다.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인 마야씨는 “1년이든, 3년이든 언니랑 엄마가 비자를 받아 함께 파란 바다도 보러가고, 자유롭게 몽골도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두리 기자 redo@khan.co.kr

TOP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